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가출시절을 끝내고
사춘기를 질풍노도와 같다고 했던가?
나는 짧지만 진한 사춘기의 태풍을 서울에서 맞이하고 있었다.
삶의 욕구,
미래의 삶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갈망,
내가 해야만 하는 이 일의 의미,
당장 육체적 쾌락으로 빠지려하는 본능적 충동과 이성의 반란,
돈을 저축하여 학업을 계속해야한다는 목적의식에서 나의 몸과 마음은 갈등과 회의 번민과 혼돈을 거듭하며 하루하루 세월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중국집에서 생활하는 동안
사춘기를 보내는 나는 실로 성적 탕아로 전락하기 쉬운 위험한 곳이었었다.
주방의 종업원들은 대부분 군대의 기피자들이었고 인근에 있는 '시구문'에 있는 사창가는 종업원들이 젊음의 욕구를 분출시키는 장소였다.
이들은 수시로 나를 유혹하였고
나 역시 끓어오르는 젊음의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런 욕망에서 나를 지킨 것은 어렸을 적부터 생활에 찌들어 온 종교적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월은 빨리도 흘렀다.
저금통장에 꽤나 많은 돈이 들어있었다.
고향에 있는 누나에게서 편지가 왔다.
누나가 성모병원에서 월급도 많아졌고 어머니의 건강도 괜찮아 지셨으니 내려와서 공부를 계속하였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듬해 2월 15일 월급을 받고서 주인에게 하직을 고하였다.
고향에 다시 내려간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럽고 행복하였다.
이발소에 들려 말끔히 이발을 하고 시장에서 바지와 점퍼를 사서 입었다.
<귀향>
2월 16일 새벽 서울 역에서 탄 여수행 완행열차에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는 나의 뇌리에 갖가지 상념들이 유리창에 활동사진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번지게 하는 갖가지 추억 어린 광경들이 새삼 그리움으로 다가옴을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나이 어린 두 여동생 ‘춘희’와 ‘현자’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나를 반겨 주었다.
나의 모습이 너무나 많이 변해있었기에 안쓰럽고 반가운 마음에 앞서 놀라움이 더 커졌으리라.
깡말랐던 내가 일 년 사이에 기름기 번질 한 청년이 되어 돌아오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이튿날 복학 수속을 하려고 학교에 가서 담임 선생님이셨던 '권 영선'선생님을 찾아갔다.
살이 찌고 머리를 기르고 1년 사이에 너무나 변해버린 나의 모습을 나의 담임선생님도 잘 알아보지를 못하였다.
그는 반갑게 인사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무슨 일로 오셨느냐고 물었다.
"선생님 저 '정 일웅'이예요 "
"아니 '정 일웅'이는 외아들로 아는데 형이 있었나?"
"아뇨! 제가 '정 일웅'이라니까요 저 살쪄서 몰라 보셨죠?"
"아-니! 니가 '정 일웅'이야?"
"네! 중국집에서 1년간 잘 먹었더니 이렇게 살이 쪘어요"
"이놈아! 학교 다니려면 머리부터 스포츠로 깎고 교복입고 단정하게 허고 와!"
"예 알겠습니다 "
"깜빡 속았네....."
선생님은 나의 엉덩이를 '철석' 갈기시며 한참을 웃었다.
나는 야간학교로 복학을 희망하였다.
낮에는 아직도 먹고살기 힘든 집안을 위하여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관선동 자전거 공업사>
관선동 파출소 옆(지금의 경원동)에 있는 세발자전거 만드는 공장에 취직을 하였다.
고물 쇳덩이를 수집하여 쇠붙이를 깎고 구멍을 뚫고 용접을 하여 공장에서 배달되는 바퀴와 조립하여 어린이용 삼륜 자전거를 조립하고 만드는 공장이었다.
일은 단조롭고 어렵지 않으나 힘들고 온통 녹슨 쇳가루와 녹으로 작업복은 범벅이 되고 흐르는 땀을 손으로 씻으니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1년을 그럭저럭 보내고 있을 때 동내의 '배(裵)사장'이란 분이 나에게 자기가 사업을 하는데 거기서 일을 해 보라는 것이었다.
<삼학 시음장>
이른바 '삼학(參鶴) 시음장(試飮場)'이라는 곳이었다.
삼학 소주가 전주에 처음 상륙하여 삼학 정종과 함께 판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새롭게 개설한 현대판 술집이었다.
월급이 공장보다는 훨씬 많고 깨끗한 모습으로 생활을 할 수가 있었기에 나는 공장을 그만두고 그곳에서 일을 하였다.
약간 기른 머리에 기름을 발라 세우고 하얀 와이셔츠에 검정 나비넥타이를 하고 카운터에 앉아 오가는 손님들에게 안주를 내어 주고 돈을 받는 일이었다.
학교의 선생님들도 가끔씩 오셔서 술을 드시는데 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손님들이 남기고 간 햄이며 소시지를 카운터 아래에 앉아서 우물우물 먹는 것이 재미있었다.
평생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지만 그 맛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인 맛이었다.
꽤나 비싼 값에 파는 이러한 안주를 거의 손도 대지 않고 그냥 가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런 사람이 고마웠다.
그들이 남긴 음식을 깡통에 다시 담아서 학교에 가져가서 친구들과 같이 먹기도 하였다.
세월이 참 빠르게도 흘러갔다.
전주에서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부터
나의 머리에는 과거의 서울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쓰라린 경험이나 황홀한 모든 추억이 말끔히 사라지고
언젠가 들었던 옛날 얘기처럼
마치 나의 일이 아니고 누구에게 들었던 타인을 내가 느끼는 것처럼
나의 영혼은 순수를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