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제목 없는 자서전
6.철이 들던 시절
나는 1960년도, 그러니까 4.19의거가 일어나던 당시에 중학교 3학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중학교 3학년의 신분으로 상당한 애국 소년이었나 보다.
대모에 참가하여 경찰들과 몸싸움을 하고 저항하다가 경찰서에 끌려 들어가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저녁때 풀려났으나, 그 다음 날 다시 대모에 참가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민주화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확신하며 또 다시 길거리에 나와 '독재 정권은 물러가라!' '자유당 정권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쓸고 다녔다.
나의 중학교 3년 세월은 정말 바쁘게 뛰어 다니는 세월이었다.
신문배달 때문에 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가로등도 없던 어두운 길을 뛰어서 전주역 까지 가노라면 시원한 공기가 온 몸 속에 스며들어 기분이 상쾌하여지고 정신이 맑아졌다. 겨울은 겨울대로 좋았고 여름은 여름대로 땀이 나기는 하지만 기분이 상쾌함은 마찬가지였다.
전주역에는 나보다 먼저 나온 내 또래의 학생들이 새벽 찬바람에 오돌오돌 떨며 4시 30분에 도착하는 서울발-여수행 완행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가 도착하면 서울신문 전주지국 보급 부장이 화물칸에서 신문을 수령하여 짐받이 자전거에 신문 뭉치를 잔뜩 싣고 대합실에 나타났다.
우리 배달원들은 우르르 몰려가 신문을 받아 대충 나누어 가지고 대합실에서 군데군데 웅크리고 앉아 자기의 배달 부수만큼 씩 신문을 세어서 보급 부장의 확인을 받은 다음 지체없이 배달구역으로 뛰었다.
나의 배달 구역은 전주시 다가동 일대였다.
112집을 전부 배달하고 다니는 나의 발자국 소리에 잠자던 개가 깨어서 짖어 대고 그 개 짖는 소리는 시작부터 배달이 다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그렇게 하는 동안 동이 트고 사방은 밝아져왔다.
신문 배달이 거의 끝날 때쯤이면 일찍 학교에 가는 아이들은 가방을 들고 대문을 나서는 시간이었다
나는 학교에 지각하지 않으려고 배달이 다 끝나자마자 또다시 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가동에서 내가 사는 풍남동 까지는 꽤나 먼길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찬물 한바가지를 두레박으로 건져 콧잔등만 대충 씻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책가방을 집어들고 학교로 뛰어야 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또다시 석간 신문인 전북일보사로 달려가서 윤전기에서 막 빠져 나오는 잉크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신문을 추려 들고 또다시 나의 배달 구역으로 뛰어 갔다.
아침에 배달하던 구역과 거의 같은 청석동 파출소 근방과 중앙동 일부와 다가동 일부가 나의 구역이었다.
75집을 배달하고 나면 다리가 휘청거리고 기력이 거의 탈진상태가 되었지만 조금 있으면 그것도 잊고 동네 친구들을 찾아 오늘밤에는 무엇을 하며 놀까 생각하기에 바빴다.
더운 여름날에는 해가 동동 떠 있을 때 신문을 배달하게 된다.
어쩌다 대문이 열려있는 집에 들어가서 신문을 마루에 놓고 오려고 집안에 들어섰을 때 마루 위에서 낮잠을 자는 식모 아가씨가 낮잠에 골아 떨어져 치마가 치켜 올라간 줄도 모르고 허연 허벅지 안쪽과 팬티가 빤히 보이도록 다리를 벌리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여간 재미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만 하여도 신문을 보는 집은 대부분 부자들이었으므로 식모 아가씨를 두고 있는 집이 많았었다.
"신문이요!" 하고 소리지르며 신문 한 부를 빼어 마루에 휙 던지고 나오는 길에 그 집 부엌에서 고깃국 끓는 냄새가 나의 코를 자극하면 오장육부가 뒤틀려오며 극심한 시장기를 느끼곤 하였다.
그러나 고깃국을 먹고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일년에 어쩌다 한번씩 추석이나 설날에나 얻어먹는 고깃국을 먹고 나면 언제나 설사를 하여 먹지 않은 것보다 못하게 몸이 약해진다.
또 설사는 생각만 하여도 징글징글하다.
학교 가는 길에 설사를 참지 못하여 옷에다 똥을 절이고 집에까지 돌아와 부엌에서 찬물에 옷을 빨아 입고 엉덩이를 씻는 일을 다시는 하기 싫어서 고깃국은 아예 못 먹는 것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서 먹는 식사는 거의 매일 옥수수 가루를 멀겋게 풀어서 쑨 죽이나 밀가루 수재비가 고작이었지만 그것이 제일 맛있는 식사였다.
그것도 없어서 더 먹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렇게 먹고도 어떻게 영양실조로 죽지 않고 살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 신기하기만 하다.
그렇게 바쁘고 먹지 못하고 살았어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학생으로써 할 짓은 다 하면서 살았다.
여학생 때문에 간장을 태우며 밤잠을 설치기도 하였고, 여학생 꼬신다고 신문배달이 없는 일요일에는 공원을 어슬렁거려보다가 말 한번 붙여보지 못한 체 설레는 가슴만 안고 날마다 허탕만 치고 돌아오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그냥 좋았었다.
고기를 잡으려 구이면 저수지 아래에 흐르는 개울물에 고기잡이 병을 담그고 피라미와 불거지를 한 솥단지 정도 잡아서 인근 가정집에 들어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잡은 고기의 반 정도를 주면 고추장 된장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들을 빌린 솥에 넣고 냇가에 누군가 경작하는 밭에서 풋고추와 호박 등을 따다가 썰어 맛을 돋구도록 요리를 만든 다음 돌을 쌓아 부뚜막을 만들고 나뭇가지를 주어서 땔감으로 하여 맛있게 끓여 먹기도 하였었다.
꿈틀거리는 피라미를 고추장에 찍어 날것으로 먹어도 맛은 그만이었다.
고기 잡는 일은 고등학교시절에 더욱 열심이었는데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오후에는 고기를 잡으러 구이 저수지에 한번이라도 가지 않으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구이 저수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흐르는 작은 내에는 피라미, 양수래미, 모래무지, 불거지, 등이 매우 많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 먹은 날고기가 나의 건강을 유지시켜주는 영양의 보급 통로였나 보다.
공부시간에 책상 밑에 넣고 살살 꺼내 읽는 만화책이나 성인용 잡지는 어쩌면 그렇게 재미가 있었는지 ..........
쉬는 시간이 되면 나의 책상에 새운 팝송을 배우러 많은 아이들이 모여들곤 하였다.
그 당시에는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매우 귀한 시절이었고 카세트 녹음기는 세상에 나오기도 전이었다.
그래도 나는 당시의 팝송을 많이 배워 올 수가 있었다.
그것은 나의 친구 삼열이가 야간학교를 다니며 당시의 '신신 악기점'에서 점원을 하며 고학(요새말로 아르바이트)을 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 친구에게 놀러 가서 악기점에서 음반 선전을 하려고 틀어주는 유성기 판을 내가 배우고 싶은 노래만 틀도록 하고 나는 계속 따라 부르며 노래를 배웠다.
Diana, Crazy love, Sing Sing Sing, Oh Carol, Danny Boy, Banana boat day song, Nonholeta, Pipoparula, Lanovia,
Sad movies, . . . 등새롭게 한국에 상륙한 팝송을 열심히 외어부를수 있었으며 이태리의 깐소네를 따라불렀다. 오 솔래미오, 토르나어 쏘렌토, 푸니쿠니 푸니쿠라, 까로미오벤, 라르고,등을 나는 원어로 배웠고 가사를 한글로 적어서 다른 학생들에게 따라 부르도록 하여 노래를 보급시켰다.
그래서 쉬는 시간이면 나의 자리가 가장 인기 있는 자리가 되기도 했었다.
그 당시 팝송은 우리 나라에 맨 처음 들어와서 요즈음 학생들이 서태지 노래나 H·O·T의 노래를 즐겨 부르듯 그 당시에 팝송이 한창 유행을 하였었다.
소풍을 가면 언제나 트위스트 춤추기 시합이 있었다.
나팔바지를 입고 엉덩이를 흔들며 두 손은 달리기하는 사람처럼 흔들고 발바닥을 땅에 비벼대는 트위스트는 학생들의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가장 인기 있는 춤이었다.
요즈음 설운도가 부르는 '사랑의 트위스트'라는 노래를 들으면 나의 학창시절을 노래하는 것 같아서 너무나 큰 공감을 느끼며 아련한 그리움이 가슴에 일렁인다.
나는 트위스트를 매우 잘 추는 학생중의 하나였다. 배우들이나 가수들이 추는 춤에다 나의 기발한 춤사위를 창작하여 곁들이기에 친구들은 나의 트위스트를 흉내내며 아주 흥겹게 놀았다.
내가 개발한 트위스트 춤에는 꼽사춤과 병신춤이 곁들어 있기에 보는 사람들은 내가 춤추는 동안 뱃살을 잡고 웃었다.
요즈음 같이 보충수업에, 자율학습에, 심화보충수업에, 방과후 자율 활동 은 또 뭐이며, 야간 자율학습 까지 하면서, 학교에서 젊음의 진을 다 빼버리는 상황에서도 우리 학생들은 랩송 배우며, 힙합춤 배우며, 농구도 잘 하고, 당구도 잘 치고, 볼링에 전자오락까지, 도사 수준을 유지하며, 한문은 잘 모를 망정, 영어 회화도 잘 하고, 더구나 여학생과 연애도 잘 하고, 머리에 염색까지 하고 멋을 내는 것을 보면 정말 신통하기 그지없다.
내가 학교에 다닐 적에는 보충수업이란 말도 없었고 학교에서 6교시 수업하고 청소를 마치면 1학년이나 3학년이나 모두다 자유로운 개인 생활이었으며 반에서 공부 좀 잘 한다고 하는 애들이나 학원이라는 데에 가서 영어 특강이나 수학 특강을 받는 정도이었다.
방학을 하면 돈 한푼 없이 떠나는 무전여행을 하기도 했다. 요즈음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때는 인심이 좋아서 무전여행을 하면 밥도 쉽게 얻어먹을 수 있었고 공짜로 자동차(트럭)도 얻어 탈수 있었고 기차도 숨어서 탈수가 있던 시대였다.
나는 서울도 무전여행으로 다녀왔었고 전남 목포에서 배를 타고 해남까지 다녀오기도 했었다.
고등학교 1년 때에는 가출을 하여 서울에서 1년간 직장 생활을 하며 지내다가 돈을 벌어와서 다시 학업을 계속하였었다.
물론 그때의 나의 가출은 불량학생이 놀기 위하여 하는 반항적 가출이 아니라 학업을 계속할 수 없을 만큼 집안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서 돈을 벌러 떠나는 가출이었다.
신문 배달을 하여 학업을 계속하며 아버지의 약값을 보태어 오는 것이 나의 삶의 목적이었는데 고 1학년이 되던 3월 어느 날 아버지께서 10년의 투병생활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었다.
동내 아저씨 두명과 성당에서 애령회원 한명이 집에 와서 아버지의 시신을 관에 넣고 트럭에 관을 실었다.
나는 아저씨들 세명과 함께 관을 실은 트럭의 뒤에 타고서 성당의 공동묘지에 아버지를 매장하고 돌아왔다.
조객이래야 주위에 살던 몇몇 아주머니들이 오열하는 엄마를 위로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이렇게 쓸쓸하였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정말 잘 죽었다. 이제 익훈이 엄마 고생에서 풀려났다'는 말만을 듣는 그러한 죽음이었다.
나의 마음속에서도 아버지의 죽음은 우리 집안을 위하여 잘된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누어 계시던 요와 이불을 태우며 사람의 일생이 이렇게 종말을 맺는다는 것은 너무나 허망한 일이라도 생각하였다.
.........................
나는 학업을 더 이상 계속할 의미를 상실하고 가출을 결심하였다.
아무에게도 상의하지 않고 담임선생님께 휴학 계를 제출하였다.
돈을 벌어서 다시 학교에 다니겠다는 나의 말을 들은 선생님께서는 나의 등을 다독거려 주시며 위로와 격려를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