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영생중학교로 학교를 옮기다.
인성중학교(공민학교)에 들어가 첫 여름 방학을 일주일쯤 앞둔 어느 날
"야! 정익훈! 너 이리와 봐!"
선배인 3학년 실장이 나를 불렀다.
"너 임마 너는 공부도 잘 허고 똑똑헌디 멋헐라고 이런 학교 들어왔냐?"
"..............."
"얌마! 이 학교는 중학교 인가도 안났어 임마!, 이 학교 백년 댕겨도 고등학교도 못가 임마!"
"............"
"취직도 못혈마! 취직이 된다고 혀도 얄마! 뱃놈 뒤야각고 멋헌다냐!"
"............"
"너 이 학교 꼭 댕기고 싶냐?"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저었다.
"너 말이여 인가(認可) 난 학교로 가라! 니가 아까와서 그러는 것이여!"
"거그가 어딘 디?"
"너 내 말 잘 들어 봐! 지금 말이다. 영생학교가 올해부터 인가를 받었는디 너 지금 그 학교에 가서 말만 잘허먼 어쩌면 디리 보내 줄팅게 한번 가바라!"
...............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첫날 아침식사를 마치고 영생학교로 갔다.
어쩌면 그 선배의 말처럼 내게 인가 난 학교를 다닐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생학교도 방학을 하였기에 학교는 한가하였다.
교무실에 들어섰다.
책상에 선생님들이 띄엄띄엄 앉아서 사무를 보고 있었고 교무실 가운데에 교감선생님인 듯한 인자해 보이는 분이 앉아 계셨다.
나는 그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서 꾸벅 인사를 하고 말하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인성중학교에 다니고 있는데요 저희 학교는 인가도 나지 않았다고 혀서 인가가 난 영생학교를 다니고 싶어서 왔는데요!"
교감 선생님은 중학교 1학년의 조그만 학생이 당돌하게 말하는 것이 신통하였는지 웃음 띈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그래?!, 너 공부는 잘 허냐?"
"예! 저희 학교에서는 제일 잘 합니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하였다.
교감선생님의 얼굴은 더욱 밝아지며 흥미 있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셨다.
.........
한 참을 머뭇거리시던 그가 일어나며 누군가를 찾는 듯하였다.
"오! 저기 있구만!. 어이! 송선생! 잠깐 일루와 보세요!"
"이녀석이 지금 '인성'(인성중학교)을 다니는 모양인디 우리 학교로 오고 싶다고 하는구만이요 어디 영어 공부 잘 하는가 한번 테스트 해 보세요!
송선생님 이란 분은 내가 배우고 있는 'Living English 1학년 교본'을 들고 왔다.
"여그 한번 읽고 해석 해봐라!"
7과 였다.
"선생님 저는-요 이 책 12과 까지 첨부터 다 욀 수 있어요!"라고 말한 후
책도 보지 않고 7과와 8과를 줄줄 외웠다.
..........
"알았다.!" "그만허고 그러면 자!.........어이 김선생님! 이리좀 오세요!"
김선생님은 수학을 가르치시는 분이셨다.
그는 1차 방정식 문제를 풀어보라고 종이와 연필을 주셨다. 너무나 쉬운 문제였다.
"선생님 이런 건 속셈으로 할 수 있어요!"
나는 잠깐 동안 문제를 보고 나서
"x=3½입니다. 하고 정답을 말하였다.
그는 두 문제를 더 물어보고 나서 속셈으로 답을 말하자
"이놈! 괜찮은데요 공부 잘 하겠네요!"라고 말하였다.
교감선생님은 나에게
"너 쌀 두 말 값 있냐?" 하고 물었다.
"저 신문 배달하니까 돈 많이 있어요!"
교감선생님은 웃으시며
" 알았다. 그러면 너 내일 쌀 두말 값 가지고 우리 학교로 오니라 알었냐?"
“인성학교 댕기는 애들한테 말 허지말고 ..알겄지?”
"예! 감사합니다."
나는 매우 기뻤다.
이튿날 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영생학교에 갔다.
교감선생님은 여러 선생님들과 상의를 하며 나의 학적부를 만들었다.
3월에 입학한 것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모양이었다.
모든 수속이 끝나고 서무과에 돈을 낸 후
"너 방학이 끝나면 인제 우리 학교 1학년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제 인성학교는 가지 말거라 알것냐?"
교감선생님은 나의 모자에서 모표를 떼고 영생학교 모표로 바꿔주고 교복에 차는 학교 뱃찌와 학년 장을 바꿔서 채워 주셨다.
나는 기쁨에 벅찬 나머지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
이렇게 하여 나의 새로운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다.
나의 인생의 지침은 인자하신 교감선생님의 배려로 시작되었고 나는 그 교감선생님을 평생 존경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교감선생님은 모든 학생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정말 인자한 분이셨다.
가끔씩 뵙는 그분의 모습은 나를 행복하게 하였고 맘속으로 항상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새로운 학교생활은 나를 즐겁게 하였다.
여학생들과 같이 공부하는 학교였기에 더욱 그랬다.
경제상황이 열악한 신설학교라서 교실 바닥은 흙바닥 그대로였고 판자로 창고처럼 벽만 쌓아올린 그런 교실에서 책상을 놓고 공부를 하였다.
바닥은 오래된 시골집 부엌처럼 울퉁불퉁하게 흙들이 둥글게 반구(半球)처럼 부풀어올라 어느 책상 한 개도 안정감 있게 서 있을 수가 없었고 뒤뚱거렸다.
청소시간에 물을 뿌리고 비로 쓸면 황토 흙이 미끄러워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박길주' '이광래' '유성룡' '백인종' '박석준' '이형수' '한용섭' '장점용' '김문규' '이인례' '한정자' .......................
많은 이름들이 나의 친구로 기억되어 남아있다.
영생학교에서 첫 번째 사귄 친구 '길주'는 손재주가 비상하여 목수인 그의 형 '길준'씨의 목공소에서 내가 원하는 도형대로 환등기도 만들어주고 새잡이 고무줄 총 화약 딱총을 만드는 것은 아주 잘 하였다.
또 한명의 친구 '광래'.
광래는 공부도 잘하고 얼굴이 잘생겨서 여학생들의 인기를 많이 받았다.
친구들의 집에 쳐들어가서 부엌에 매단 밥 바구니에서 보리나 밀을 삶아 놓은 것을 찬물에 말아서 '다꽝'(무짠지)을 반찬으로 다 털어먹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
광래 어머니나 길주 어머니는 우리를 친자식처럼 격을 두지 않고 사랑해 주셨다.
세월은 나도 모르게 흘렀다.
아버지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도저히 일어나 앉지도 못하였고 어머니는 길가에 '하꼬방'(판자로 만든 작은 상자 같은 점포)에서 과자와 풀빵을 구워 팔아서 식구의 연명을 하였다.
나는 신문배달을 마치고 나면 엄마대신 '하꼬방'을 지켜보아야 했다.
친구들은 작은 하꼬방에 놀러와서 내가 구워만든 풀빵을 사서 먹곤 하였다.
나는 나의 이러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친구들에게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