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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 징그러운 악연이여

정일웅 찻집 2007. 7. 16. 00:24

아직 제목 없는 자서전 

 

(4. 아! 징그러운 악연이여!)

5학년이 되었다. 새로 반이 편성되고 조금은 낯선 애들도 함께 모여
새 학년 새학급이 되었다.

아이들은 새로운 담임에 대한 기대로 마음을 부풀리며 첫날 첫시간에 교실에 들어오는 선생님을 초조하게 기다린다.

나는 박진규 선생님이 계속 담임을 하였으면 좋겠다하고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

아! 우리 모두는 경악하고 말았다. '이한충'! 선생님이었다.

교실 문을 화들짝 열어 제키고 싸늘한 눈초리로 타이어 슬리퍼를 직직 끄시며 들어오는 창백하고 잔인한 얼굴, 싸늘한 눈으로 살기를 뿌리며 대나무 뿌리 매를 손에 들고 들어왔다.

교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여 졌고 아이들의 눈에는 절망과 탄식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마치 지옥으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에 빠져들었다.

혹독한 매질과 욕설을 매일 견디며 노예들처럼 우리는 1년을 보냈다.

아! 그런데 나의 운명의 여신은 또 나를 저주하고 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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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 3반이 된 나의 담임 선생님은 또다시 '이 한충'이었다.

나는 죽고 싶으리 만치 고통스러웠다.

그는 '노 영자'라는 예쁘게 생긴 계집아이를 복도에서 만나면 안아서 보듬고 다녔고 그 계집아이를 예뻐할 때는 그의 얼굴에 함박꽃 같은 웃음이 가득하였다.


우리 반 아이인 '오세명'이의 어머니는 이틀이 멀다 하고 학교에 찾아왔다.

얼굴이 예쁘고 쥐잡아 먹은 여자처럼 굿지베니(루즈)를 진하게 칠한 그녀는 언제나 올 때에는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보자기에 점심 식사를 싸 가지고 왔다.

어느 때는 떡과 술을 가지고 오기도 하여 우리 교실에 다른 반 선생들이 와서 맛있게 먹으며 '오세명'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가난하고 병든 아버지와 날마다 장사를 하여 끼니를 잇는 엄마는 한번도 학교에 오지 않았다.

졸업이 가까워지고 우리는 모두 중학교에 관한 진학 문제로 관심이 집중되었다.

1957학년도에는 전과 같지 않게 초등학교의 내신 성적만으로 '사범병설중학교'에 진학을 할 수가 있었다. 무시험 진학의 시범 케이스였다.

나는 계속하여 우등생을 하였기 때문에 병설 중학교에 들어가서 나중에 선생님이 되었으면 하고 혼자서 마음먹고 있었다.

졸업이 가까워 지고 입학원서를 쓰기 시작한 어느 날 이한충 선생은 나를 다정하게 불렀다.

"정 익훈! 이리와 봐 !" 나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그는 나의 등에 손을 대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가 그토록 다정하게 말하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아버지 병환은 어떠시냐?"
"항상 누어 계셔요!"
"참 안됐구나 내일 엄마보고 학교에 한번 나오시라고 해라! 상의 드릴 일이 있구나! 알았지?"
"예!"

아! 나를 사범학교에 넣어 주시려고 그러시나보다.
나는 가슴이 뛰고 희망에 찬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 내가 왜 그토록 선생님을 미워했나!
속마음은 좋으신 분이었나!
믿을 수 없는 선생님의 태도에 마음은 혼돈으로 마음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나는 마음 깊숙히 희망과 기쁨을 감추고 어머니와 함께 이튿날 학교에 등교하였다.

나는 엄마를 설득하는 이한충선생님의 말을 뒤에서 듣고 있었다.

"익훈이 어머니! 얼마나 수고하십니까? 우리 익훈이는 공부도 잘하고 맘도 착하고 가난하지만 명랑하여서 어디 가서도 귀염받고 공부도 잘하여 성공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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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익훈이 어머니의 집안 사정을 잘 알아서 익훈이에게 아주 좋은 학교를 소개하려고 오시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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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학교는 졸업만 하면 바로 취직을 하여 돈은 많이 벌어서 아버지 병을 고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겁니다. 저를 믿으시고 그 학교에 보내실랍니까?"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아무런 반론 한마디 못하고 영문도 모르는 엄마는 그의 말에 동의하여 원서에 도장을 찍었고 나는 고등공민학교인 '인성중학교'라는 곳에 진학하기로 결정되었다.

나의 성적으로 다른 학생 그 누군가가 대신 사범병설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얼마 후에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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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같이 지내던 친구들 신문사집 '오건일' 교육감집 '조선정' 학장댁 '전기영' 이들은 모두 나보다 학교성적이 좋지 않았으나 모두 북중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내가 다니게 된 인성중학교는 선박에서 통신을 하는 모-스 부호를 배우는 학교로서 여기를 졸업하고 자격시험을 보면 군산이나 여수 목포의 해운 회사에 취직하여 배를 타고 다니며 선박의 통신원이 된다고 하였다.

내키지 않은 비참한 심정으로 인성중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학교의 건물이라고 하는 것은 커다란 창고를 칸막이를 하여 책상을 놓고 칠판을 걸어 놓은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일찍 모-스 부호를 익혔고 다른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아무도 나의 영어 수학 성적을 따라 오지 못하였다.

자동적으로 나는 반장이 되었고 학교의 선생님들이 나를 매우 기특하게 여기며 격려하여 주었다.

''ㄱ'=딴쓰 따란,(·―‥) 'ㄴ'= 따란 쓰 딴(‥―·), 'ㄷ'= 쓰 따라란(―…), 'ㄹ'= 따라란 쓰(…―), 'ㅁ'= 쓰 쓰(― ―), 'ㅂ'= 쓰딴쓰(―·―), 'ㅅ'= 쓰쓰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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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시절에 나의 이웃집 친구 오건일은 사범부속초등학교에 다녔다.
그의 아버지는 전북일보 보급부장이었고 마을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하루는 '오건일'이 아버지가 나를 불러서 말했다.
" 너 ! 신문배달 혀볼래?"
" 예! 시켜주십시요!"
"내일 학교 끝나고 신문사에 오너라"
"예 감사합니다."

3월 하순경 전북일보 신문사 갔다.
4월달부터 배달을 그만둘 학생의 배달구역을 사흘간 따라다니며 집과 코스를 외었다.
4월 1일 부터 신문을 배달하기 시작하였다.

나의 고학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신문배달을 하면서도 나는 모자를 쓰지 않았었다. 모표가 너무나 창피하였기 때문이었다.
어쩔수 없이 모자를 써야 할 때는 앞을 꾹 눌러서 모표가 보이지 않도록하여 쓰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