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가출 시절
편지 한 장을 써 놓고 영어책과 콘사이스 노트 한권을 넣은 가방을 들고 무작정 서울로 집을 떠난 날은 3월 5일 이었다
서울 역에 내린 나의 마음은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강아지 같은 신세였다.
목적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었다.
신문사에서 받은 월급 몇 푼이 생명을 지탱할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곳저곳 전전하며 '무엇을 하고 지내야하나'하는 걱정에 하루 종일 쏘다니며 서울 지리를 익혔으며 밤에는 서울 역 대합실의 벤치에서 나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잠을 잤다.
덮고 잘 신문지도 구하기가 힘들었다.
몹시 춥고 무섭고 고독하였다.
참으로 세상은 넓고 갈 곳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처량한 건지 서러움이 뼈에 사무쳤다.
셔터가 내려진 상가에 간판의 불이 꺼지고 거리에 전차도 끊기면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거리는 쓸쓸했다.
돈 몇 푼이 있었지만 함부로 쓸 수가 없어서 하루에 풀빵 세 개와 역 대합실 앞 수도 물로 허기를 달랬다.
사흘이 지났다....
전차도 타지 않고 터벅터벅 걸었다.
'천주님! 제가 어디로 가야하나요?'
...................
호수천신이 이끌었는지
나도 모르게 발길이 머문 곳이 파고다공원이었다.
공원의 주위를 돌아다니다가 뒷문으로 나가니 낙원극장 뒷골목이었다.
거기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는 곳을 가보니 극장 뒷담 벽에 커다란 캔버스를 기대놓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진을 보고서 극장의 선전포스터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림에 평소부터 관심이 많았고 흥미가 있었다.
또한 지금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하여 그 그림이 모두 완성될 때까지 구경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고 나 혼자서 너무나 신기한 그의 손놀림을 경탄의 시각으로 감상하느라고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있었다.
'나도 사람 얼굴은 잘 그릴 수 있는데'...하고 생각하며
내가 화가가 되어 저렇게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상상을 하고 있을 때
...................
"학생은 으디 사는디 이렇게 하루 종일 여그만 있는가?"
전라남도 사투리를 쓰는 이 사람....우선 반가웠다.
"학교 휴학하고 전주에서 왔는데 아직 취직을 못했습니다."
"그라면 학생, 잠은 으디서 자는가?"
"서울역에서 사흘 잤구만요"
"서울에 친척도 없냐?"
"있기는 있는디 찾아갈 형편이 아니구만요"
"그러면 아무데나 밥 먹고 잠만 잘 수 있으면 일 헐레?"
나는 구세주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을 순간적으로 느끼며 그에게 달라붙었다.
"예 ! "
"내 밑에서 잔심부름하고 있을래?"
"예 ?! 고맙습니다.!!".....
눈이 번쩍 띄었다.
하느님의 손길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입속에서 기도를 웅얼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그날 그 순간부터 나는 애타게도 바라던 직장을 얻어 취직을 하게 되었고 거지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그는 종로 3가에 있는 낙원극장의 간판그림 그리는 '선전부장' 이었고
나는 그의 밑에서 팔레트를 닦아주고,
다 그려 놓은 500호 짜리 캔버스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동대문과 남산까지 걸어가서 상영이 끝난 포스터 그림을 새로운 그림으로 바꿔 게시하는 일이 나의 일이었다.
월급은 삼천 원으로 기억된다.
지금의 화폐가치로는 약 십만 원 정도나 될까?
서울에 처음 간 나로서 만족하지는 않았지만 우선 식사를 공짜로 먹고 잠자리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식사는 시장 안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선전부장'앞으로 달아 놓고 국수나 김밥을 먹으면 된다.
잠은 보일러실 앞에 있는 석탄 창고 옆의 빈 공간에서 멍석을 깔고 그 위에서 웅크리고 잤다.
밤 새 타는 보일러 때문에 따뜻했다.
서울에 와서 사흘 동안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 것이 오랜 세월로 느껴졌다.
서울 역 대합실에서 벤치 위에 몸을 웅크리고 누었을 때 등이 시려 잠들기 까지 얼마나 떨었던가 ?
여기는 우선 따뜻해서 좋았고 옆에 아무도 없어서 좋았다.
보일러 앞에는 30촉 전구가 항상 켜져 있어서 책도 읽을 수 있었다.
선전부 작업실에서 뒷문으로 들어가면 극장의 내부와 통하기 때문에 그 당시에 '바이킹', '오부자'등 영화를 공짜로 볼 수 있었다.
선전부에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인 선전부장이 있고 그 밑에 조수 격인 사람이 두 명 그 밑으로 캔버스를 짜는 목수, 캔버스에 아연화(흰색 페인트)를 칠하는 사람, 그림을 다 그려 놓으면 가장자리에 흰 태를 두르는 사람, 복카시 효과를 내는 사람, 날짜 쓰는 사람 등 내 위로 여섯 명이나 있었고
나의 서열은 맨 꼴찌인 <사다리 맨>(사다리를 오르내리며 그림을 떼고 붙이고 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캔버스를 들고 동대문 게시판에 가서 사다리에 올라가 상영이 끝난 그림을 떼어 내고 새 그림 붙여 거는 그야말로 쪽팔리는 막노동꾼이었다.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아침에 일어나 어제 그려 놓은 500호 캔버스 두 장을 들고 동대문과 남산까지 걷는 동안 나의 초라한 모습을 내 스스로 느끼는 일 이었다.
나의 키보다 훨씬 큰 500호 캔버스 두 장을 그림이 밖으로 보이게 세우고 내가 캔버스의 사이로 들어가 캔버스 뒤쪽 중앙 가름 목을 양손으로 중심을 잡아들면 밖에서는 나의 발목밖에 보이지 않고 나의 시야는 캔버스 위 부분이 맞닿은 곳에서 땅까지 비스듬하게 벌어진 삼각형의 공간밖에 없었다.
그 좁은 시야에 들어오는 아침의 종로거리 풍경 중에 가장 나의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것은 군데군데 전차정거장에서 아침에 등교하기 위하여 전차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여학생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고 아름다웠다.
나와는 너무나 먼 곳에 있는 그들이었다.
바위에 떨어진 겨자씨! 그게 바로 나란 말인가?
내 고향 전주에 지금도 고생으로 나날을 보내고 계실 엄마의 근심 띈 얼굴이 눈앞에 나타난다.
..........
"얘! 저 그림 좀 봐! 그림이 저절로 움직이고 있잖니?
"아냐! 저 속에 사람이 들어 있어! 저기 안에 발이 보이잖아!"
"저 사람이 ‘커크더글러스’지! 너무 멋있다!"
"난 저런 사람 싫어! 너무 무섭잖아?!"
................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이렇게 걷고 있는 것일까?'
'저 아름다운 여학생들에게 감히 눈길조차 보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는가? '
'어쩌다 이렇게 얼굴도 없는 샌드위치맨이 되어 이 아침 여기를 걷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시야가 흐려지고 팔에 힘이 빠져나간다.
눈물로 온 뺨이 범벅이 되어 앞을 볼 수가 없다.
그럴 때면 나는 그림을 세우고 아무도 모르는 그림사이의 은밀한 곳에서 손등으로 연신 두 눈을 문질러 눈물이 멎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오냐! 두고 봐라 나도 내년이면 꼭 다시 학교에 다니고 말 거다!'
'힘내라 ‘일웅’아! 머시매가 눈물이 다 뭐냐?!'
스스로를 위로하며 절망을 잊으려 애썼다.
..........................
'하느님! 저에게 용기를 주세요!'
..............
벚꽃이 파고다 공원에 흐드러지게 핀 봄이 되었다.
"야! 익훈이 다음프로 간판까지 다 끝났응깨, 우리 나갔다 올랑게 너 오늘 집 지켜라!"
"예! 잘 다녀 오세요"
"오늘 점심은 그 집에서 밥으로 묵고 여그 뜨지 말고 잘 지켜!"
"예! 걱정 말고 댕겨들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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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이발을 하고 옷들을 갈아입고 꽃구경을 가나보다.
혼자서 있는 것이 홀가분하고 기분이 좋았다.
이제 아무도 없고 오늘은 자유다!
뭘 하고 놀까?
모처럼 그림 한번 그려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전부 창고 뒤편에서 헌 캔버스 한 장을 꺼내왔다.
선전부장 흉내를 내보기로 하였다.
나무 막대 끝에 붙은 집개에 파란색 분필을 꽂았다.
부장님 책상 곁에는 옛날에 그렸던 '스칠(미리 보내오는 영화의 명장면이나 배우의 사진)'이 많았다.
'황해'(액션배우)의 얼굴 스칠을 골랐다.
스케치를 하여 보았다.
두상의 끝과 턱 끝까지의 폭을 그어 놓고 눈의 위치, 코의 위치를 표시한 다음 점차 세부묘사를 하였다.
제법 '황해'를 닮은 거 같았다.
정말 신이 났다. 너무 신이 나서 점심 먹는 것도 잊었다.
...........
스케치를 마치고 캔버스를 헌 캔버스 있던 곳에 다시 가져다 놓았다.
.................
밤이 되자 선전부장과 부하 직원들이 술이 적당히 취하여 돌아 왔다.
"집 잘 봤냐?" 선전부장이 미안한 듯 말을 걸어 왔다.
"예!"
"점심은 잘 먹었냐?"
"예!"
"애썼다! 쉬거라!"
...............
선전부장은 자기가 없는 사이 뭐가 없어지지나 않았나 여기 저기 확인을 하고 다녔다.
페인트 통을 세어보고, 페인트 붓 통을 살피고, ......
아풀싸 선전부장이 내가 스케치한 그림을 보았다.
"엉?"...."이것 누가 그렸냐?"
"‘길태’야! 이 그림 스캐치 니가 혔냐?"
"아니라~!"
"그라먼...‘종칠’이냐?"
"아뇨~!"
눈이 동그래진 ‘길태’형과 ‘종칠’이 형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선전부장이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성였다.
"갠찮게 혔는디~~!" "누구까이~!"
나는 뭐라 말을 못하고 있었다.
"‘일웅’이 너 이거 누가 그리능가 봤냐?"
나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죄를 지은 사람처럼 머뭇거리다 이실직고를 하였다.
"사실은 오늘 심심혀서....제가 한번 헌 캔바스에다 끄적거렸구만요..."
"................그랑께 니가....‘일웅’이 니가 기맀단말이여?"
".....예!"
"오~~라 그려잉~~!....너 그림 배우면 갠찮겄다.....알았다 알었어~!"
나는 할 말이 없어서 머리만 긁적이고 보일러 실로 들어갔다.
........................
모두 퇴근하고 조용해 졌다.
.............
전등 불 빛 아래서 영어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
밖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한 두 사람 발소리가 아니다.
'이 밤에 아무도 올 사람이 없는데......!'
잠시 후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일웅’이 너이 쎼끼 이리 나와!"
선전부장 바로 아래 서열의 '길태' 아저씨였다.
깜짝 놀라서 나갔다.
"웬일이세요 부부장님?"
곁에 선전부장을 제외한 모두가 모여 있었다.
심상치 않았다.
"너이 건방진 쎼끼 대그빡에 피도 안 말른 것이 어디서 초크를 잡어!"
'빡' !!!
머리가 핑 돌았다.
캔버스 각목으로 나의 머리통을 갈긴 것이었다.
이어서 발길질 주먹질이 사정없이 나의 가슴과 다리, 뺨에 퍼부어졌다.
코에서 피가 터지고 옆구리가 결려서 몹시 괴로웠다.
.................
영문도 모르고 터진 나는 매질이 멈추자 겨우 정신을 차렸다.
...................
"너 이쎄끼 또 건방진 지꺼리 헐꺼여???"
....................
...................
'아! 그렇구나.....'
선전부장이 나의 스케치를 칭찬하는 말에 그들 모두가 분개하여 나를 집단 폭행하는 것이었다.
'다시는 안 하겠다'는 다짐을 받고서 '길태'부부장이 말하였다.
"씼어 임마! 선전부장헌티 맞었다고 말만 혔다면 너는 초상치는 줄 알어!"
..............
그들은 돌아갔고
석탄창고 옆 나의 잠자리에서 밤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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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를 떠야한다.
있을 곳이 못된다.
나를 지켜줄 사람도, 호소할 곳도, 아무것도 없는 이 곳에서 앞으로 또 계속될 폭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느님! 성모님! 저는 어떻해야 하나요?'
..............
손가락으로 묵주기도를 하다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 아침이 되었다.
오늘은 남산' kbs방송국' 앞으로 그림을 걸러 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