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웅 찻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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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란처럼 살아온 나의 이야기/2. 6.25 전쟁

2. 6.25전쟁

정일웅 찻집 2015. 11. 14. 11:22

 

2. 6.25 전쟁

전주 남부시장 입구에서 미영(목화)씨 기름 짜는 공장을 하던 어머니의 외사촌 동생 박 명식씨가 방을 한 칸 내어 주어 우리 식구는 그 방에서 살았다.

수녀고모가 방문하여 전주에 온 며칠 후에 나를 데리고 가서 전주 성심유치원에 입학을 시켰다.

 

성심 유치원

나보다 일찍 다니던 학생들과 같이 놀이도 하고 한글도 배우고 셈도 익혔다.

 

이듬해 5월 유치원을 졸업하고 6.25사변이 일어났다.

모든 사람들이 피난 짐을 꾸려 시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엄마, 아빠, 누나, 나와 여동생, 우리 다섯 식구도 피난길을 떠났다.

아버지와 알게 된 어떤 사람의 고향집으로 임시 거처를 옮긴다는 것이었다.

 

그곳은 '전북 완주군 남관면 내아리'였다.

 

소달구지에 쌀5가마와 보리쌀 2가마, 옷을 넣은 고리짝 한 개를 싣고 3살 난 여동생 춘희를 이불로 싸서 달구지 위에 앉히고 엄마와 나는 소의 고삐를 잡고, 누나는 달구지 뒤에 따라오며 멀고 먼 길을 걸어서 갔다.

 

'내아리'에 도착하여 아빠가 어머니에게 알려준 집으로 가기 위하여 개울 옆 둑길로 접어들었다.

뜨거운 햇빛 만 내리 쬘 뿐 아주 조용한 길이었다.

휘어진 길 한 구비를 돌아 땅에 박힌 자갈로 울퉁불퉁한 흙길을 한참 갔을 즈음 멀리 동내 어귀가 보이고 커다란 정자나무 그늘에 사람들이 보였다.

 

국방색 군복을 입고 모자를 쓴 인민군이었다. 그곳은 치안대가 주둔하는 지역이었다. 호랑이를 피하려고 호랑이 굴에 들어간 꼴이 되었다.

따발총을 든 인민군 들은 막무가내로 쌀은 내려놓고 보리쌀만 가져가라고 하여 아무 불평도 못하고 빼앗기고 말았다.

아버지는 천주교 신자이며 부르죠아라는 명분 때문에 집에 있지 않고 공산당원들을 피해 다니다가 어쩌다 한 번씩 새벽이나 늦은 밤에 집에 들어와서 어머니와 우리를 확인하고서 곧장 다시 떠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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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치안대원 한사람에게 붙들려가서 노래를 배웠다.

'김일성 찬가'라는 노래였다.

-백산 줄기줄기 피어린-자국------

나의 임무는 치안대 본부에 물을 길어 나르는 것과 배운 노래를 동내 아이들에게 퍼트리는 것이었다.

돌담 아래에 동내 아이들을 쭈그려 앉히고 나는 아이들 앞에서 아무 뜻도 모르는 노래를 불렀고 아이들은 따라서 불렀다.

저만치에서 인민군 한 명은 국방색 탱크바지를 입고 바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며 나를 감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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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으로 만든 모자가 얼굴을 통 채로 가린 이상한 모습으로 새끼줄에 허리가 꼭꼭 묶여 굴비처럼 엮어진 사람들 5-6명을 끌고 가서는 구덩이 앞에 한 줄로 세우고 저쪽에서 인민군 대여섯 명이 따콩 총을 쏘아 댔다.

총을 맞은 사람들이 온몸을 뒤틀며 구덩이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보며 나는 옷에 오줌을 쌌다.

꿈을 꾸면 이런 광경이 나타나 소스라쳐 깨기도 하였다.

 

어디에선가 싸이렌 소리가 나면 공습경보라는 것을 알고 놀란 토끼 눈을 한 주민들은 황급히 방공굴에 기어들어가 공포에 떨며 시간을 보냈다.

잠시 후 호주기(참전 유엔군 호주의 전투기)가 쌕쌕 날아가며 '따다다다' 갈겨대는 기관총 소리와 폭탄 터지는 소리에 땅이 흔들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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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던 보리쌀 두 가마는 며칠 가지 않아서 동내 사람들이 모두 나누어 죽을 쑤어 먹느라고 다 떨어지고 말았다.

누군가 송키(소나무의 속 껍질) 먹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송키는 소나무의 겉껍질 속에 하얗고 얇은 속 껍질를 말하는데 이것을 벗겨 절구통에 찧어 물에 담가 놓으면 하얀 침전물이 생겼다. 그것을 끓여 먹었다.

 

도토리를 따다가 껍질을 벗기고 확에 갈아서 물에 담가 놓았다가 묵을 만들어서 간장에 찍어 먹기도 하였다.

송키를 벗긴 소나무는 얼마 가지 않아 말라 죽어 땔감이 되었다.

나는 엄마, 누나와 함께 자주 땔감을 줍기 위하여 앞산(마자리 뒷산)에 갔었다.

땔감이래야 고자배기(죽은 나무 등걸)나 마른 덩굴이 고작이었다.

온통 산은 벌거숭이였고 죽은 나무도 귀했다.

 

험한 비탈진 곳에 가까스로 살아있는 나무를 가지 채 찢거나 말라비틀어진 덩굴 등을 여기저기서 주어모아 칡넝쿨로 쫑쫑 묶어 멜 끈을 만들어 짊어지고 집으로 향하였다.

차도 옆에 드문드문 심어진 플라타나스 가로수 밑으로 한참을 걸어오는데 하늘에서 '---' 하면서 호주기(호주에서 온 유엔군 폭격기)소리가 들렸다.

엄마와 나,그리고 누나는 잽싸게 길가 웅덩이 진 곳에 기어 들어가서 두 손을 얼굴에 대고 눈과 콧구멍과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막고 입을 크게 벌린 채 죽은 듯이 엎드렸다.

반사적으로 훈련된 몸짓이었다.

'따따따따--따따따따-' 호주기에서 기관총알이 사정없이 땅에 박히면서 모래가 튀어 나의 이마를 때렸다.

죽은 사람처럼 우리는 꼼짝 않고 엎어져 있었다.

호주기는 서너 차례 다시 돌아와 기관총을 쏴 대더니 이내 멀리 사라졌다.

 

"일웅아! 갠찮냐?"

"엄마는 갠찮여?"

"인나라 언능 가자!"

"동자야! 너도 인나라 !"

 

고자배기 나무 짐을 다시 찾아서 어깨에 지고 이십여 미터를 걸어가니 짐을 싫은 황소 달구지가 처참하게 부수어져 있었고 황소의 배가 터져서 창자가 찢겨 나오고 피가 흥건히 흘러 고여 있었다.

십 미터쯤 더 앞쪽에 농부 한사람이 기관총에 맞아 즉사하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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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굶고 험한 것을 먹으며 살았어도 목숨은 모질게도 붙어서 죽지 않고 한 여름을 보냈다.

배고픔, 허기져서 온몸에 힘이 빠진 인간들을 공격해오는 또 하나의 적, 그것은 황토흙 방바닥과 벽의 틈새에 숨어 있다가 밤이나 낮이나 수시로 급습해오는 빈대들, 이불과 베개, 옷과 머리에 붙어사는 이, 피를 빨아먹고 뛰어 도망치는 벼룩, 낮에는 왕왕 거리는 파리 떼, 밤이면 수없이 달려드는 모기떼, 이런 것들과 싸우는 사이에 배고픔을 조금 더 잊을 수 있었던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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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장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빨갱이를 몰아내고 전쟁이 멈췄다는 말이 들려왔다.

거꾸로 매달려 있어도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낫다고 했던가?

전쟁이 끝났다는 소리에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의 숨을 쉬며 피난민들은 떠났던 자기 집을 향하여 보따리를 이고 지고 길을 떠났다.

우리 식구들도 살림 몇 가지를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전주로 향하였다.

 

달구지도 없이 걸어서 갔다.

'한벽루' 기차 굴을 지나갈 때 총에 맞아 죽은 시신 수십 구가 너저분하게 썩어가고 있었고 말라붙은 피와 시체에 왕파리 떼가 왕왕 거리며 달라붙어 시체의 피를 빨아먹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방바닥의 구들장 한 장을 떠들더니 그 속에서 종이에 싸 놓은 십자고상과 상본(예수성심 상, 성모성심 상)을 꺼내어 벽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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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다시 시작되고 평온과 불안이 교차하면서도 나는 학생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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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 고모도 다시 병원에서 일을 시작하고 엄마는 세 들어 사는 집의 가게 터에서 풀을 쑤고 묵을 만들어 파는 장사를 시작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아버지는 근심과 울분을 토하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다가 결국 병원에 입원을 하고 돌아와 자리에 누어있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맥이 빠져서 누워있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누군가를 원망하는 말을 하곤 하다가 다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기침을 심하게 하는데 나는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아빠의 모든 재산인 현금을 빌려간 사람들이 빨갱이로 변하여 돌려받을 수 없이 되었고 이 때문에 아버지는 화병이 난 것이었다.

기침을 심하게 하다가 가끔 피를 토해 내기도 하는 아빠를 보면서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아빠의 막내 여동생인 수녀 고모는 우리 집의 우상이자 안내자였다.

대구에 본원이 있는 샤르뜨르 바오로 회의 수녀였고 이름은정 젤멘수녀였다. 살바울(샤르뜨르의 약칭) 수녀회의 복장은 참으로 우아했었다.

챙이 넓은 하얀 고깔을 양편에서 말아서 머리 정수리에 핀으로 고정시키고 까만 드레스는 길게 늘어져 발목까지 닿았고 어깨에 두른 하얀 천이 등과 가슴을 덮어 성스럽고 품위 있는 분위기가 나는 수녀복이었다.

오른쪽 허리에는 1미터가 넘는 길이의 검은색으로 반짝이는 굵은 구슬로 된 15단 묵주가 치렁치렁 달려서 걸어 갈 때에는 딸그락 딸그락 소리가 들렸다.

 

수녀고모는 유난히 얼굴이 예뻤다. 마치 성화에 나오는 성모 마리아님 같아 보였는데 성질은 매우 급하고 모든 말이 억센 경상도 말로 명령조의 투였다.

 

아름다운 인상답게 인정이 많아서 우리 집 식구들을 많이 보살펴 주었고 누가 아플 때면 안심하고 성모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그 당시 고모님은 간호수녀였고 평생을 간호수녀로 사셨다.

고모님은 아빠의 건강에 특히 관심을 보였으며 '파스' '나이드라짓드'등의 약을 사와서 아빠에게 드리는 것을 보았다.

고모의 정성과 노력에도 아빠의 병은 점점 더 깊어만 가는 것이었고

아빠는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변하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