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웅 찻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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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란처럼 살아온 나의 이야기/25. 임실에서의 일상

25. 임실에서의 일상

정일웅 찻집 2016. 7. 6. 14:44

25. 임실에서의 일상

 

임실초등학교에 부임한 첫 날

교육대학 2회 졸업생 선배 강 옥철선생님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첫 날부터 잠을 잘 하숙집을 구해야 했다.

강 옥철 선생님과 김 공영 선생님이 둘이서 한 방에 하숙을 하고 있는데

방이 넓음으로 나에게 같이 쓰자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과 나, 세 사람이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서 같이 하숙을 하게 되었다.

 

학교 일과가 끝나면 꼭 남자교사들은 배구시합을 하였다.

나는 배구를 잘 하지는 못하였지만 이들과 어울려 열심히 노력한 결과 전위센터의 자리를 맡았다.

배구 시합이 끝나면 바로 막걸리 집으로 직행을 하여 늦은 시각까지 술을 마셔댔다.

 

학교의 환경정리와 미술부 학생을 가르치는 일,

합창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그리고 내 반 학생들의 수업을 하는 쉴 새 없이 분주한 생활이었다.

 

4학년 주임선생님인 허 필수선생님이 계셨는데 임실 성당에서 열심히 신자 생활을 하는 천주교인이었다.

그는 나의 종교가 천주교라는 것을 알고서는 나를 여러모로 도와주셨다.

알고 보니 허 필수선생님의 사모님이 나의 어렸을 때 친구인 장 정만이의 누나였고 나의 누나의 친구였다.

여름방학이 가까워진 어느 날

허 필수 선생님이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였다.

아이! 정선샘, 어머니와 식구들을 임실로 이사해서 안정을 찾는 것이 어때?”

그러면 좋겠는데 집을 마련하려면 돈이 없어서.......아직 엄두를 못 내내요

그래! 그런 줄 아니까 내가 제안을 하나 할게

? 무슨 수가 있을까요?”

사실은 내가 2학기에 사표를 낼 예정이거든? 그러니까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성당 관사로 이사를 오면 좋을 거 같아!”

 

“ ....................!!!”......

<하느님께서 나를 또 도우시는 구나..>

 

거기가 성당 관사라고는 하지만 예전에 유치원으로 쓰던 건물이라서 방이 3개 있고 가운데에 어린이들이 놀 수 있는 넓은 마루방이 있어서 식구 많은 사람을 와서 살기가 괜찮을 것 같아!”

집 새가 얼마나 되는가요?”

! 그건 걱정 말고 .......너무 싸니까 성당 일만 조금 열심히 도와주면 되거든...?”

선생님~! 그렇게 해 주세요 정말 고맙습니다.”

........................

임실로 이사해서 온 가족이 같이 살자는 나의 말에 어머니와 누나 누이동생들이 뛸 듯이 좋아했다.

 

살림살이래야 고리짝 몇 개와 이불, 항아리 몇 개 그리고 잡동사니를 트럭 한 대에 싣고 이사를 하였다.

...................

 

<성당 에서의 생활>

 

 

성당에 열심히 다니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윤 영섭 가밀로 부부, 이 태현 부부, 이태문 부부, 김 규원 부부, 신 태근 부부, 나 병렬 부부, 박 정업,

최 덕자, 진 영희, 진 미자, 박 혜숙, 진 미사 태 동희, 정 현자,.............

결혼을 한 친구, 몇몇이 있고 나 같은 총각 처녀 도 있었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거의 매일 밤 사제관에 놀러 와서 게임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가끔은 술도 마셔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었다.

나는 바로 이들과 동화되어 오래 사귄 친구처럼 지내었다.

 

성당이 시골이고 신자 수가 적어서 사무장이 없었다.

나는 사무장 일을 맡았다.

학교 근무를 마치면 성당의 문서를 정리하고 교구청과 각종 기관에서 오는 공문을 분류하기도 하고 이거(移居), 이래(移來)자의 교적관리, 세례대장, 견진대장, 교무금 관리, 주일금 집계 및 관리, 신부님, 수녀님의 생활비 지급, 각종 비품관리, 등등 하는 일이 상당히 많았다.

 

임실에서 18년간 살면서 내가 모신 주임신부님은

지 정환, 김 진소, 서 석기, 김 반석, 박 중신, 전 대복, 왕 수해, 조 정오 신부님이였다.

성당 안에 살면서 신부님을 가까이 모신 관계로 신부님들에 대한 추억과 에피소드가 매우 많다.

 

<지 정환 신부님>

 

벨기에 출신

지 신부님께서 부제품을 받으셨을 때 비참한 한국의 생활상을 신문과 잡지에서 읽어 알게 되신 후 신부님이 되면 꼭 한국으로 가서 선교하며 봉사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셨단다.

신품성사를 받고 신부님이 되신 후

한국 파견 희망 신부님의 신체검사에서 심장이 크다는 이유로 발령을 받지 못하였는데

이듬해 신부님께서 심장이 남보다 큰 것은 학창시절 마라톤 선수였기에 남보다 크고 강한 심장을 갖게 되었다는 설득이 통하여 한국천주교 전주교구로 발령을 받으셨다.

같이 발령을 받은 유럽의 신부님은 네 명이었다.

벨기에에서 지신부, 아일랜드의 하신부, 프랑스에서 도신부, 박신부.....

한국에서 첫 번째 정착지가 전주 전동성당.....내가 중 3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 때의 지 신부님을 만나서 같이 생활하는 것은 큰 기쁨이고 은총이었다.

중학교 시절 만나뵙던 신부님을 임실 성당에서 같은 울안에 생활하게 되었으니 벅찬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지 신부님께서 항상 걱정하시고 연구하시는 것은 임실군 지역사회의 모든 농가들을 잘 살게 하는 일이었다.

 

임실은 산이 많고 산에 풀이 많아서 산양을 키워 우유를 생산하면 농가의 수입이 올라서 농민들이 잘 살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항상 하신 모양이다.

 

그 때

아마 독일의 어느 성당에서 특별헌금을 걷어 신부님에게 후원금을 보내왔다.

신부님께서는 새끼 산양을 100마리를 구입하여 나중에 새끼를 낳으면 새끼 양 한 마리를 돌려주는 조건으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잘 키워서 축산 농가가 많아지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새끼 양을 나누어준 다음 장날이 돌아왔는데

난데없는 염소새끼 장이 섰다고 말이 들려왔다.

새끼 양을 키우기는커녕 바로 내어다 팔아 우선 먹고 살기에 급급하였던 거다.

 

!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산양의 젖이나 소의 젖을 신부님이 구입하여 돈을 드리면 잘 키우지 않겠나? 생각하시고

그러기 위해서는 치즈를 만드는 공장을 만들자는 결론에 이르시고

치즈 공장을 만들려면 우선 치즈를 만들 수 있어야 하기에 치즈 만들기 실험에 들어갔다.

성가리의 동산 비탈진 곳에 땅을 조금 빌려 땅굴을 파고 땅굴 옆에 임시로 공장처럼 집을 짓고 날마다 어디선가 우유를 구입하여 치즈를 만드신다고 바쁘게 일을 하신다.

 

커다란 솥단지에 양유를 가득 붓고 약하게 가열하여 응고제(갖 태어난 소의 위액)를 넣고 기다란 나무 주걱으로 천천히 저어 주면 두부 엉기듯 우유 에 있는 단백질이 엉기기 시작한다.

엉긴 덩어리들이 많아지고 다 됐다 싶으면 삼배처럼 생긴 헝겊을 나무 상자에 깔고 엉긴 덩어리를 건져내어 붓는다.

그러면 물이 빠져 나오고 완전 두부 모양의 연한 고체로 성형이 된다.

그 위에 무거운 물체를 얹어 수분을 완전히 제거하고

성형이 된 고체를 산에 굴을 파고 굴 깊은 곳에 선반처럼 생긴 곳에 띄운다.

 

며칠인지는 몰라도 적당히 발효가 되면 그게 치즈라는 것이 된단다.

나는 전혀 기술적인 것을 알 수가 없지만 신부님의 연구태도는 진지하셨다.

단백질을 건져낸 물을 얻어다가 돼지를 키우는 동네 사람들이 돼지 사료와 섞여 먹이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장한다고 치즈 물을 얻으러 오는 농민들이 줄을 지어 섰다.

 

그러다가 굴속의 치즈가 썩어버렸다고 한숨을 쉬시며 또 연구를 거듭하시는 모습....

신 태근’ ‘윤영섭 가밀로’ ‘나 병열’ ‘이 태문’‘황 석산씨 등이 신부님을 도와 열심히 일 하였지만 모든 게 허사가 돼 버렸다.

썩은 치즈의 부식된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나도 얻어다 먹었다.

영양이 엄청 좋은 식품이라서 덕분에 나의 몸에 살이 찌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신부님은 주교님께 말씀드리고 스위스에서 직접 치즈 만드는 농가의 일꾼으로 취직을 하셔서 떠나셨다.

거기에서 1년간 실습을 하시고 돌아와 다시 만든 치즈가 드디어 성공을 하셨다고 얼마나 기뻐하시는 지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서울의 조선호텔과 반도 호텔에만 계약 납품하던 치즈가 소문이 나서 인기가 상승하고 주문량이 늘어 공장을 조금씩 확장하였고 농민들의 단합을 위하여 조합을 결성하고 지 신부님은 공장장이 되었다.

치즈공장을 조합원에게 넘겨주고 지신부님은 공장장이 되셨다.

공장장의 첫 월급을 받았다고 우리들에게 자랑하시며 즐거워하시는 표정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시작하여 만든 것이 오늘의 한국을 대표하는 임실치즈가 되었다.

조합원은 개신교 신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치즈를 신문이나 방송에 선전하고 공장을 더 키워서 대량생산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애당초 작은 임실 군민만을 위한 신부님의 계획을 조합원들이 반대하고 조합원 투표를 통하여 지신부님을 해고 하여버렸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신부님께서는 하는 수 없이 물러나 익산 성모병원에서 장애자들을 돕기 시작하셨다.

 

신부님께서 스위스에 계시는 동안 김 진소 신부님께서 임시 발령을 받고 오셨다.

김 진소 신부님께서 들려주시는 감동적인 강론에 신자들의 신심이 한창 두터워 질 무렵, 교통사고로 신부님께서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이 무렵 나의 학교생활은 안정되고

나의 집에 누나와 매형 어린 조카 3명이 더부살이를 하러 들어왔다.

나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