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이숙자
2009년 5월 15일 토요일,
인사동의 '미술관 가는 길'이라는 갤러리에서는 '어머니 그리고 엄마'라는 타이틀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김형근 화백님의 말씀도 인상적이었지만,
나는 갤러리 한 쪽 벽에 걸려있던 이숙자 선생님의 작품에 시선이 갔다.
이숙자 선생님은 보리밭의 화가로 널리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보리밭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그리셨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아마 이 분의 보리밭 그림이 다른 어떤 이의 작품보다도 유난히 인상적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이 분의 보리밭 그림을 보고 있으면, 오묘한 감정의 물결이 내 주변에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어찌보면 단순한 보리밭 풍경화일 뿐인데,
그냥 보기 좋다라고 생각하고 보고 있기에는 어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숨겨져 있다.
그 숨겨진 것이 무엇일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편안하지만은 않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숙자, 바람결 이는 푸른 보리밭, 307.5x223cm, 1994
이숙자, 청맥-끝없이 펼쳐진, 162.2x130.3cm, 1996
이숙자, 청황맥-보리가 영글 때, 130.3x97.0cm, 1996
이숙자, 황맥, 130.3x97.0cm, 1991
이숙자, 황맥과 달개비꽃, 116.8x91.0cm, 1998
이숙자, 백맥-보리밭 사잇길, 116.8x91.0cm, 1996
눈치채셨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청맥에서 보리가 점점 익어가는 모습의 순서로 작품들을 배열해 보았다.
보리는 시간이 지나면 청맥에서 황맥으로 변한다.
선생님의 작품들에는 완전히 청맥, 황맥도 있지만,
청맥에서 황맥으로 변하는 중간 대의 보리밭 작품도 있다.
또, 흰색에 가까운 백맥이라는 작품도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백맥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풍맥이라는 작품도 있다, 아마 바람에 휘날리는 보리밭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작품을 대충만 훑어보면 일단 단순한 풍경화로서 참 멋지다라는 정도의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는 이 분의 작품을 한 5분 이상 꼼꼼하게 보고 있으면,
뭔가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이숙자 선생님의 보리밭 그림에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된다.
일단, 보리 하나 하나의 모습들이 달라 정리되지 않고 자유롭다.
어떤 규칙이 있는 듯 하면서도, 꼼꼼하게 살펴보면 보리 하나하나의 모습들이 모두 다르다.
어떻게 저렇게 하나하나 다르게 그릴 수 있었을까?
혹시, 사진기를 이용했을까?
그랬을 수도 있지만, 사진기를 이용했다면, 저런 느낌의 회화적인 느낌의 보리밭이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선생님의 성실함이라고 평범하게 얘기하기엔 부족하다.
외람되지만, 내 눈에 선생님의 보리밭 작품은 작가의 집착과 아집, 그리고 강박관념의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내가 불규칙적인 보리들의 모습 때문에 작품 속에서 긴장감을 느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솔직히, 내가 풍경화를 보면서 다소 불편하고 긴장감을 느끼는 작품은 별로 없었다.
들판, 숲, 물가, 산이 그려진 풍경화를 보고 불편하고 불안감, 그리고 긴장감을 느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이숙자 선생님의 보리밭 작품은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
왜일까?
객관적으로 설명할 길이 별로 없다.
하지만, 나는 작가분이 보리밭을 그릴 때의 감정상태는 결코 편안한 자연 풍경을 그릴 때의 느낌이 아니었을거라 생각된다.
많이 고달프고, 심적으로 힘들고, 인생에 대해 고뇌가 있는 상황에서, 또는
육체적으로도 아프다거나, 미칠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상황에서 보리밭을 느리시지 않았을까 싶다.
언젠가 작가 분의 작품 의도를 한번 물어보고 싶다.
여기까지는 이숙자 선생님의 보리밭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이숙자 선생님의 보리밭 작품의 백미는 보리밭 배경의 여성 누드화일 것이다.
이숙자, 이브의 보리밭 90-2, 162.2x130.3cm, 1990
이숙자, 이브의 보리밭 90-3, 162.2x130.3cm, 1990
이숙자, 이브의 보리밭 90-6, 162.2x130.3cm, 1990
이숙자, 이브의 보리밭 93-2, 130.3x97.0cm, 1993
이숙자, 이브의 보리밭, 193.9x130.3cm, 1989
이숙자, 이브의 보리밭97-3, 100.0x80.3cm, 1997
이숙자,이브의 보리밭-보리밭 환상, 145x112cm,2006
사진상으로만 봐도 참으로 인상적인 작품들이다.
처음에 봤던 보리밭 작품들은 불안감이 있고 긴장감은 있을지 몰라도, 에로틱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리밭에 누드 여성의 작품은 강렬한 에로티시즘을 발휘한다.
실제로 작품을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이숙자 선생님의 보리밭에 나체 여성, 즉 이브가 그려진 작품은 너무도 강렬하다.
이브가 정면을 응시하는 작품에서 이브와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메두사를 만났을 때의 경험을 하는 듯,
뭔가 악녀의 유혹을 받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많이 당황스럽다.
다소 민망할 정도로 여성의 치부가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많은 분들이 오래동안 꼼꼼히 작품을 보고 있지 못한다.
다소 민망한 생각도 들고, 주변의 시선도 의식될 수 있다.
언젠가 한번 용기를 내서 꼼꼼히 쳐다보았지만,
정밀하고 또 약간은 과장된 듯한 여성의 치부가 그려진 모습을 오래동안 쳐다보긴 어려웠다.
이번 전시회에서도 이런 작품이 있었는데,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나도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 오래보기는 참 힘들었다.
그런데,
이숙자 선생님의 작품 속 여성의 눈빛은 참으로 낯이익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저 눈빛은 천경자 선생님의 작품 속 여성의 눈빛과 너무 닮았다.
왜일까? 찾아보니 이숙자 선생님은 천경자 선생님께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
그 정보를 알고나서 보니,
왠지 이숙자 선생님의 작품에서 뿜어지는 에너지가 천경자 선생님의 작품에서 뿜어지는 에너지와 비슷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천경자 선생님의 작품 속 에너지도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고 긴장되어 있다.
또, 그 분의 제자인 이숙자 선생님도 스승님의 그런 에너지를 닮아 있다.
개인적으로 이숙자 선생님의 에로티시즘의 강도는 클림트의 작품을 능가한다고 본다.
내게는 클림트에 나오는 팜프파탈의 여성들보다도 더욱 더 팜프파탈의 여성으로 다가온다.
그런 충격은 참으로 오래간다.
위에 작품들을 보고, 다시 보리밭만 있는 작품을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이숙자, 들판이 보이는 청맥, 90.9x72.7cm, 1992
이숙자, 망초꽃이 있는 청맥, 220x110cm, 1995
풍맥, 이숙자, 130.3x162.2cm,1985
다른 분들의 눈에도 뭔가 변화가 생겼을지..
나는 위에 보리밭 작품들이 단순한 풍경화로 보이지는 않는다.
보리밭 속 어딘가에는 저런 벌거벗은 여성이 숨어 있는 것이 상상될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이숙자 선생님의 보리밭 작품을 보면, 긴장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 풍요롭고 고요한 듯한 보리밭 속에는
팜프파탈 여성이 벌거벗은 채로 나를 유혹하려고 있는 상상을 하게 되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