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웅 찻집 2016. 7. 6. 15:20

42. 이리 남중학교

 

198431일자로 나는 이리 남중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임실에서 이리(지금의 익산시)까지는 통근하기엔 너무나 먼 거리였다.

서둘러서 임실 성가리의 집을 팔게 되었고

전주시 금암동에 2층집 독채가 생각보다 싼 값에 전세가 나와 있어서 이것저것 따지지도 않고

서둘러 계약을 하고 이사를 하였다.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니 활기가 솟았다.

 

임실.....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고 나의 힘으로 가정을 이끌어가기 시작하여 결혼을 하였고,

 

아이들을 셋이나 낳은 곳

18년간 제자를 길러냈고 성당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곳....

정도 많이 들었고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되었고.....

2의 고향이 되어버린 고장 ....

임실....

이삿짐을 트럭에 싣고 마을 사람들의 아쉬운 인사를 받으며 떠나오는 마음에 만감이 교차하였다.

.................................

막상 전주에 이사를 하고 보니 통근 할 일이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분명코 이리 남중학교에도

전주에서 통근하는 선생님들이 많이 있을 것으로 보고

그들이 통근하는 방법에 따르기로 작정하고 부임하였다.

 

마침 이리 농촌진흥원의 기관버스가

전주에서 통근직원을 싣고 이리 남중학교 옆으로 지나간단다.

농촌진흥원의 직원만으로는 자리가 차지 않아서 이리시내의 몇몇 학교 선생님들도 그 버스를 이용하여 통근을 하고 있다면서

통근을 하고 있는 박 봉덕선생님과 오 정환선생님,

최 중경행정실 주사님이 서둘러 전화를 하여

나의 통근자리도 확보하여 주었다.

 

시외버스 값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은 통근 비를 내고

편리하게 타는 버스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잘 된 일인가?

내가 타는 정거장은 집에서 5분간 걸어서 나가면 되었다.

버스가 깨끗하고 모두 공무원들만 타기에 조용하고 시간을 정확하게 지켰다.

이 버스로 이리 마동 동부시장 4거리에서 내려 학교까지 3분가량만 걸어가면 되었다.

 

활기찬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온 교사라서 학교에서 많은 사무를 내게 맡겼다.

학교환경정리...교육회 사무...교내 생활지도부...준거집단활동...

수업시간도 꽤나 많았다.

 

<주당 54시간 수업>

이리남중학교는

학년당 6학급 ....전체 18학급이고

미술수업시간이

1주일에 두 시간 씩 1, 2학년의 수업시간이 모두 24시간이었고,

3학년이 6시간, .........................합쳐서 30시간에

음악수업을 하시는 박 진문선생님이 건강상 많은 시간의 수업을 하기가 어렵다 해서

음악과목을 1학년 3학급에 2시간씩............ 6시간을 어쩔 수 없이 맡았다.

그래서 낮에 36시간 수업을 해야 했고

 

밤에는 야간학교(산업체 특별학급)가 있어서 야간까지 수업을 해야 했다.

야간학교는 1, 2, 3학년 각각 3학급으로 전체가 9학급인데

각 학급마다 음악1시간과 미술1시간을 모두 합하면

야간에만 18시간......

 

그래서 주간 수업시간이 주야간 통틀어

주당 54시간 수업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금도 싫지 않았다.

 

아직 젊고 힘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야간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것이 너무나 재미가 있었기에 더욱 좋았다.

야간의 특별학급은 공단의 직공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배움의 기회를 놓친 성인들이 다니는 학교였기에 이들에게 음악을 지도하는 것은 그들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서 정말 재미있는 수업을 하였다.

뿐 만 아니라 야간의 수업엔 1시간당 1500원의 수당을 따로 주는 것이었다.

 

1주일에 18시간x1500원이면 27000.....한달에 4주 만 잡아도 십만원이 넘는 돈이 벌리는 것이었다.

야간에 나오는 수당을 계산하여

나는 열심히 직원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당구를 치고 즐거운 세월을 보내었다.

이듬해에 나는 만장일치로 친목회간사가 되었으며 술 마시고 노는 곳에는 언제나 약방의 감초처럼 어느 곳에나 내가 끼어들었다.

 

<술 당구 콤비들>

박 봉덕선생님 최 중경주사님, ‘이 재식선생님 ......두 세 명만 모여도 술값 내기 당구를 쳐서 술 마시고,

2차전으로 당구를 치고 또 술 마시고 ,

또다시 당구장으로 올라가고 ......이렇게 하다보면 새벽 동이 터서 해장국 한 사발을 사먹고 출근 하는 날도 더러 있었다.

 

오 병선선생님이 부임하여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등산의 달인이었으며 전국의 모든 산을 모두 올라가 본 등산가였고 전국의 지리에 능통한 천재적 사나이였다.

이듬해 새로 부임한 유 광열선생은 젊은 나이에 당구를 500이나 치는 멋쟁이였고 노래도 잘 하고 분위기 띄우고 노는 것엔 도가 튼 젊은 교사였다.

 

그는 겨우 80,이나 100을 놓고 치는 우리들의 당구를 심판하고 가르쳐주는 사부노릇을 하여주었다.

우리 젊은이들이 형처럼 따르던 김 양수선생님께서 갑자기 함평고등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고 떠났다.

박 봉덕선생님께서도 전주서중으로 떠나셨다.

오 정환선생님은 이리 북중 교무부장으로 떠나셨다.

김 주철연구부장도 떠나고 낯선 선생님들이 오실 때마다 나는 친목회간사로써 이들의 송별회와 환영회를 하여주었다.

 

이리남중 근무 3년 되던 해

신임 직원환영회를 하기 위하여 음악실에 전 직원이 모이고

신임직원 소개를 하였다.

신임직원의 장끼를 선보이게 하는 자리에 새로 오신 '최 촌'선생님을 모셨다.

처음 부임한 자리에서 최 촌선생님은 그의 기발한 몸짓과 익살로 나보다 더 웃기는 능력을 발휘하였다.

최 촌 선생님의 지정곡은 이렇다.

'가로등도 졸 고있-는 비오는 골목길에 두손을 마주-잡고-'

노래하며 사이사이 그의 엽기적인 표정과 몸짓이 모든 이의 웃음을 터지게 하는 독창적인 장끼였다.

 

나보다 5년 정도 선배이신 최 촌 선생님은 친형님처럼 나를 사랑해 주었고 술자리에선 친구처럼 형처럼 다정하게 대해주셨다.

나보다 한살 위인 김 길선과학 선생님,

사회과 임 채진선생님과최 촌’, ‘오 병선’, ‘유 광열’,

거기에 내가 끼면 안 되는 일이 없었고 하는 일마다 웃음과 화기가 넘쳐났다.

 

나는 이리남중에 와서 처음 청소년연맹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누리단 학생들과 무주 제주도 등 야영을 할 때에도

 

오 병선유 광열은 적극적인 나의 후원자가 되어

나와 함께 행동하였고 학생지도에 그들이 솔선하여 통솔을 하였다.

.................

최 성수교감선생님은 당구를 무척 좋아하여서 당구를 치러가는 우리를 따라 같이 당구를 즐기곤 하였는데

젊은 나이에 교장자격을 따서 순창학무과장으로 발령받고 떠날 때였다.

 

친목회 간사였던 나의 아이디어로 토요일 오후에 송별식을 하고

송별기념 전 직원 당구대회를 열었다.

당구장에 처음으로 들어와 보는 여선생님도 많았지만 모두들 재미있게 참여하고 뜻 깊은 송별회가 되었다.

 

바쁘게 일하고 열심히 술 마시고 열심히 당구치고 꿈같은 세월을 보내며 세월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파트 경매 통보>

2층 단독 주택의 계약기간이 끝나고 인후동 남양 아파트를 전세일천만원에 얻어 이사를 하였다.

아파트 생활은 처음이었지만 무척 편하였다.

연탄보일러와 석유보일러가 동시에 설치된 아파트였다.

 

3개월을 살고 있었을 때 돌연 전주 지방법원에서 통보가 왔다.

 

내가 사는 집이 경매 처분된다는 거였다.

황당한 현실을 접하고 겁이 덜컥 났다.

법무사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

어니! 친구! 세상에서 제일 어리 숙한 사람이 선생과 공무원이라더니 .....! 이 사람아! 전세를 계약하기 전에 등기부 등본도 확인 안하고 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가만 놔두면 전세금도 날아가고 한 푼도 못 찾게 되는 수도 있다네!

 

어리둥절하고 화가 치밀어 아파트 주인으로 돼있는 회사를 찾아갔다.

엄청 화가 나고 은근히 겁도 났지만 회사에 찾아가 책임자 같은 사람에게 전세금 내 놓으라고 싸울 듯 달려들었더니

제발 이 아파트를 사 달라고 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일천만원 전세금이 있으니까, 천 만 원만 더 주면 완벽하게 등기 이전을 해 주겠다 한다.

..................

불안과 분노가 엇갈리는 중에도 아내는 그냥 사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 하였다.

다시 회사에 찾아가 단호하게 선언하였다.

 

등기 이전 완전히 마쳐주면 800만원 더 주기로 하죠!...싫으면 당장 전세금을 내 놓으시던가....”

나와 흥정을 하던 사나이가

잠깐 사무실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그렇게 하시죠! 선생님! 이 집 정말 싸게 사신 줄 알고나 계세요

.....................

전주시에서 낡은 아파트지만 내 집으로 등기가 나온 것을 확인 하고보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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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남중에 부임한 이듬해

 

교장선생님이 바뀌었다.

 

이 명교교장선생님께서 정년퇴임을 하시고 김 인호교장선생님이 부임하셨다.

 

김 인호교장님은 나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이미 나를 신임하고 귀엽게 봐주시려는 마음을 갖고 부임하셨나보다.

김 인호교장선생님은 임실교육청에서 최 우남과 같이 근무를 하며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내가 최 우남의 남편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나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나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나를 인정하여 주는 김 인호교장님이 오셔서 나는 근무에 활기가 더 붙었다.

 

그는 이리남중에 부임하기 전에 이미 나의 레크리에이션 지도 능력을 남에게서 들었고 학교친목회의 간사에 적임자라는 것을 알고 오셨다.

 

<새마을 어머니 회>

교장선생님의 이런 선입견 때문에 사무가 하나 더 늘었다.

새마을 어머니회를 맡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기꺼이 맡겠노라고 하였고 새마을 어머니회 운영으로 고생을 하시던 김 혜경여선생님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어머니들과 즐거운 시간을 만드는 것은 나에겐 너무나 쉽고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젊은 어머니들과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서 얘기하고 토론하는 것 외에

이들에게 어머니회의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서

새로 유행되는 좋은 가요를 가르치기로 마음먹고 실천하였다.

어머니회 회원들이 처음 36명에서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여 120명까지 되었다.

 

매월 마지막 수요일 오후 2시에 시작하는 어머니회 날에는 내가 미리 재미있는 가요의 악보를 복사하여 두었다가 회의 시작 전에 미리 오는 어머니들에게 나누어 조고

'장 은생'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가르쳤다.

<사랑의 미로>,

<그날>,

<저 구름 흘러가는 곳>,

<비목>,

<떠나가는 배> 등 좋은 가곡이나 가요를 골라 미리 가르치고 있었으므로 어머니들이 앞 다퉈 빨리 모이기 시작하였다.

 

어머니회를 하던 음악실이 좁아서 보조 의자를 과학실에서 모두 다 가져와서 놓아도 더 이상 앉지 못하여 서서 회의를 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

회의가 끝나고 나면 몇몇 어머니 회원들과 '최 촌'선생님 '김 길선' 선생님 거기에 가끔 '임 채진' 선생님과 친아우처럼 지내는 '오 병선' '유 광열'선생이 합세하여

 

가까운 왕궁 탑이나 미륵사지 등을 승용차로 돌아보며 소풍을 하는 것은 또 다른 재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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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한국에서 올림픽을 주최하기로 결정되어 올림픽준비가 한창이던 때의 어느 날 김 인호교장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올림픽 학습관>

"자네! 우리학교 복도에다가 올림픽 학습 관을 만들어 볼랑가?"

나는 교장선생님의 이 제안을 들으며

'과연 교장은 뭔가 다르구나!!! 그렇지 내년에 올림픽경기를 우리나라에서 여는데 미리 올림픽에 대한 공부를 미리 학생들이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 참으로 좋으신 말씀이십니다.

제가 있는 재주를 다하여 한번 설치해 보겠습니다."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

"그려! 참 고맙네! 자네는 멋이든지 거역 허지 않고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 허고 적극적으로 할 라고 허는 것이 참 맘에 들어!!"

"내가 뒤에서 멋이든지 후원해 줄팅게 잘 히봐!"

"! 걱정 마십시요!"

나는 그 다음날부터 올림픽에 관한 모든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올림픽의 역사

올림픽의 경기 종목

올림픽을 개최한 나라의 소개

올림픽의 경기별 기록보유 선수...등 올림픽에 관한 모든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 했다.

우선 서울에 있는 각 국의 대사관에 자기나라의 소개에 필요한 자료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하였다.

하루는 출장을 내고 서울에 올라가

국회도서관에 가서 각국의 필요한 정보를 복사하고

국가 홍보처에서 한국을 소개하는 각종자료가 들은 책자들을 수집하여 보따리에 싸들고 돌아왔다.

밤에는 자료를 분석하여 이들을 오리고 해설을 따로 붙여서 게시판을 한 개씩 구상하여 밑그림을 그려나갔다.

 

3x6자 짜리 베니어판을 사서 건재상에서 이를 3등분하여

2x3자짜리 패널을 만들고 작은 게시판을 또다시 이를 절단하여 가며 만들어 갔다.

 

올림픽 의 역사에 대하여

1회 아테네 대회에서 24회 서울올림픽에 이르기 까지

각 대회의 특징과 참가국, 참가선수,

개최국가의 지리상 위치와 특성 특산물이나 그 국가의 고유문화를 소개하는 패널...........

 

각종 경기의 규칙과 간단한 설명 자료를 설명한 게시판을 만들었다.

 

미술부의 학생 이 승기’ ‘김 천’ ‘윤 환호’ ‘유 영복이 작은 학생들이 나의 톱질을 도와주고 샌드페이퍼로 베니어판의 가장자리를 문지르는 등 많은 일을 하여 주었다.

 

거의 200여개에 가까운 게시판이 제작되어 이를 복도에 게시하는 날

교장선생님이 나에게 큰 칭찬과 함께 저녁식사를 사 주셨다.

 

이렇게 만든 올림픽 학습관은 차츰 소문이 좋게 나서 전북도 교육청에 까지 알려졌다.

어느 날 몇 명의 도 장학사가 학교를 방문하여 올림픽학습관의 사진을 찍어 가고

며칠 후에 전북의 각 학교에 올림픽 학습관을 만들려거든 이리 남중학교에 가서 먼저 보고 만들어라는 공문이 나가게 되었고 그 공적으로 교육부 장관의 표창을 받게 되었다.

.............

<정신 차리게 한 말 한 마디>

방 태혁선생님은 특수학급을 맡아서 해마다 부가 점수를 따가고 있었고

젊은 교사들이 승진을 위한 준비로 대학원을 다니고

교육자료 전에 출품을 하는 등 부지런히 승진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나는 마시고 놀고 학교 수업에 충실 하는 것 외에 나 자신을 위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

박 기덕선생님이 교무부장을 할 때 그는 나에게 넌지시 다가와 귓속말을 하듯 속삭여 주었다.

"형님!! 형님이 여기 이리에 계실 적에 원대 대학원에라도 다니셔야죠....."

"뭐라고? 대학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학원을 어떻게 다닌단 말인가?

나는 2년제 교육대학을 나왔을 뿐 학사자격이 없었기에 대학원을 들어갈 자격이 못되었다.

'! 내가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볼 때가 되었구나!'

다음 날 부터 나의 뇌리 속을 떠나지 않고 집요하게 붙어 다니며 나에게 스스로 자책을 하게하는 충동이 수시로 나의 심장을 두들겼다.

 

<방송 통신 대학>

'....그렇다! 대학원을 가려면 먼저 학사가 되어야 한다.

학사자격을 얻으려면 방송통신대학에 가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다.!'

방송통신대학을 어떻게 해야 다닐 수 있는 것일까?

...............

어느 날 모처럼 집에 일찍 들어온 날 나는 아내 '우남'에게 말을 열었다.

"우리 같이 방송통신대학에 다니는 것이 어떨까?"

이 말을 듣던 아내 최 우남은 의외의 말을 내게서 들었다는 듯

"하이고 우리 서방님! 속 차리셨네!!!

통신대학은 거저 다닌데???? 공부할라면 술부터 좀 적게 마셔야 할 껄!!!"하며 빈정거렸다.

다음날 아내는 방송통신대학 지원서를 가져와서 자기 것과 내 것을 작성하고 있었다.

"무슨 로 할 꺼야?"

"글쎄 영문과나 할까?"

"알았어!!! 나는 가정학과를 할 테니깐 자기는 영문과를 쓸 께!!"

...................

통신대 원서를 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우편물이 왔다.

최 우남 앞으로 온 방송통신대 등록 알림 내용이었다.

최 우남은 가정학과에 합격하였고

나는 영문학과에서 낙방하였다.

나는 크게 실망하지 않고 무엇 때문에 떨어졌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

며칠 후

여보! 통신대 등록하러 안 갈 거야?”

가서 하고 와!”

같이 가야지~~왜 원서를 내 놓고 등록을 안 해?”

~~? 나 떨어졌잖아~”

아니야~~! 여기 제 2지망 경제학과에 합격했는데??”

뜻 밖 이었다.

경제학과면 어떻고 무슨 학과면 어떠하리....생각하며 같이 가서

등록을 하였다.

전주 효자동 예비군 중대장 강 대규’, 대한 생명 보험회사 다니는 이 한규전주 교도소에 근무하는 김 영옥등 친구 될 만한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과 전북대학교 강의실에서 경제학과 공부를 하였다.

 

오랜만에 해 보는 공부라서 힘도 들었지만 재미도 있었다.

거시경제학’ ‘미시 경제학등은 할 만 한데 경제 수학은 상당히 어려웠다.

하지만 열심히 파고들어 보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졸업시험은 영어를 서울대학교에서 치렀는데 전북대 영문과 교수였던 김 수곤박사가 예상문제집을 만들어 와서 수험생들이 대부분 합숙하는 여관에 와서 수험생 모두를 식당에 모이게 하고 새벽 2시까지 강의를 하여 주었다.

정말 고마운 분이었다.

대부분의 문제가 예상문제집에서 출제되어 무난히 졸업시험을 통과하고 경제학사가 되었다.

아내 최 우남은 통신대학 가정학과1학년부터 다녀야 했기에 2년을 더 다녀서 졸업을 하고

졸업 하자마자

방송통신대 행정학과로 다시 편입하여 들어갔다.

배움에 한이 맺힌 최 우남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법학과로 편입하여 들어갔고

법학과를 졸업하고는

중부대학 원격대학원의 사회복지학과에 합격하여

성적 최우수자로 석사학위와 ‘1급 사회 복지사자격증도 같이 받았다.

 

우남은 또다시 방송통신대학의

관광학과에 들어가 전액 장학생으로 계속 공부를 하다 졸업을 하였다.

우남의 학구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또다시 일본학 과에 편입하여 들어가고 장학생이 되었다.

그의 일본어 실력이 나보다 월등하다.

나는 초등학교 교과서를 읽는데 우남은 일본 소설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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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들었던 김 인호교장선생님이 전라중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고 떠났다.

김 영곤교감선생님도 이리여고로 떠나셨다.

한 진수교장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김 영환교감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학교는 평화롭고 즐거운 나의 놀이터이요 마음의 안식처요 내 고민의 피난처였다.

 

또다시 선생님들과 어울려 즐거운 나의 생활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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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을 돌보지 않고 술을 많이도 마셔대던 나에게 경종을 울리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