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푸른기장 증
'색입체'! 그렇다.
kbs색채 연구소에서 만든 상품화 된 색입체의 모순을 완전히 없애고
그야말로 '먼셀'의 이론에 근접하는 색입체 모형을 만들어 보자!
풍남여중에서 미술시간에 색입체를 설명하기 위하여 시중에 나도는 유일한 색입체를 구입하였었다.
kbs방송사에서 만들었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론에 맞지 않는 것이어서 무척 실망한 적이 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내가 직접 이론에 근접한 색입체를 만들려는 생각이 있었다.
‘색입체를 만들어서 교육자료 전시회에 나가면 <푸른기장>을 딸 지도 모른다’
<푸른기장>은 교육자료전에서 전국 1등급 중의 최고 작품을 선발하여 주는 상으로 그 점수는 무려 연구점수 ‘1’점이었다.
연구점수 부과 내력은 다음과 같았다.
도단위 3등급....0.125 점
2등급....0.25 점
1등급....0.5 점
전국단위 3등급....0.625 점
2등급....0.75 점
1등급....0.875 점
<푸른기장>..........1점
<대학원 석사학위>.....1점
푸른기장을 딴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정도의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나라고 못할 일이 있을까?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는 이 에너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쩐지 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래 망설이지 말고 당장 실천에 옮기자.
색입체 모형을 만들기 위해서는 만셀 이론에 맞는 색상, 명도, 채도, 별로 색상지가 있어야 한다.
어느곳을 가 봐도
이러한 색상지를 만들어 놓은 것은 없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도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직접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래 만드는 거다’
‘내 손으로 직접 만드는 거다’
남문화방에 들렸다.
포스터 칼라 물감을 살폈다.
수많은 색 중에서
20색상의 표준색을 고를 수 있었다.
낱개로 살 수 있는 것 중 가장 큰 병의 물감으로
표준 20색을 각각 2개씩,
흰색을 10개,
검정색을 3개, 주문하였다.
주문한 물감이 도착되자 작업에 착수하였다.
명도 단계별 회색을 검정색과 흰색을 명도비율로 정확히 섞어서
명도9짜리의 회색에서 명도8, 명도7,....명도 1의 회색까지를 커다란 유리병에 만들어 보관하였다.
여기에 순수한 검정색과 순수한 흰색을 더하여 명도 11단계의 색이 완성되었다.
색을 섞는 기구로 병원에서 사용하는 '주사기'를 이용하였다.
순수한 빨강은 명도가 4이고 채도가 14이다.
이 빨강의 순색과 순수한 흰색을 단계별로 양을 조절하여 혼합하여
명도 5 의 빨강색, 명도 6의 빨강색, 명도 7의 빨강색으로 변하며....거의 흰색에 가까운 명도 9의 빨강색까지 만들어서 각각의 색이 증발하지 않도록 유리병에 밀봉하여 보관하였다.
순색의 빨강에 검정색을 같은 요령으로 배합하여 명도3의 빨강에서 명도 1의 빨강색까지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각각의 명도 단계별 색상에
명도가 같은 회색을 단계별로 혼합하여
채도가 점점 낮아지도록 하여 4절 켄트지에 골고루 칠하여 색상지를 만들었다.
방과 후의 나의 일과는 온통 색상지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였다.
넓은 미술실의 마루위에 혼합하여 칠해서 만든 4절 색상지를 늘어놓고 퇴근하였다.
처음에는 하루에 서너 장 밖에 칠하지 못하였으나
요령이 생기면서 차츰 그 양이 늘어 갔다.
표준 20색의 각각 색상별로 명도와 채도를 달리하는 색상지를 다 만드는 데에 수 십 일이 걸렸고 그 양은 1150여장에 이르렀다.
색상지를 만들고 나서는 색입체의 구체적인 모형이 종단면과 횡단면을 조립 해체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었다.
색입체의 표준 20색을 각각 명도 채도별로 구분하여 입체로 제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수 십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구체화된 모형을 종이로 제작해 본 다음 이 모형을 가지고 철공소에 가져갔더니 전주시의 어떤 철공소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최우남’이 근무하는 학교의 과학실에 실험 작업대를 스테인레스로 제작하여 납품했다는 김제군 원평의 스테인레스 철공소의 기사를 만나서 모형을 보여 주었다.
젊고 명석해 보이는 젊은 기사는
“이런 것을 제작해 보기는 처음이지만 선생님의 표정을 보니 거절 할 수가 없네요!” 하며 만들어 보기로 하였다.
휴~~! 한 시름 놓았다.
...............
철제 틀에 두터운 스치로폼을 이용하여 몸체를 제작하고 몸체에 색종이를 정교하게 오려 붙여 색입체를 완성하였다.
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기막힌 색입체 모형이었다.
이를 교육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색상환이 필요하였다.
색상환은 2중으로 만들어 두 개의 원 반이 붙어 있으나 각각 회전하도록 제작하였다.
회전 반으로는 남원의 ‘밥상공장’에서 원형 밥상의 상판이 완성되기 전의 원형 판을 구입하여 활용했다.
완성된 자료를 가지고 수업을 해 학생들의 이해도를 측정하였다.
일단 흥미진진한 태도로 학생들이 수업에 임했으며 색의 3요소에 따른 색의 명도 변화와 채도변화 색이 한데 뭉쳐 입체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개념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보색의 노래와 색의 3요소 노래를 따로 악보로 만들어 괘도를 제작하였고 색상환의 스탠드 뒷면에 작은 전자 오르간을 부착하여 수업 시간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여 시청각적 지도효과를 나타내는데 성공적이었다.
모든 과정을 기록한 보고서를 제작하고 출품하였다.
전라북도대회에서는 나의 작품과 비교 될 어떤 자료도 내 눈에 띠지 않았다.
심사위원들이 신기한 나의 작품을 보며 많은 질문과 제작과정에 대하여 물어왔다.
나의 색입체는 전북교육자료전에서 미술교육부문 최우수작으로 선정되어 전국대회에 출품하였다.
서울 교육연합회 대 강당에서 전국대회가 열렸다.
전국각지에서 최우수작들이 모인 서울의 전국대회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고맙게도 ‘오 병선’아우가 나와 내 작품을 자기 승용차에 싣고 서울까지 운전을 해 주었다.
내게 주어진 코너에 작품을 진열하는 것 까지 오 병선은 적극 도움을 주었다.
작품 진열을 마치고 둘이서 1,2,3층의 각각 넓은 방안에 진열된 교과별 교육자료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별별 것들이 많았다.
나의 작품과 같은 발명품은 ‘미술과 교육자료’부문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
‘서울대’, ‘홍익대’의 미술과 교수와 서울시 교육청의 미술과 장학관 등이 심사위원이었다.
이들이 나의 작품을 보면서
“이거 이미 시중에 나와 있는 거 아닌가요?”하고 트집을 잡았다.
“예! 분명히 kbs에서 만든 색입체가 있지요...”
하고서 내가 미리 준비해 간 각 학교에 있는 상품화된 색입체를 내 놓았다.
“이겁니다.”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채도 단계라든지 색상이 전혀 맞지를 않습니다.”
나는 조목조목 설명을 덧붙여 해 드리고
나의 색입체를 상세하게 비교 설명을 하였다.
그들이 감동하는 눈빛을 나는 감지하였다.
“이 걸 선생님이 직접 만드셨다구요...!?”
“스테인레스의 틀은 고안하여 ‘철 공업사’에 맡겨서 제작하였습니다.”
“예! 잘 알겠습니다.”
더 이상 설명을 듣지 않고 다음 장소로 떠났다.
.................
어떤 결과가 나올까 걱정이 되었다.
.................
밖에서 기다리던 ‘오 병선’아우의 차에 앉아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누어버렸다.
“어떻게 될 거 같아요?”
“글쎄...잘 모르겠어...될 대로 되라지 뭐....”
.................
................
심사가 시작 된지 다섯 시간도 더 지나고 있었다.
............
전북 교육회에서 따라온 직원이 나를 부른다는 말을 차 밖에 있던 초등과 선생님이 알려주었다.
결과가 나온 모양이다.
교육회 직원을 둘러싸고 전북을 대표하는 선생님들이 삥 둘러 있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선생님! 축하합니다.
전북에서 오직 선생님 작품 딱 한 점이 ‘푸른기장’을 받게 됐습니다.
전라북도 채면을 세워주셔서 감사합니다.”
...................
‘휴~~~!’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절로 하느님께 감사기도가 나왔다.
.....................
안도의 숨을 내쉬자,
아직도 다 낫지 않은 치루(痔漏)의 상처가 이제 또 은근히 아파왔다.
< 치루 >
사실 색입체 만들기에 막 착수하려던 때에
전북대학병원에서 치루 수술을 받고서 통근 하면서 애를 먹었었다.
항문이 아프니 의자에 제대로 앉아서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등받이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약간 들고서 운전하는 고통을 참아야 했고
또 내가 교육자료를 만든다고 떠들썩할 수도 없어서 일과가 끝난 후 남모르게 미술실에서 작업을 하다가 밤늦게 혼자서 운전하여 집에 가곤 하였던 나날들....
수업이 빈 시간을 이용하여 아무도 모르게 샤워 실에 들어가 뜨거운 물을 대야에 받아 놓고 엉덩이를 까고 엉거주춤 앉아서 30분간 좌욕을 매일 해야 했었다.
2-3주면 상처가 아물 거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은 맞지 않았다.
4주가 넘고 나서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였었다.
치루는 고약한 병이었다.
항문의 직장 벽에 작은 구멍들이 있는데 이 구멍을 점막이 막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점막이 터져서 직장 내부의 변이 새어 나오면
직장 바깥의 기름 층을 뚫고 내려와
항문 근처의 엉덩이에 종기가 생기는 것처럼 고름이 잡혀 화농의 증세가 계속해서 생긴다는 것이다.
나의 증세는 점막이 양쪽에서 터져 ‘말발굽’처럼 통로가 생기고 항문 양쪽에 고름이 나오는 것이었다.
사실 이 치루의 증세는 풍남여중에서 마지막 해를 보낼 때 나타났었지만
집근처의 외과의사에게 가서 진료를 받았더니
증상을 살펴본 의사가 하는 말이
“이거 대학병원에 입원하고 수술을 해야 하는데요....”
“그래요?”
...........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
“그냥 제가 간단하게 여기서 해 드릴까요?”
“그럼 좋죠~!”
영문도 모르고 나는 대답하였다.
그는 수술실에서 마취주사를 놓더니 몇 분 만에 끝내고 거즈를 붙인 후 반창고를 바르고 소염제와 진통제를 처방하여 가라하는 것이었다.
금방 가벼워져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하지만
그해 겨울에 또다시 항문 주위가 따끔거리며 가렵고 아팠다.
또 다시 그 병원을 찾았다.
그 날도 똑같은 말을 하며 수술실에서 간단히 수술을 했다.
증세와 통증이 며칠 만에 사라졌다.
...................
남원고에 와서 출퇴근을 할 때 적어도 1시간을 운전해야 하는 데 또 다시 항문이 같은 증세로 아파온 것이었다.
이제는 다시 전에 갔던 병원으로 가기가 싫었다.
대학병원을 찾아갔다.
항문외과의 ‘황 박사’가 최고의 권위 있는 의사라는 것도 알았다.
‘황 박사’에게 특진을 예약하고 진료를 받았다.
...............
이건 ‘치루’인데 직장에 난 그 구멍을 막는
근본적이 수술을 하지 않으면 절대로 낳을 수 없는 병이란다.
그 날 바로 입원수속을 하고 학교엔 병가를 내었다.
다음 날 하반신 마취를 하고 수술을 받았다.
그 때가 막 ‘색입체’를 만들려 하던 때였다.
“처음 증상에서 근본적 수술을 했더라면 이토록 고생을 하지 않았었을 걸 그랬네요....”
나는 ‘황 박사에게 동내 의사의 이름이나 병원을 말 해주지 않았다.
.............
말이 방향을 잃고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
감격의 ‘푸른 기장’증을 수여 받고 바로 다음의 ‘교육자료 전’에 출품할 작품 구상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광희선생의 죽음>
여름 방학이 되었다.
장마가 일찍 찾아와서 기록적인 폭우를 전국에 쏟아 부었다.
집에서 출품할 작품을 구상하고 있을 때였다.
“아빠” “전화!” 인범이가 거실에서 나를 불렀다.
학교 행정실에서 ‘실장 박 순옥’씨의 전화였다.
“ 아이! 동생! ‘이 광희’선생이 죽었디야!”
형제처럼 지내며 사적으로는 형이라고 부르던 행정실장의 말이다.
“아니 그 튼튼한 사람이 왜?”
“동강에서 래프팅하다가 실수혀서 빠졌는디 아직 시체도 못 찾았디야!”
운동 좋아하고 건강하여서 잘 믿기지가 않았다.
......................
방학 중 이었지만 학교에 나가
교장선생님을 만났다.
‘한 수종’교장선생님은 충격과 걱정에 심한 우울증세를 보이고 계셨다.
“아이! 정 선생! 시간 내서 나하고 같이 한 번 가보더라고...”
“이대로 있을 수가 없구먼....”
“시체를 찾든 못 찾든 일단 한번 가보고 싶어...”
황급히 집에 연락하고 내 차로 교장선생님을 모시고 강원도 동강으로 갔다.
동강의 ‘어라현 계곡’, 장마는 개었지만 아직 물이 빠지지 않은 동강은 수심이 깊고 유속을 빨랐다.
‘이 광희’선생이 래프팅 보트에서 손을 놓치고 빠진 곳이라는 ‘어라현 계곡’은 래프팅 코스에서도 가장 위험한 곳이란다.
골짜기에 거대한 바위가 여기저기 솟아있어서 래프팅하는 사람들에겐 가장 스릴 만점인 곳이기도 하지만 가장 위험한 곳이라 한다.
거기에서 보트가 뒤집히는 바람에 구조를 못하였다고 현지의 해병대 출신 안전요원이 설명하여주었다.
근처의 민박집에서 이틀 밤을 머물고 기다렸지만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시신은 1주일 후에 발견하였다.
청바지에 구명조끼착용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한다.
학교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운구차가 들어오고 가족들이 운동장의 장례식장에 모이고 학생들이 조회대형으로 서 있었다.
나는 사회를 맡아서
‘이 광희’선생의 평소 모습과 애절한 감정을 담은 나레이션을 들으며 학생들 모두가 울음바다가 되고 조객들도 모두 흐느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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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다시 교육자료전에 자동 회전반과 자동왕복 운동판을 이용한 ‘평면디자인 제작기’를 발명하여 출품하고 또 한 번 '푸른기장'을 받아서 연구점수 만점인 '3'점을 확보하고도 남게 되었다.
이번에도 전북에서 유일하게 모든 교과를 통틀어
나 혼자 ‘푸른 기장’을 받았다.
<교감 승진 대상자>
때마침' IMF'가 터지고 대규모 구조조정이 일어나며 정년이 단축되는 바람에 대량으로 교감승진대상자를 모집하였기에 나는 우수한 성적으로 승진대상자에 차출되게 되었다.
나의 성적은 교감대상자 선정 커트라인에서 최상위권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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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고에서 정다운 여러 선생님들을 만나고 행복한 생활을 하며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느끼지 못하였다.
‘문 명’ ‘박 언래’ ‘이 명재’ ‘남 상윤’ ‘노 홍섭’ ‘윤 기태’ ‘소 문자’ ‘김 금희’ ‘장 경연’ ‘양 미옥’ ‘한 선희’ ‘정 진영’ .....
행정실장 ‘박 순옥’, ‘한 충문’주사님 .........
‘문 명’ ‘소 문자’ ‘김 금희’ ‘장 경연’은 나와 함께 자주 만나서 향교 뒷 산길에 담소를 나누며 산보를 하였다.
전주로 가는 구도로 변에 백일홍 나무가 많이 서 있는 곳,
백일홍 나무 아래 곱게 자란 잔디밭에 점심시간이면 함께 나가 점심을 먹으며 즐겁게 노래도 부르곤 했다.
나와 헤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앞으로 헤어져도 자주 만나 즐겁게 지내자는 뜻으로 ‘다섯 손가락’이란 모임을 만들었다.
모두 헤어진 지금도 가끔 만나서 옛날을 회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