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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이리 남중학교 시절
정일웅 찻집
2007. 7. 19. 11:33
46. 이리 남중학교 시절
1984년 3월 1일자로 나는 이리 남중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임실에서 이리(지금의 익산시)까지는 통근하기엔 너무나 먼 거리였다.
서둘러서 임실 성가리의 집을 팔게 되었고 전주에 2층집 독채를 우선 전세로 얻어 이사를 하였다.
임실에 발을 붙힌지 18년 만에 제 2의 고향같은 임실을 떠나왔다.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어 새로운 활기가 솟았다.
임실.....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고 나의 힘으로 가정을 이끌어가기 시작하여 결혼을 하였고 아이들을 셋이나 낳은 곳 18년간 제자를 길러냈고 성당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곳....
정도 많이 들었고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되었고..... 고향이 되어버린듯한 고장 ....임실....
이삿짐을 트럭에 싣고 마을 사람들의 아쉬운 인사를 받으며 떠나오는 마음에 만감이 교차하였다.
이리까지 버스로 통근 할 일이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분명코 이리 남중학교에 전주에서 통근하는 선생님들이 많이 있을 것으로 보고 그들이 통근하는 방법에 따르기로 작정하고 부임하였다.
마침 이리 농촌진흥원의 기관버스가 전주에서 통근직원을 싣고 이리 남중학교 옆으로 지나 간단다.
농촌진흥원의 직원 만으로는 자리가 차지 않아서 이리시내의 몇몇학교 선생님들도 그 버스를 이용하여 통근을 하고 있다면서 통근을 하고 있는 박봉덕선생님과 오정환선생님 최중경 행정실 주사님이 서둘러 전화를 하여 나의 통근자리도 확보하여 주었다.
시외 버스값의 5분의 1밖에 되지않은 통근비를 내고 편리하게 타는 버스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잘 된 일인가?
내가 타는 정거장은 집에서 5분간 걸어서 나가면 되었다.
버스가 깨끗하고 모두 공무원들만 타기에 조용하고 시간을 정확하게 지켰다.
이 버스로 이리 마동 동부시장 4거리에서 내려 학교까지 5분가량 걸어가면 되었다.
활기찬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온 교사라서 학교에서 많은 사무를 내게 맡겼다.
학교환경정리...교육회사무...교내 생활지도부...준거집단활동...
수업시간도 꽤나 많았다.
18학급의 미술 수업시간이 1주일에 1,2학년이 24시간이었고, 3학년이 6시간, 모두 30시간에 음악수업을 1학년3학급 6시간을 더 맡아달라고 하여 어쩔수 없이 맡았다. 그래서 낮에 36시간 수업을 해야했고 밤에는 야간학교(산업체 특별학급)가 있어서 야간 1,2,3학년 각각 3학급에 전체가 9학급의 음악1시간과 미술1시간을 모두 합하면 야간에만 18시간......그래서 주간 수업시간이 주야간 통틀어 54시간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금도 싫지 않았다.
아직 젊고 힘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야간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것이 너무나 재미가 있었기에 더욱 좋았다.
야간의 특별학급은 공단의 직공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배움의 기회를 놓친 성인들이 다니는 학교였기에 이들에게 음악을 지도하는 것은 그들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서 정말 재미있는 수업을 하였다.
뿐만아니라 야간의 수업엔 1시간당 1500원의 수당을 따로 주는 것이었다.
1주일에 18시간*1500원이면 27000원.....한달에 4주 만 잡아도 십만원이 넘는 돈이 벌리는 것이었다.
야간에 나오는 수당을 계산하여 미리 외상으로 술을 마셨고 수당을 받는 날은 여러 친구들을 끌고 술집에 가서 왕창 다 술값으로 날려 버렸다.
나는 열심히 직원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당구를 치고 즐거운 세월을 보내었다.
이듬해에 나는 만장일치로 친목회간사가 되었으며 술마시고 노는 곳에는 언제나 약방의 감초처럼 어느곳에나 내가 끼어 들었다.
박봉덕선생님 최중경주사님, 이재식선생님 ......두 세명만 모여도 술값 내기 당구를 쳐서 술마시고, 또 2차전으로 당구를 치고 또 술마시고 ,또다시 당구장으로 올라가고 ......이렇게 하다보면 새벽 동이 터서 해장국 한사발을 사먹고 출근 하는 날이 많았다.
오병선 선생님이 부임하여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등산의 달인이었으며 전국의 모든 산을 모두 올라가 본 등산가였고 전국의 지리에 능통한 천재적 사나이였다.
이듬해 새로 부임한 유광열선생은 젊은 나이에 당구를 300이나 치는 멋장이였고 노래면 노래 분위기 띄우고 노는 것엔 도가 튼 젊은이 였다. 그는 겨우 80,이나 100을 놓고 치는 우리들의 당구를 심판하고 가르쳐주는 사부노릇을 하여주었다.
김양수 선생님께서 갑자기 함평고등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고 떠났다.
박봉덕선생님께서도 전주서중으로 떠나셨다.
오정환선생님은 이리 북중교무부장으로 떠나셨다.
김주철 연구부장도 떠나고 낯선 선생님들이 오실때마다 나는 친목회간사로써 이들의 송별회와 환영회를 하여주었다.
직원환영회를 하기 위하여 음악실에 전 직원이 모이고 신임직원 소개를 하였고 신임직원의 장끼를 선보이게 하는 자리에 '최 촌'선생님을 모셨다.
처음 부임한 자리에서 최촌선생님은 그의 기발한 몸짓과 익살로 나보다 더 웃기는 능력을 발휘하였다.
나보다 5년 정도 선배이신 최촌 선생님은 친형님처럼 나를 사랑해 주었고 술자리에선 친구처럼 형처럼 다정하게 대해주셨다.
나보다 한살 위이신 김길선 과학선생님, 사회과 임채진 선생님,과 최촌, 오병선, 유광열, 거기에 내가 끼면 안되는 일이 없었고 하는 일마다 웃음과 화기가 넘쳐났다.
나는 이리남중에 와서 처음 청소년연맹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누리단 학생들과 무주 제주도 등 야영을 할 때에도 오병선과 유광열은 적극적인 나의 후원자가 되어 나와 함께 행동하였고 학생지도에 그들이 솔선하여 통솔을 하였다.
교장선생님이 바뀌었다. 이명교 교장선생님께서 정년퇴임을 하시고 김인호 교장선생님이 부임하셨다.
김인호교장님은 나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이미 신임하고 귀엽게 봐주시려는 마음을 갖고 부임하셨나보다.
교장선생님은 임실교육청에서 최우련과 같이 근무를 하며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내가 최우련의 남편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나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나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지고 나를 대하셨다.
나를 인정하여 주는 김인호교장님이 오셔서는 나의 근무의욕에 활기가 더 붙었다.
그는 이리남중에 부임하기 전에 이미 나의 레그리에이션 지도 능력을 남에게서 들었고 학교친목회의 간사에 적임자라는 것을 알고 오셨다.
교장선생님의 이런 선입견때문에 사무가 하나 더 늘었다. 즉 새마을 어머니회를 맡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기꺼히 맡겠노라고 하였고 새마을 어머니회 운영으로 고생을 하시던 김혜경 여선생님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어머니들과 즐거운 시간을 만드는 것은 나에겐 너무나 쉽고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젊은 어머니들과 한달에 한 번씩 만나서 얘기하고 토론하고 새로운 가요를 가르치고 하는 것은 너무나 신나는 일이었다.
어머니회 회원들이 처음 36명에서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매월 마지막 수요일 오후 2시에 시작하는 어머니회 날에는 내가 미리 재미있는 가요의 악보를 복사하여 두었다가 회의 시작 전에 미리 오는 어머니들에게 장은생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가르쳤다.
사랑의 미로, 그날, 저구름 흘러가는 곳, 비목, 떠나가는 배 등 좋은 가곡이나 가요를 골라 미리 가르치고 있었으므로 어머니들이 앞다퉈 빨리 모이기 시작하였다.
어머니회를 하던 음악실이 좁아서 보조 의자를 과학실에서 모두 다 가져와서 놓아도 더이상 앉지 못하여 서서 회의를 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회의가 끝나고 나면 몇몇 어머니 회원들과 최촌선생님 김길선 선생님 거기에 가끔 임채진 선생님과 오병선 유광열이 합세하여 가까운 왕궁탑이나 미륵사지 등을 승용차로 돌아보며 소풍을 하는 것은 또 다른 재미였다.
1988년 한국에서 올림픽을 주최하기로 결정되어 올림픽준비가 한창이던 때의 어느날 김인호교장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자네! 우리학교 복도에다가 올림픽학습관을 만들어 볼랑가?"
나는 교장선생님의 이 제안을 들으며 '과연 교장은 뭔가 다르구나!!! 그렇지 내년에 올림픽경기를 우리나라에서 여는데 미리 올림픽에대한 공부를 학생들이 하는 것이 옳지않은가?'
"예! 참으로 좋으신 말씀이십니다. 제가 있는 재주를 다하여 한번 설치해 보겠습니다."
나는 자신있게 대답하였다
"그려!1 참 고맙네! 자네는 멋이든지 거역허지않고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허고 적극적으로 할라고 허는 것이 참 맘에 들어!!"
"내가 뒤에서 멋이든지 후원해 줄터이니 잘 히봐!"
"예! 걱정 마십시요!"
나는 그 다음날부터 올림픽에 관한 모든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올림픽의 역사
올림픽의 경기 종목
올림픽을 개최한 나라의 소개
올림픽의 경기별 기록보유 선수...등 올림픽에 관한 모든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서울에 있는 각 국의 대사관에 자기나라의 소개에 필요한 자료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하였다.
하루 출장을 내고 국회도서관에 가서 각국의 필요한 정보를 복사하고 국가홍보처에서 한국을 소개하는 각종자료가 들은 책자들을 수집하여 보따리에 싸들고 돌아왔다.
밤에는 자료를 분석하여 이들을 오리고 해설을 따로 붙여서 판넬을 한개씩 구상하여 밑그림을 그려나갔다.
3자*6자 짜리 베니어 판을 사서 건재상에서 이를 3등분하여 2자*3자짜리 판넬을 만들고 작은 판넬을 또다시 이를 절단하여 가며 만들어 갔다.
올림픽 의 역사에 대하여 제1회 아테네 대회에서 24회 서울올림픽에 이르기 까지 각 대회의 특징과 참가국, 참가선수, 개최국가의 지리상 위치와 특성 특산물이나 그 국가의 고유문화를 소개하는 판넬...........
각종 경기의 규칙과 간단한 설명자료를 판넬......
미술부의 학생 이승기 김천 윤환호 유영복 이 작은 학생들이 나의 톱질을 도와 주고 샌드페이퍼로 베니어판의 가장자리를 문지르는 등 많은 일을 하여 주었다.
거의 200여개에 가까운 판넬이 제작되어 이를 복도에 게시하는 날
교장선생님이 나에게 큰 칭찬과 함께 저녁식사를 사 주셨다.
이렇게 만든 올림픽 학습관은 차츰 소문이 좋게 나서 전북도 교육청에 까지 알려지더니 몇명의 도 장학사가 학교를 방문하여 올림픽학습관의 사진을 찍어 간 며칠 후에 전북의 각 학교에 올림픽학습관을 만들려거든 이리 남중학교에 가서 먼저 보고 만들어라는 공문이 나가게 되었고 나는 교육부 장관의 표창을 받게 되었다.
청소년 연맹 활동이나 친목회운영 등 모든일에 오병선과 유광열의 도움을 받아 활발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행사가 알차게 진행될 수 있었다.
최성수 교감선생님께서 교장자격을 따서 순창학무과장으로 발령받고 떠날 때 송별기념 전직원 당구대회를 열었다.
당구장에 처음으로 들어와 보는 여선생님도 많았지만 모두들 재미게 참여하고 뜻깊은 송별회가 되었다.
바쁘게 일하고 열심히 술마시고 열심히 당구치고 꿈같은 세월을 보내며 6년의 세월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방태혁선생님은 특수학급을 맡아서 해마다 부가 점수를 따가고 있었고 젊은 교사들이 승진을 위한 준비로 대학원을 다니고 교육자료 전에 출품을 하는 등 부지런히 승진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나는 마시고 놀고 학교 수업에 충실하는것 외에 나 자신을 위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박기덕선생님이 교무부장을 할 때 그는 나에게 넌즈시 다가와 귓속말을 하듯 속삭여 주었다.
"형님!! 형님이 여기 계실적에 대학원에라도 다니셔야죠....."
"뭐라고? 대학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학원을 어떻게 다닌단 말인가?
나는 2년제 교육대학을 나왔을 뿐 학사자격이 없었기에 대학원을 들어갈 자격이 못되었다.
'아! 내가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하는지 생각해 볼 때가 되었구나!'
다음날 부터 나의 뇌리속을 떠나지 않고 집요하게 붙어다니며 나에게 스스로 자책을 하게하는 충동이 수시로 나의 심장을 두들겼다.
'....그렇다! 방송통신대학이라도 다녀야 한다.!'
방송통신대학을 어떻게 해야 다닐 수 있는것일까?
어느 날 모처럼 집에 일찍 들어온 날 나는 아내 '우련'에게 말을 열었다.
"우리 방송통신대학에 다니는 것이 어떨까?"
이 말을 듣던 아내 최우련은 의외의 말을 내게서 들었다는 듯
"하이고 우리 서방님!1 속 차리셨네!!! 통신대학은 거저 다닌데???? 공부할라면 술부터 좀 적게 마셔야 할껄!!!"하며 빈정거렸다.
다음날 아내는 방송통신대학 지원서를 가져와서 자기것과 내것을 작성하고 있었다.
"무슨과로 할꺼야?"
"글쎄 영문과나 할까?"
"알았어!!! 나는 가정학과를 할테니깐 자기는 영문과를 쓸께!!"
...................
정들었던 김인호 교장선생님이 전라중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고 떠났다.
한진수 교장선생님이 오셨다.
김영환 교감선생님이 오셨다.
학교는 평화롭고 즐거운 나의 놀이터이요 마음의 안식처요 내 고민의 피난처였다.
또다시 선생님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나의 생활이 계속되었다.
1984년 3월 1일자로 나는 이리 남중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임실에서 이리(지금의 익산시)까지는 통근하기엔 너무나 먼 거리였다.
서둘러서 임실 성가리의 집을 팔게 되었고 전주에 2층집 독채를 우선 전세로 얻어 이사를 하였다.
임실에 발을 붙힌지 18년 만에 제 2의 고향같은 임실을 떠나왔다.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어 새로운 활기가 솟았다.
임실.....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고 나의 힘으로 가정을 이끌어가기 시작하여 결혼을 하였고 아이들을 셋이나 낳은 곳 18년간 제자를 길러냈고 성당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곳....
정도 많이 들었고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되었고..... 고향이 되어버린듯한 고장 ....임실....
이삿짐을 트럭에 싣고 마을 사람들의 아쉬운 인사를 받으며 떠나오는 마음에 만감이 교차하였다.
이리까지 버스로 통근 할 일이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분명코 이리 남중학교에 전주에서 통근하는 선생님들이 많이 있을 것으로 보고 그들이 통근하는 방법에 따르기로 작정하고 부임하였다.
마침 이리 농촌진흥원의 기관버스가 전주에서 통근직원을 싣고 이리 남중학교 옆으로 지나 간단다.
농촌진흥원의 직원 만으로는 자리가 차지 않아서 이리시내의 몇몇학교 선생님들도 그 버스를 이용하여 통근을 하고 있다면서 통근을 하고 있는 박봉덕선생님과 오정환선생님 최중경 행정실 주사님이 서둘러 전화를 하여 나의 통근자리도 확보하여 주었다.
시외 버스값의 5분의 1밖에 되지않은 통근비를 내고 편리하게 타는 버스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잘 된 일인가?
내가 타는 정거장은 집에서 5분간 걸어서 나가면 되었다.
버스가 깨끗하고 모두 공무원들만 타기에 조용하고 시간을 정확하게 지켰다.
이 버스로 이리 마동 동부시장 4거리에서 내려 학교까지 5분가량 걸어가면 되었다.
활기찬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온 교사라서 학교에서 많은 사무를 내게 맡겼다.
학교환경정리...교육회사무...교내 생활지도부...준거집단활동...
수업시간도 꽤나 많았다.
18학급의 미술 수업시간이 1주일에 1,2학년이 24시간이었고, 3학년이 6시간, 모두 30시간에 음악수업을 1학년3학급 6시간을 더 맡아달라고 하여 어쩔수 없이 맡았다. 그래서 낮에 36시간 수업을 해야했고 밤에는 야간학교(산업체 특별학급)가 있어서 야간 1,2,3학년 각각 3학급에 전체가 9학급의 음악1시간과 미술1시간을 모두 합하면 야간에만 18시간......그래서 주간 수업시간이 주야간 통틀어 54시간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금도 싫지 않았다.
아직 젊고 힘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야간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것이 너무나 재미가 있었기에 더욱 좋았다.
야간의 특별학급은 공단의 직공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배움의 기회를 놓친 성인들이 다니는 학교였기에 이들에게 음악을 지도하는 것은 그들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서 정말 재미있는 수업을 하였다.
뿐만아니라 야간의 수업엔 1시간당 1500원의 수당을 따로 주는 것이었다.
1주일에 18시간*1500원이면 27000원.....한달에 4주 만 잡아도 십만원이 넘는 돈이 벌리는 것이었다.
야간에 나오는 수당을 계산하여 미리 외상으로 술을 마셨고 수당을 받는 날은 여러 친구들을 끌고 술집에 가서 왕창 다 술값으로 날려 버렸다.
나는 열심히 직원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당구를 치고 즐거운 세월을 보내었다.
이듬해에 나는 만장일치로 친목회간사가 되었으며 술마시고 노는 곳에는 언제나 약방의 감초처럼 어느곳에나 내가 끼어 들었다.
박봉덕선생님 최중경주사님, 이재식선생님 ......두 세명만 모여도 술값 내기 당구를 쳐서 술마시고, 또 2차전으로 당구를 치고 또 술마시고 ,또다시 당구장으로 올라가고 ......이렇게 하다보면 새벽 동이 터서 해장국 한사발을 사먹고 출근 하는 날이 많았다.
오병선 선생님이 부임하여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등산의 달인이었으며 전국의 모든 산을 모두 올라가 본 등산가였고 전국의 지리에 능통한 천재적 사나이였다.
이듬해 새로 부임한 유광열선생은 젊은 나이에 당구를 300이나 치는 멋장이였고 노래면 노래 분위기 띄우고 노는 것엔 도가 튼 젊은이 였다. 그는 겨우 80,이나 100을 놓고 치는 우리들의 당구를 심판하고 가르쳐주는 사부노릇을 하여주었다.
김양수 선생님께서 갑자기 함평고등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고 떠났다.
박봉덕선생님께서도 전주서중으로 떠나셨다.
오정환선생님은 이리 북중교무부장으로 떠나셨다.
김주철 연구부장도 떠나고 낯선 선생님들이 오실때마다 나는 친목회간사로써 이들의 송별회와 환영회를 하여주었다.
직원환영회를 하기 위하여 음악실에 전 직원이 모이고 신임직원 소개를 하였고 신임직원의 장끼를 선보이게 하는 자리에 '최 촌'선생님을 모셨다.
처음 부임한 자리에서 최촌선생님은 그의 기발한 몸짓과 익살로 나보다 더 웃기는 능력을 발휘하였다.
나보다 5년 정도 선배이신 최촌 선생님은 친형님처럼 나를 사랑해 주었고 술자리에선 친구처럼 형처럼 다정하게 대해주셨다.
나보다 한살 위이신 김길선 과학선생님, 사회과 임채진 선생님,과 최촌, 오병선, 유광열, 거기에 내가 끼면 안되는 일이 없었고 하는 일마다 웃음과 화기가 넘쳐났다.
나는 이리남중에 와서 처음 청소년연맹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누리단 학생들과 무주 제주도 등 야영을 할 때에도 오병선과 유광열은 적극적인 나의 후원자가 되어 나와 함께 행동하였고 학생지도에 그들이 솔선하여 통솔을 하였다.
교장선생님이 바뀌었다. 이명교 교장선생님께서 정년퇴임을 하시고 김인호 교장선생님이 부임하셨다.
김인호교장님은 나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이미 신임하고 귀엽게 봐주시려는 마음을 갖고 부임하셨나보다.
교장선생님은 임실교육청에서 최우련과 같이 근무를 하며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내가 최우련의 남편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나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나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지고 나를 대하셨다.
나를 인정하여 주는 김인호교장님이 오셔서는 나의 근무의욕에 활기가 더 붙었다.
그는 이리남중에 부임하기 전에 이미 나의 레그리에이션 지도 능력을 남에게서 들었고 학교친목회의 간사에 적임자라는 것을 알고 오셨다.
교장선생님의 이런 선입견때문에 사무가 하나 더 늘었다. 즉 새마을 어머니회를 맡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기꺼히 맡겠노라고 하였고 새마을 어머니회 운영으로 고생을 하시던 김혜경 여선생님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어머니들과 즐거운 시간을 만드는 것은 나에겐 너무나 쉽고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젊은 어머니들과 한달에 한 번씩 만나서 얘기하고 토론하고 새로운 가요를 가르치고 하는 것은 너무나 신나는 일이었다.
어머니회 회원들이 처음 36명에서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매월 마지막 수요일 오후 2시에 시작하는 어머니회 날에는 내가 미리 재미있는 가요의 악보를 복사하여 두었다가 회의 시작 전에 미리 오는 어머니들에게 장은생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가르쳤다.
사랑의 미로, 그날, 저구름 흘러가는 곳, 비목, 떠나가는 배 등 좋은 가곡이나 가요를 골라 미리 가르치고 있었으므로 어머니들이 앞다퉈 빨리 모이기 시작하였다.
어머니회를 하던 음악실이 좁아서 보조 의자를 과학실에서 모두 다 가져와서 놓아도 더이상 앉지 못하여 서서 회의를 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회의가 끝나고 나면 몇몇 어머니 회원들과 최촌선생님 김길선 선생님 거기에 가끔 임채진 선생님과 오병선 유광열이 합세하여 가까운 왕궁탑이나 미륵사지 등을 승용차로 돌아보며 소풍을 하는 것은 또 다른 재미였다.
1988년 한국에서 올림픽을 주최하기로 결정되어 올림픽준비가 한창이던 때의 어느날 김인호교장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자네! 우리학교 복도에다가 올림픽학습관을 만들어 볼랑가?"
나는 교장선생님의 이 제안을 들으며 '과연 교장은 뭔가 다르구나!!! 그렇지 내년에 올림픽경기를 우리나라에서 여는데 미리 올림픽에대한 공부를 학생들이 하는 것이 옳지않은가?'
"예! 참으로 좋으신 말씀이십니다. 제가 있는 재주를 다하여 한번 설치해 보겠습니다."
나는 자신있게 대답하였다
"그려!1 참 고맙네! 자네는 멋이든지 거역허지않고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허고 적극적으로 할라고 허는 것이 참 맘에 들어!!"
"내가 뒤에서 멋이든지 후원해 줄터이니 잘 히봐!"
"예! 걱정 마십시요!"
나는 그 다음날부터 올림픽에 관한 모든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올림픽의 역사
올림픽의 경기 종목
올림픽을 개최한 나라의 소개
올림픽의 경기별 기록보유 선수...등 올림픽에 관한 모든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서울에 있는 각 국의 대사관에 자기나라의 소개에 필요한 자료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하였다.
하루 출장을 내고 국회도서관에 가서 각국의 필요한 정보를 복사하고 국가홍보처에서 한국을 소개하는 각종자료가 들은 책자들을 수집하여 보따리에 싸들고 돌아왔다.
밤에는 자료를 분석하여 이들을 오리고 해설을 따로 붙여서 판넬을 한개씩 구상하여 밑그림을 그려나갔다.
3자*6자 짜리 베니어 판을 사서 건재상에서 이를 3등분하여 2자*3자짜리 판넬을 만들고 작은 판넬을 또다시 이를 절단하여 가며 만들어 갔다.
올림픽 의 역사에 대하여 제1회 아테네 대회에서 24회 서울올림픽에 이르기 까지 각 대회의 특징과 참가국, 참가선수, 개최국가의 지리상 위치와 특성 특산물이나 그 국가의 고유문화를 소개하는 판넬...........
각종 경기의 규칙과 간단한 설명자료를 판넬......
미술부의 학생 이승기 김천 윤환호 유영복 이 작은 학생들이 나의 톱질을 도와 주고 샌드페이퍼로 베니어판의 가장자리를 문지르는 등 많은 일을 하여 주었다.
거의 200여개에 가까운 판넬이 제작되어 이를 복도에 게시하는 날
교장선생님이 나에게 큰 칭찬과 함께 저녁식사를 사 주셨다.
이렇게 만든 올림픽 학습관은 차츰 소문이 좋게 나서 전북도 교육청에 까지 알려지더니 몇명의 도 장학사가 학교를 방문하여 올림픽학습관의 사진을 찍어 간 며칠 후에 전북의 각 학교에 올림픽학습관을 만들려거든 이리 남중학교에 가서 먼저 보고 만들어라는 공문이 나가게 되었고 나는 교육부 장관의 표창을 받게 되었다.
청소년 연맹 활동이나 친목회운영 등 모든일에 오병선과 유광열의 도움을 받아 활발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행사가 알차게 진행될 수 있었다.
최성수 교감선생님께서 교장자격을 따서 순창학무과장으로 발령받고 떠날 때 송별기념 전직원 당구대회를 열었다.
당구장에 처음으로 들어와 보는 여선생님도 많았지만 모두들 재미게 참여하고 뜻깊은 송별회가 되었다.
바쁘게 일하고 열심히 술마시고 열심히 당구치고 꿈같은 세월을 보내며 6년의 세월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방태혁선생님은 특수학급을 맡아서 해마다 부가 점수를 따가고 있었고 젊은 교사들이 승진을 위한 준비로 대학원을 다니고 교육자료 전에 출품을 하는 등 부지런히 승진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나는 마시고 놀고 학교 수업에 충실하는것 외에 나 자신을 위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박기덕선생님이 교무부장을 할 때 그는 나에게 넌즈시 다가와 귓속말을 하듯 속삭여 주었다.
"형님!! 형님이 여기 계실적에 대학원에라도 다니셔야죠....."
"뭐라고? 대학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학원을 어떻게 다닌단 말인가?
나는 2년제 교육대학을 나왔을 뿐 학사자격이 없었기에 대학원을 들어갈 자격이 못되었다.
'아! 내가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하는지 생각해 볼 때가 되었구나!'
다음날 부터 나의 뇌리속을 떠나지 않고 집요하게 붙어다니며 나에게 스스로 자책을 하게하는 충동이 수시로 나의 심장을 두들겼다.
'....그렇다! 방송통신대학이라도 다녀야 한다.!'
방송통신대학을 어떻게 해야 다닐 수 있는것일까?
어느 날 모처럼 집에 일찍 들어온 날 나는 아내 '우련'에게 말을 열었다.
"우리 방송통신대학에 다니는 것이 어떨까?"
이 말을 듣던 아내 최우련은 의외의 말을 내게서 들었다는 듯
"하이고 우리 서방님!1 속 차리셨네!!! 통신대학은 거저 다닌데???? 공부할라면 술부터 좀 적게 마셔야 할껄!!!"하며 빈정거렸다.
다음날 아내는 방송통신대학 지원서를 가져와서 자기것과 내것을 작성하고 있었다.
"무슨과로 할꺼야?"
"글쎄 영문과나 할까?"
"알았어!!! 나는 가정학과를 할테니깐 자기는 영문과를 쓸께!!"
...................
정들었던 김인호 교장선생님이 전라중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고 떠났다.
한진수 교장선생님이 오셨다.
김영환 교감선생님이 오셨다.
학교는 평화롭고 즐거운 나의 놀이터이요 마음의 안식처요 내 고민의 피난처였다.
또다시 선생님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나의 생활이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