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웅 찻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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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란처럼 살아온 나의 이야기/15. 들 꽃 같은 아이

15. 들 꽃 같은 아이

정일웅 찻집 2016. 7. 6. 14:23

15. 들 꽃 같은 아이

 

 

나의 교단생활의 처음 출발은 꿈같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우리 반 학생 17명은 남자애들이 열한 명에 여자아이가 여섯 명이었다.

어미 닭이 병아리들을 이끌고 다니듯 나는 아이들을 이끌고 이곳저곳 자리를 옮겨가며 수업을 하였다.

산 위의 커다란 바위 위와 시냇가의 모래밭이 우리의 교실이고 운동장이었다.

 

냇가에서 공부하다가 다슬기를 잡는 날엔 가까운 학생의 집에서 된장을 풀어 삶아 먹으며 마루에서 공부를 하였다.

 

산 위엔 위가 평평하고 집채만큼 커다란 바위들이 많이 있어서 비가 오지 않고 따뜻한 날엔 공부하는 교실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뒷산의 바위에서 공부하는 날엔 쉬는 시간에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화장실을 지정하여 주는 수밖에 없었다.

 

"오른쪽의 저쪽 바위 뒤는 남자 변소이고 왼쪽의 저쪽 바위 뒤는 여자 변소다. 남학생들이 저쪽으로 가면 안 돼! 알았지?"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바위 뒤를 화장실로 잘 이용하였고 가끔 장난꾸러기 영환이가 여학생들 쉬하는 걸 훔쳐보고 돌을 던졌다고 여학생들이 내게 이르곤 하여 영환이는 내게 군밤을 얻어맞고 머리를 득득 긁으면서도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영환이는 전체급장을 하는 깡마른 그 아이였으며 나의 이불 보따리를 빼앗아 짊어지고 뛰어가던 일 잘하고 뼈대 힘이 센 아이였다.

워낙 시골이고 학교가 새로 생겼기 때문에 적정 연령을 초과한 아이들이 많았고 집안에서 가사를 돌보는 아이들이라서 매우 부지런하고 공부하는 것만 빼놓고는 모든 일에 억척스럽고 적극적이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새벽에 일어나서 꼴을 한 망태기 씩 베어놓고 나서 아침식사를 하고 학교에 등교하였다.

 

우리 반 급장 아이는 김 남숙 이라는 여학생이 100%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김 남숙의 아버지는 학석리의 이장인 김 길진 씨였으며 아내도 없이 고독하게 외동딸 하나를 기르고 있었다.

 

남숙이는 하얀 피부에 커다란 눈망울이 맑게 빛나는 단정한 용모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윤기(潤氣)나는 긴 머리카락을 항상 단정하게 손질하고 다녔으며 의복이 도시의 아이들처럼 단정하고 세련되었었다.

품성이 부지런하고 예절바르며 말씨도 이 지방의 사투리를 별로 사용하지 않고 두뇌가 명석하여 학업성적이 탁월하게 좋았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 아이의 고모 되는 사람이 서울의 남대문 시장에서 옷가게를 하는데 재고품이 된 옷을 늘 보내주었기 때문에 항상 깔끔한 모습을 할 수가 있어서 다른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었다.

 

유아기를 아버지와 함께 서울에서 보내다가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를 거듭하고 어머니마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큰 아빠가 살고 있는 고향 땅 '학석리'에 다시 내려와 물려받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남숙'이의 아버지 김 길진 씨는 일찍이 서울에서 중학교까지 학업을 마친 사람이었고 천성이 부지런하여 남을 돕는 일에는 항상 앞장을 서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학식으로 보나 덕망으로 보자 이 고을의 만년 이장 깜이었다.

 

'남숙'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나이도 어린 적령기의 아동이었지만 타고난 성품이 부지런하여서 인지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짓고 집안 청소까지 말끔히 한 후에, 아침에 들로 나가 들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마치고 학교에 오는 것이었다.

학교라고는 하지만 마을 앞 논바닥에 일단 모여서 각 학년별 담임교사를 만나고 조회를 마친 후에 6학년 일곱 명은 오 선생님을 따라서 나가고 4학년은 윤 선생님을, 3학년은 서 선생님을 따라 뿔뿔이 흩어지고 1,2학년은 논바닥에 그대로 남아서 2학년은 이 종철 교감선생님이 가르치고 1학년은 구 선생님과 함께 공부를 했다.

나의 학급 학생들은 나와 음악 공부를 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였다. 나는 이들에게 교과서의 노래는 물론이고 내가 좋아하는 많은 노래들을 가르쳐주었다. 다른 학년의 아이들이 우리 반의 음악 수업을 제일 부러워하고 있었다.

바위 위에서 나의 커다란 노래를 따라 부르는 시간이면 다른 학년의 아이들이 몰려와 같이노래를 배우곤 했었다.

 

남숙이와 영환이가 노래를 제일 잘 불렀다.

남숙이가 제일 잘 부르고 좋아하는 노래는 '따오기'였다. 남숙이는 따오기를 부르다가 끝을 맺지 못하고 울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메드냐

내어머니 가신 나라 해 돋는 나라............."

 

어린 마음에 돌아가신 엄마가 그리워서 '내 어머니...가신나라...'를 부르다가 덜썩 주저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우는 좁은 어깨의 떨림을 보노라면 나도 같이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남숙이의 형편을 모르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같이 따라 우는 아이도 있었다.

남숙이를 보고 있노라면 인적 없는 바위 뒤에 홀로 핀 들국화를 보는 듯 청순하고 가련함에 가슴 저미는 슬픔이 나에게 밀려오고 있음을 느꼈다.

 

가냘픈 줄기에 연 보랏빛 작은 꽃 한 송이가 햇빛과 이야기하며 별, 나비와 속삭이며 세상의 모든 슬픔을 혼자 다 수용하는 듯 남숙이의 얼굴엔 항상 슬픈 미소가 신비스럽게 머물고 있었다.

영환이는 남숙이의 울음으로 분위기가 숙연해 지면

 

"선생님! 제가 노래 하나 불를께요!"

하며 오른손을 번쩍 들고 벌떡 일어섰다.

"! 얘들아! 영환이가 노래 한 곡조 부른단다! 박수 한번 힘차게 갈겨 보거라!"

하면 아이들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쳐 댔다.

영환이는 눈을 지긋이 감고 오른발을 앞으로 반보쯤 내밀고 발끝을 까딱거려 박자를 맞추다가

 

......."홍도 오오 야 --

울지-이 마아라 ----

오옵빠아아가아 이이이있다--

 

목에 있는 모든 힘줄이 터져 나올 듯이 곤두서고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지면서 길게 빼는 부분에서는 턱 끝을 쭉 내밀어 좌우로 흔들어 바이브레이션의 효과음을 내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배를 움켜잡고 웃음보따리가 터져도 능청맞은 영환이는 그 쇠꼬챙이 같은 목소리로 앞산의 메아리가 들려올 정도로 큰 소리로 끝까지 다 부르는 것이었다.

산에 나무를 하러 어른들을 따라다니며 배운 노래라서 어른들이 술에 취해 노래하는 흉내를 그대로 내었고 흘러간 옛 노래는 모르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눈물 글썽이던 남숙이도 어느새 눈물이 마르고 다른 아이들처럼 천진하게 깔깔대며 웃었다.

분위기는 다시 밝아지고 공부를 계속 할 수가 있었다.

.......................

 

학교를 짓는 공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여름방학 무렵이 되자 교실 세 칸과 교실 반 칸 정도의 현관이 우뚝 세워졌고 슬레이트 지붕이 얹어졌다.

마루판자를 짜 맞추느라고 못을 박는 망치소리가 이쪽 마을에까지 메아리쳐 들려왔다.

학석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초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이 건설되는 것을 보는 주민들의 감격은 대단하였다. 뿐만 아니라 학교 설립은 이곳 주민들의 제일 큰 숙원 사업이었다.

 

학교가 들어서는 것은 아이들에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작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 만 하여도 이곳에서 6Km도 더 떨어진 갈담이나, ‘옥정’, ‘하운암금기 초등학교를 걸어서 다녀야 했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당당한 건물에서 자녀들을 공부시킬 수 있다는 기쁨에 운동장 정리 작업을 위한 노력 동원을 요청하는 학교장의 부탁에 헌신적인 봉사 활동을 해 주었다.

세월은 빨리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