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깨구락지 합창단②...보석같은 추억
윤선생의 몸에서 나는 향기는
방금 목욕시킨 어린애에게서 맡을 수 있는 비누 냄새 같은 그런 청아한 향기였다.
그 향기가 나의 가슴 깊은 곳에 닿는 순간
뜨거운 전율이 전신에 퍼지며 손발에 힘이 쏙 빠져나갔다.
........................
"정 선생님! 그 동안 너무 수고 많았어요"
그녀가 먼저 나에게 격려를 해 주었다.
"...........그 그 그건 ......... 내가 윤선생에게 할 말인디......."
나는 좀처럼 나의 심신을 통제 할 수가 없었다.
"왜 그래요 표정이?? ......너무 피곤한 거 같네..."
좀처럼 말수가 적은 그녀가 나보다 말을 더 잘 했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
"내일 아침 일곱 시쯤 출발하지!"
.........
........
잠시 동안 말이 없던 우리는
"어--어--"하며 동시에 소리를 지르고 두 눈을 크게 뜨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
"왜 그랬어 윤선생!?" 내가 먼저 물었다.
"선생님은요?" 그녀가 내게 되물었다.
"애들한테 내일 몇 시까지 나오라는 말을 안 한 거 같아....."
"저도 방금 그 생각하고 그랬는데...."
우리는 둘이서 싱겁게 한참을 웃었다.
"애들은 일찍 올 꺼여 -- 윤선생이나 늦지 말고 일찍 와!"
이내 마음의 평정을 찾은 나는 그녀와 함께 교실을 빠져 나와 교문까지 같이 걸어 나갔다.
그녀와 헤어지는 길목이 저만치 보일 때 그녀가 말했다.
"저 -- 정선생님은요--" 나는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귀가 쫑긋해졌다.
"응-- 왜 그래?"
"우리는 같은 동창인데-- 겨우 한 달 먼저 발령 받았다고 ---"
나는 무슨 말이 이어질지 궁금하였다.
"그래서......?"
"애들 가르치는걸 보면은 ........." 그녀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그녀는 조금만 미소를 머금어도 양쪽 볼에 보조개가 생겨났다.
"..................노련한 것 같고 ......... "머뭇거리는 그녀의 표정에 수줍음이 스치며 뺨이 약간 붉게 물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 어쩐지 ........ 오빠 같다는 생각이 쪼금.........." 그녀는 말을 중단하고 갑자기 허공을 향하여 한번 웃고는
"나 갈께요...!" 하며 또박또박 걸어서 집으로 향하였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고 그 붉은 햇살은 찰랑거리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에서 반짝이며 하얀 목과 어깨를 타고 내려 허리와 가벼운 스커트 자락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진 것 또한 그날이 처음이었다.
하숙집으로 걸어가는 나의 가슴에는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뿌듯한 행복감이 전신에 펴지며 젊음의 힘이 솟구쳐 오름을 느끼고 있었다.
.........................
그날 밤은 평상시 보다 조금 일찍 자리에 누었다.
아늑하고 포근한 구름 위에 몸을 싣고 우주를 유영하는 듯 환상 속에서 가물가물 달콤한 잠 속으로 한없이 빠져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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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탁' '탁'
창호지를 바른 방문은 쪼갠 대가지를 대각선으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재래식 작은 문이었다.
군데군데 신문지를 오려 발라 놓은 문이 달빛을 받아 아래쪽 반이 환하게 비치고 검게 그림자가 드리워진 대각선 체크무늬로 엮은 방문 창호지 위에 사람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탁' '탁' --그림자의 작은 주먹이 문을 두드렸다.
"스앵님--""스앵님--"
"누구냐---!"잠이 덜 깬 목소리로 말하며 부시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빨리 인나요 !"
성냥을 그어 호롱불에 붙였다.
베개 머리의 시계를 집어 자판을 보았다. 잘 보이지 않았다.
호롱불에 가까이 가며 눈을 크게 몇 번 감았다 떴다 하고 나서 미간을 찌푸리고 보았다.
4시 10분이었다.
"아니! 너 누군데 이 밤중에 여길 왔어 ?"
"갈담까지 걸어 갈랑께 빨리 오라고 혔잖여요 -!"
목소리를 들으니 꼬마 '황성조'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기가 막혔다.
별수 없이 일어나 벽 중간의 기둥 나무에 박힌 못에 걸린 바지를 내려 입고 방문을 열었다.
새벽바람이 방안으로 확 밀려들어 왔다.
가위질로 깎은 대머리가 달빛을 받아 일구어 놓은 밭이랑처럼 그림자 져 있었다.
"어서 들어와라!"
성조는 겸연쩍게 머리를 득득 긁으며 높은 문지방을 무릎으로 기어서 들어왔다.
"느그집 시계 없냐?"
"예!"
"얌마! 아무리 시계가 없어도 그렇지, 이렇게 일찍 오면 어떻게 허냐?"
"곧 날 새아요! 저는 항시 이렇게 인나는디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천진난만한 이 꼬마는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너 시방 참말이냐?"
"예 !" 왼쪽 콧구멍에서 2cm쯤 빠져 나온 노란 코를 "크르륵" 들이마시며 대답했다.
"그리각고 뭣허냐?"
"깔 비어놓고라우 쇠죽 쑤어 놓고 학교올라면 바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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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 그렇지' 내가 왜 그 생각을 미쳐 못 했을꼬!
머슴살이 십여 년에 겨우 장가들어 아들 낳고 고생고생 하다가 이제 겨우 먹고 살만 하더니 제 작년 겨울에 죽었지--
나무에서 떨어지면 똥물을 먹어야 낳는다고 똥물도 먹어 쌓더니 ................
나는 꼬마를 보면서 눈시울이 시큰 해 졌다.
꼬마의 작은 손을 잡아 보았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손바닥과 손톱은 바위처럼 거칠었다.
나는 그 꼬마를 꼬옥 안아 주었다.
"성조야!"
"예?"
"지금은 너무 빠르니까, 여기서 좀 자거라! 시간 되면 선생님이 깨워 줄게"
"갠찬혀요! 금방 애들 많이 올것인디요!"
"그나저나 조금 누어라!"
나는 이불을 개어 벽에 밀쳐놓고 꼬마를 거기에 기대어 뉘었다.
...............
'후닥닥 후닥닥' 발자국 소리와 함께 계집아이들이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오고 먼발치에서 가느다란 목소리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선-생-니-임-'하고 개미 같은 소리로 누군가가 불렀다.
'조용히 혀!'
'아직 안 일어나셨능개벼!'
'야! 야! 저 봐라 저 불 써졌잖여!'
'니가 한번 불러 봐'
많은 말들이 뒤섞이며 들려왔다.
시계를 보니 5시였다.
'참! 못 말리는 아이들이로구먼!'
...........
여섯 시도 채 못 되어 거의 모든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학교 운동장에 가서 기다리도록 하여 놓고 세수를 하고 옷을 입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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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를 마치고 학교를 향하여 논 밑 너머 학교 교문 쪽을 보았다.
까만 투피스 차림의 윤선생이 손가방 하나를 들고 걸어오는 모습이 운동장 가장자리에 듬성듬성 심어 놓은 포플러나무 기둥 사이로 보였다.
'찌리릿!' 가슴에 전율이 일었다.
인원 점검을 하여보았다.
'오 기오'만 아직 오지 않고 전원이 다 모였다.
"선생님!" 영숙이가 불렀다.
" '기오' 오늘 못 온데라우"
"왜?"
"부역 나간데라우"
'기오'는 나이가 제일 많았고 완전히 변성이 끝난 어른 목소리를 내는 아이였다.
아이들의 복장은 각양각색이었다.
멋을 부린다고 반바지에 짝이 맞지 않는 양말을 신고 온 아이,
아빠 와이셔츠를 소매를 줄여 풀 먹여 다려 입고 온 아이,
통치마에 버선을 신고 온 여학생,
대부분의 아이들은 고무신을 신었고 긴치마 짧은치마, 원피스, 등등, 오늘 입기 위해서 모두 빨고 풀 먹여 다림질을 하여 천 표면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여학생 대부분은 머리를 길에 하여 더러는 뒤로 묶거나 양 갈래로 땋았다.
남학생은 모두가 박박 깎아 버린 머리인데 반 이상은 집에서 가위로 깎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
교장 선생님과 오선생이 배웅을 나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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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담'까지의 4km 길은 떠들어대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잠깨고 있었다.
버스를 처음 타 보는 몇몇 아이들은 버스를 타고 읍내에 간다는 들뜬 기분에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드디어 갈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였다.
그날은 마침 갈담 장날이었다.
도로변과 정류장 주변에 벌써 많은 아이들이 서성거리며 장을 펼치고 있었다.
반시간 정도를 기다리자 우리가 탈 버스가 순창 방향 저쪽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어찌나 많은 사람을 태웠는지 버스의 배가 옆으로 불룩 붉어진 느낌이었다. 아니 실제로 배가 불룩하였다. 사람을 너무 많이 태워 장꾼들이 보따리며 바구니 등을 차창밖에 손을 내어 들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버스가 도착하자 아이들은 함성을 질러 댔고 버스에서 사람이 내리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버스 안이 텅 비었다.
운전기사 한 사람과 노인네 두 사람이 앞뒤에 앉아 있고 나머지 좌석은 텅 비었다.
"자-! 버스가 왔다! 천천히 올라가 앉아라!"
아이들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밀치고 달치며 뛰어 올라가 창 쪽에 자리를 잡느라고 야단이었다.
중노인쯤 되어 보이는 운전기사가 기가 차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려 아이들이 들어오는 출입구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운전기사 옆에 서서 오른쪽 집게손가락을 1자로 펴서 입에 대고 '쉿!' '쉿!" 하며 조용히 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허사였다.
"아저씨! 미안합니다.
"버스를 처음 타 보는 애들이 많아서요." 나는 운전기사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하였다.
"버스를 처음 타요?"
운전기사는 한마디를 하고는 별 흥미 없다는 듯 고래를 돌리고는 검은 기름 때 묻은 통 속에서 물 젖은 걸레를 꺼내어 유리창을 슥 슥 닦고 있었다.
버스가 시동 걸리는 소리를 내더니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아이들은 괴성을 지르며 온갖 소리로 떠들어댔다.
'간다--' '오라이--' '보롱-보롱' -- '웽---'
버스가 제 속력을 내며 가속을 하자 아이들의 함성은 더 커졌다.
'쪼-기 봐라 저--!' '저것이 백련산이여!'
'--저그 저것이 우리 삼촌 내 집이다 --'
차창을 스쳐 지나가는 가로수를 세는 아이도 있었다.
나와 윤선생은 자연스럽게 운전석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창 쪽에 앉은 그녀의 오른팔이 나의 왼쪽 팔에 살짝 닿았다.
그녀의 긴 머리에서 은은한 향기가 나의 후각을 자극하였다.
나는 그 향기를 만끽하려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때 갑자기 뒷좌석 쪽에서 여학생 서너 명이 질러 대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 비명 소리는 주위의 아이들까지 합세하여 점점 커져 갔다.
윤선생의 체취에 취하여 달콤한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려던 희망이 갑자기 깨져 버렸다.
나와 윤선생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 아이인지 한 학생이 의자에서 바닥을 향하여 엎드려 있고 두 손을 막으면서 자리를 피하는 여학생들이 서너 명 있었다.
'성조'가 멀미를 하여 구토한 오물이 앞좌석 등받이와 바닥에 흥건히 너부러져 있었다.
된장국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황급히 조수석 옆의 양동이를 들고 왔다.
양동이 속에는 몽당 빗자루와 쓰레받이가 담겨 있었다.
오물을 쓸어서 양동이에 담았다.
손수건을 꺼내어 성조의 입과 손을 닦아주었다.
차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성조의 얼굴엔 핏기가 없었고 이마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나는 성조 옆에 앉아 등을 쓸어 주며 임실 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아! 아깝다. 모처럼 윤선생 옆에서 좋은 기회였는데..............
.........................
.......................
임실 정류장에 도착하였다.
버스에서 내린 아이들을 이끌고 오늘의 대회장인 임실 제일 극장으로 향하였다.
아이들은 길가의 건물을 보며 "2층이다! ' ' 3층이다!' '야! 높다! 라는 등 소리를 지르며 길가 상점의 간판을 연신 읽어 댔다.
극장 앞에 도착하였다.
나와 윤선생은 새끼 거위 떼를 이끌고 가는 어미 거위 한 쌍처럼 질서 없이 거리를 쓸고 가는 아이들의 앞에 서서 걷고 있었다.
극장 문 앞에 들어서는 순간 나의 전신의 힘을 쏙 빼어 버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입이 딱 벌어지고 눈앞에 깜깜해졌다.
아니 ! 이럴 수가!.................
발걸음이 딱 멈춰져 버렸다.
같이 걷던 윤선생도 나와 똑같은 심정이었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재잘거리던 아이들도 숨을 죽이고 두 눈이 휘둥글 해져 발길을 멈춰 버렸다.
눈앞에 벌어진 광경.....!
아! -- 그것은 참으로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그야말로 희한한 기상천외의 사실이었으며 심장을 방망이로 치는 충격이었다.
...................
높다란 극장 벽 쪽에는 70명쯤 되어 보이는 여자 천사들이 그림처럼 줄을 맞춰 넉 줄로 서 있고 그 천사들의 한 가운데 앞에 검정 양복 나비넥타이의 앞이마가 넓고 잘생긴 사나이가 서서 지휘를 하며 합창 연습을 시키고 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천사! 천사들을 데리고 있었다.
70명 전체의 여자아이들이 한 결 같이 남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하얀 타이즈 양말이 미끈한 종아리와 허벅지를 감싸고 있었다.
짧은 남색 주름치마에 하얀T셔츠를 입고 남색 조끼를 깜찍하게 입고 있었다.
윤기 흐르는 머리엔 빨간 리본을 꽂고 있었다.
아이들은 물론 나와 윤선생도 '아!'하는 탄성과 함께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
이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는 그야말로 천사의 목소리 그대로였다.
곱게곱게 다듬어진 두성 발성에 셈여림의 기묘한 변화가 엇갈리며 마치 가벼운 바람결에 깃털이 나르듯 아름다운 화음은 나의 전신에 소름을 오싹 끼치게 하였으며 이제까지 어렴풋이나마 간직했던 모든 희망과 기대와 들뜬 기분은 송두리째 녹아 내려 버렸다.
...............
아이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자기들과 '너무도 동떨어진 이 아이들을 바라보며
" 야! 옷 좋다잉?"
"왜 저렇게 이쁘다냐!"
"노래도 참말로 간살시럽게 한다잉-?" 하며
신기한 이국 풍물을 구경하는 듯 넋이 빠져 있었다.
극장 출입문 쪽으로 돌아가 보았다.
출입문 서쪽 계단에도 처음 못지않은 차림의 여학생 70명 정도의 합창단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빨간 운동화에 하얀 타이즈 하늘색 짧은 치마에 흰색 블라우스에 빨간 넥타이를 차고 그 위에 하늘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
위아래 하얀 양복을 입은 30대의 키 큰 남자 선생님이 지휘를 하고 있었다.
극장 뒤편에도 유니폼을 완전히 갖춘 두 팀 정도의 다른 합창단이 연습하고 있는 것을 언뜻 보았다.
나는 다리에 힘이 쏙 빠져나가 마치 허공을 걷는 듯, 제대로 정신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 어두운 곳이라도 있으면 숨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극장 안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수많은 요정들이 떠들며 와글거리고 있었다.
위 눈두덩이에 파란색을 칠하고 까만 눈썹이 유난히 길고 입술은 빨간 꼬마 요정들이 거의 빨가벗듯 한 야릇한 복장으로 단장을 하고 이리 뛰고 저리 뒤며 요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몇몇 젊은 엄마들이 군데군데서 딸내미들 화장을 해 주느라 열심히 손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숨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극장 앞좌석 쪽이 좀 비어 있었다.
나는 맥없이 걸어 앞좌석 빈곳에 털썩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정선생님 !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아이들을 우르르 몰고 온 윤선생이 나를 불렀어.
철없는 아이들은 처음 보는 구경거리가 생겨서인지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아! 촌구석에서 찌들게 일만 하고 자라 온 저 철없는 아이들은 잠시 후에 다가올 처참한 모멸감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없구나!
나는 등줄기와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
"어머!!?"
"정선생님! 왜 이래요! 어디 아파요?"
윤선생은 놀란 듯이 말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얼랠래...!" "이게 웬 땀이야!" 윤선생은 손수건으로 나의 이마에 땀을 씻어 주었다.
손수건 끝자락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윽하고 달콤한 그 향기가 콧구멍을 통하여 심장 깊은 곳까지 확 번져 갔다.
순간 화다닥 정신이 들었다.
아! 내 곁에 윤선생이 있다.
그녀가 깨끗한 자기의 손수건으로 나의 땀을 씻어 주다니 지금 나를 닦아주는 이 손수건은 아직 한 번도 다른 남자의 얼굴에 닿아 본 적이 없는 순결한 손수건이 아닌가?
전신에 새로운 힘이 솟구쳤다.
번쩍 눈을 떴다.
나의 주위에 뺑 둘러 초롱초롱 빛나는 눈망울들이 슬픔 어린 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나의 마음과 행동이 너무나 부끄럽고 겸연쩍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이들을 향하여 씽긋 웃어 주었다.
아이들 얼굴이 금 새 밝아졌다.
그녀도 나를 보며 조용히 웃고 있었다.
내가 왜 의기소침해 한단 말이냐 나는 이제 교직 생활2년째 난 병아리 선생이 아닌가?
오늘이 있기까지 나의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산골 오지에서 '임실군 읍내의 합창대회'에 출전한다고 의기양양해 하는 천진난만한 이 깨구락지들을 깨구락지 대장님이 기를 죽게 해서야 되겠는가?
힘을 내자! 나는 어금니를 '딱딱' 부딪치고 입술을 힘주어 꽉 다물었다.
'찌--잉'하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크게 울리다 사그라지더니 "똘그락 똘그락' 마이크 조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똑 ' 혓바닥 두드리는 소리가 나다가
"아 --아 --알려 드립니다. " 걸쭉한 남자 목소리가 주의를 환기시켰다.
장내가 조용해 졌다.
"아 --!아 --! 장내에 합창부를 인솔하고 오선 선생님들께서는 지금 바로 무대 옆 본부석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무용부를 인솔하신 선생님들께서는 극장 출입구 쪽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ㄷ,........................................"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어깨에 힘을 주고 일부러 '뚜벅뚜벅'걸어서 본부석으로 향하였다.
................
본부석에서는 출연 순서를 정하는 추첨이 있었다.
추첨 결과는 1번 임실 초등학교 2번 관촌 초등학교 3번 학석 초등학교 4번 오수 초등학교로서 모두 4개 학교가 참가하였다.
추첨이 끝나자 다른 학교의 선생님들은 서로 정담을 나누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모두 낯선 얼굴들이었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 겸연쩍어서 그냥 나와 버렸다
우리 애들이 있는 곳을 향해 가면서 사뭇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37개 초등학교 중에서 나머지는 모두 무얼 하고 4개 학교만이 출전하였단 말인가?
.................
윤선생은 우리 번호가 3번이라고 하자
"번호는 잘 뽑았네요!" 라고 말하며 살짝 웃어 보였다.
"그나저나 쪽 팔려서 큰 일 났네!" 나는 조그마한 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괜찮아요! 우리가 뭐 선수인가요?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 37개 학교 중에서 4학교밖에 안 나왔는데 얼마나 대견해요?"
그녀는 활짝 웃음 핀 표정으로 나를 위로하여 주느라고 사뭇 어른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대견스럽고 사랑스러웠다.
..................
한참 후에 대회가 시작되었다.
"지금부터 임실군 초등학교 예능 경연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국민의례에 이서 교육장 말씀과 심사 요령 등 지루한 말들이 계속된 후에 드디어 합창 경연대회가 시작되었다.
"맨 먼저 임실 초등학교 합창이 시작되겠습니다.
‘이 승남’ 선생님이 지휘하시고 '노 명숙'외 69명의 어린이가 나오겠습니다."
천사들이 사뿐 사뿐 걸어서 무대 위로 올라갔다.
열 네 명의 어린이가 무대 중앙에 일직선으로 늘어서서 무대 앞을 향하여 차려 자세로 서 있고, 뒤따라 올라온 다음의 열 네 명은 두 번째 줄에, ...다섯줄이 나란히 섰다.
마치 기계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70명의 어린이 입장이 끝나고 지휘자와 반주자가 나란히 무대 위에 올라왔다.
무대 중앙 정면에 서서 조용히 인사를 하였다.
우뢰 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임실 초등학교 무용단들은 오랫동안 그치지 않고 박수를 쳐 댔다.
반주 선생님이 피아노 의자에 안고 나자 지휘자의 오른 손이 이마 위로 올라갔다.
그 순간 학생들은 일제히 지휘자를 향하여 2단계 동작에 의하여 기계처럼 착! 착! 몸의 방향을 돌렸다. 까만 눈망울들이 지휘자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지휘자는 반주자를 향하여 눈짓을 하였다.
옥구슬이 구르는 듯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래가 시작되었다.
지휘자의 가벼운 손놀림에 천사들의 고개는 찰랑 찰랑 리듬을 타고 가볍게 움직이며 예쁘고 크게 벌린 입에서 맑고 투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삽시간에 극장 안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고 나의 전신엔 소름이 오싹 끼치며 눈물이 핑 돌았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아름다운 합창 소리에서 느껴지는 감동의 눈물이었다.
지휘하는 선생님이 너무나 부러웠다.
그는 너무나 멋졌으며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포르티시모에서 피아니시모에 이르는 셈여림의 효과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맑고 투명한 소리의 어울림이 극장 안의 모든 사람들을 환상의 공간으로 둥둥 띄워 주고 있었다.
나는 진한 감동으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손수건을 꺼내어 닦고 또 닦아도 계속하여 눈물이 흘렀다.
빗물 뿌리는 유리창에서 바깥의 사물이 흐려 보이듯 합창단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눈을 찔끔 감았다 떴다. 눈물이 볼을 타고 쭈르르 흘러 내려 입 가장자리로 들어갔다.
찝질한 맛이 감지되었다.
옆에 있는 윤선생도 긴장과 감동이 뒤엉킨 듯 한숨을 네 쉬는 소리가 들렸다.
...................
생고무 공이 통통 튀는 듯
가볍고 명랑한 지정곡 '술래잡기'에 이어 그윽하고 슬픈 라단조의 '도라지 꽃'을 자유곡으로 부르고 있었다.
8분의 6박자의 잔잔한 왈츠 리듬을 타고 관중을 매료시키는 또 다른 하나의 선율이 극장 안을 휘감아 돌았다.
단3도의 간지러운 화음이 애잔한 선율을 타고 물 흐르듯 흘러갔다.
저 어린 소녀들을 도대체 어떻게 지도하였으면 이토록 지휘자와 반주자와 단원이 모두 하나가되어 완전무결하게 합창을 할 수 있도록 한단 말인가?
나는 지휘자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신들린 듯한 손놀림으로 노래하는 모든 단원들 한사람 한사람을 마음대로 조정하는 마술사와 같은 위력에 매료되어 셈여림, 점점 세게와 점점 여리게 등을 요구하는 사인을 활동사진을 찍듯이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뇌리에 입력시키고 있었다.
......................
임실 초등학교의 합창이 끝나자 온 장내가 술렁이며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나도 진심에서 울어 난 박수를 힘차게 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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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 초등학교에 이어서 출전한 관촌초등학교 역시 임실 초등학교와 비슷한 수준의 합창을 하여 주었다.
관촌초등학교의 자유곡 '여행자의 노래'는 깨끗하면서도 힘차게 진행되었다.
관촌초등학교는 노래의 중간 부분부터 합창단원들의 신체율동을 곁들여서 노래하였다.
예쁜 소녀 천사들이 앙증맞은 두 팔을 90도로 꺾어 허리에 붙이고 줄줄이 엇갈리게 발걸음을 한 발씩 옮겨가며 대형을 바꿔 가며 노래하였다.
짧은치마가 리드미컬하게 찰랑거리며 이 아이들의 노래를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무엇보다도 더욱 인상 깊은 것은 한 결 같이 환한 웃음을 머금고 노래하는 모습이었다.
지휘하는 선생님도 언뜻 언뜻 보이는 옆모습이 아이들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것이었다.
쳐다보는 나의 마음도 이들의 표정에서 맑고 환한 기운이 전달되어 명랑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을 즐겁게 떠돌아다니는 여행자의 밝고 즐거운 마음이 이들의 노래와 표정에서 저절로 울어 나고 있었다.
'아-- !' 나는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윤선생이 감탄한 듯 나를 쳐다보며 웃었다.
"너무 잘하지?" 속삭이듯 내가 말하자
"정말 너무 예쁘고 잘하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
관촌초등학교의 차례가 끝나고 드디어 우리 '깨구락지 합창단'의 차례가 되었다.
장내 스피커에서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다음은 학석초등학교의 차례입니다. 정 익훈 선생님께서 지휘하시고 윤 성희 선생님께서 반주를 맡으셨습니다. '노 귀례'외 39명 입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관촌초등학교의 합창단이 내려오는 동안 무대에 오를 준비를 서둘렀다.
의외로 마음이 담담해졌다.
나는 아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나지막한 소리로 당부하였다
"얘들아 조용히 올라가고 맨 앞줄의 중간에 한 줄로 반듯이 서고 다음 줄은 그 뒤에 줄맞춰서 잘 서라잉?"
"예"
우리 아이들이 무대 위에 오르기 시작했다.
검정 통치마에 버선을 신은 '은희'가 맨 앞에 오르고 뒤를 이어 각양각색의 패션들이 무대 위에서 줄을 서기 시작하였다.
장내는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손가락으로 무대 위의 아이들을 가리키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무대 조명이 밝아지고 코빼기 고무신과 버선, 짝 틀리는 양말, 긴치마 짧은치마, 무릎을 기워 입은 검정 바지, 단발머리, 양 갈래 머리, 밭고랑 대머리, 들이 아낌없이 노출되어 보였다. 나와 윤선생이 맨 나중에 무대 위에 올라갔다.
윤선생은 피아노 옆의 작은 풍금에 앉고 나는 아이들 앞에 서서 보았다.
우리 아이들은 넓은 무대의 뒤편 벽 쪽으로 너무나 치우쳐 있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합창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두 손을 들어 손바닥을 나의 얼굴 쪽으로 까딱이며,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고서 속삭이는 소리로 명령하였다.
"세 발, 세 걸음 앞으로 가"
나는 뒷걸음질을 치며 아이들을 끌고 나오려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무대 앞쪽으로 나오는 것이 몹시 두려운 듯 조금 밖에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는 이쪽으로 더 나오라는 뜻으로 무대 중앙의 아이들을 향하여 오른 손을 까불었다.
아이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등 뒤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아이들 쪽으로 걸어가서 중앙의 기준이 되는 '강수'의 어깨를 잡고 앞으로 끌고 나왔다.
'강수'의 양쪽에 서 있는 아이들이 주춤 주춤 끌려오는 듯 별 수 없이 앞으로 나왔다.
낯선 사람에게 끌려가는 강아지의 모습과 같았다.
맨 뒤쪽의 아이들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시간을 끌 수가 없었다.
나는 무대 중앙에서 세 걸음 정도 물러서서 전체가 보일 수 있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나서 윤 선생에게 반주를 해도 좋다는 눈짓을 보냈다.
윤선생의 반주가 나오지 않았다. 두 손을 엉거주춤 이마 앞에 들고 있던 나는 윤선생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윤선생은 반주를 하려 하지 않고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는 듯 위아래 이빨이 다 드러나도록 입을 옆으로 벌렸다가 턱을 밑으로 '이--아 -'하고 벌렸다.
나는 그 표정의 뜻을 빨리 알아내려고 온 정신을 집중하였다.
'-이 아 -' 이게 무슨 뜻일까?
순간 이마에 땀이 벌컥 솟구치며 '아 ! 그렇지 !' '인- 사-'
인사를 빼 먹었다. 아이들 줄 세우느라 인사를 깜박 잊어 먹었었다.
나는 얼른 뒤로 돌아서 깊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또 한 번 크게 관중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다시 한 번 윤선생에게 눈짓을 보냈다. 가냘픈 풍금 소리가 울려 나왔다.
다른 학교 합창단의 피아노 반주 소리에 그 동안 귀가 익었던 나에게 풍금 소리는 너무도 가냘프고 작게 들렸다.
노래가 시작되었다.
둔탁하고 힘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꼭꼭 숨어라 --' 머리카락 뵐라 ' '꼼짝 말 --고 있거라 --'
아이들의 큰 목소리에 반주 소리가 묻혀 버리고 말았다
노래의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반주곡의 소리가 잘 안 들려서인지 아이들이 당황해서인지 갑자기 노래가 빨라지기 시작하였다. 템포를 늦추려고 지휘하는 손을 좀 더 크고 천천히 움직여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번 빨라진 노래는 가속도가 붙은 수레가 언덕을 굴러가듯 점점 더 빨라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이마에 땀이 바짝 솟아 나오고 전신이 긴장되며 등줄기에선 식은땀이 쪼르륵 쪼르륵 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떻게 통제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반주는 반주대로 지휘는 지휘대로 제 각각 엉망진창이 된 체 걷잡을 수 없이 노래는 흘러갔다.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 흘러 지정곡이 끝났다.
'휴--' 한 숨이 절로 나왔다.
노래가 끝나자 아이들은 눈이 똥그래져 가지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기들도 잘 못 불러서 엉망이 되어버린 것을 느끼는 모양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윤선생에게 자유곡의 전주를 부탁하는 눈짓을 보냈다.
자유곡 '희망의 속삭임'이 시작되었다.
'거룩한 천사에 으--ㅁ 서--ㅇ 내-귀를 두드리네----'
시작은 그럭저럭 음정은 맞았으나 씩씩한 군가를 부르듯 아이들의 목소리는 탁하기 그지없었다.
아이들의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지며 씩씩해져 갔다.
그러더니 노래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음정이 쳐지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열심히 불러댔다.
신이 나는 듯 제법 자신감에 부푼 듯 첫 박자에 꽁꽁 힘을 주며 고개까지 끄덕거리며 '꽥꽥' 소리 질러 열심히 불러 댔다.
나는 이 아이들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자신은 이러한 무대 공연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며 신나는 일이겠는가?
'좋다! 좋아! 우리 귀여운 깨구락지들아! 마음껏 소리지르다 가자꾸나!'
아이들의 소리만큼 나의 손놀림도 힘차게 움직여 주었다. 나의 손이 활기가 붙자 덩달아 신이 난 아이들은 더욱 신이 나서 '고래고래' 고함치듯 소리를 질러댔다.
드디어 노래가 끝이 났다.
나는 아이들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웃음띤 얼굴로 ‘잘했다!’고 짧게 칭찬했다.
뒤돌아서서 인사하기가 쑥스러웠으나 용기를 내어 군인처럼 씩씩하게 뒤로 돌아 섰다.
깊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무슨 의미였을 지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박수 소리에 고무된 아이들은 상기된 얼굴로 만면에 열적은 웃음을 띠고 제법 으스대면서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장내의 모든 사람들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며 웅성거림과 소란스러움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아이들이 제자리에 들어가 앉자 나는 밖으로 나와 출입구 밖 계단에 걸터앉았다.
시원한 바깥 공기가 허파 깊숙이 스며들며 정신이 맑아졌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를 허파 깊숙이 빨아들였다.
정신이 아찔하며 눈앞이 핑 돌았다.
온 몸이 가볍게 저리며 니코틴의 쾌감이 전신에 퍼졌다.
평생 피워 본 담배 중에 가장 좋은 담배 맛이었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힘껏 웅크려 등줄기의 근육을 이완시켰다.
장내에서 다음 학교의 합창 소리가 꿈결처럼 들려 왔다.
..............................
합창 대회가 끝났는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우리 아이들이 나의 주위에 뺑 둘러섰다.
나는 웃으며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우리 잘 했지라우?."
"우리 맷등 했어라우?"
"잘 혔을 것이여!-- 젤로 꼴찌가 4등인디 4등은 혔겄지!"
"딴 학교는 너무 간살시럽게 부르더라잉?"
.........
"정 선생님 ! 그 동안 수고가 많이 하셨어요!" 윤 선생이 나를 위로 하여주었다.
그녀는 미소를 띠고서 나를 보고 있었다.
"윤선생이 정말로 애썼지!"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자! 이제 학교로 돌아가지!"
나의 이 말에 아이들이 일제히 항의하듯 말하였다.
"선생님! 인제 곧 무용 대회 헌대라우!"
"무용대회 보고 가요!"
................
윤선생은 나의 기분을 알겠다는 듯 말없이 나의 결정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선생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 때 확성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장내에 학석초등학교 합창단 지도 교사는 방송실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학무과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
..............
나는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아이들과 윤선생을 그곳에 머무르게 하고 방송실로 향하여 걸어갔다.
나는 왠지 모를 두려움으로 가슴이 '콩당콩당'뛰고 있었다.
합창대회를 망쳐놓았다고 야단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어두컴컴한 무대 옆 통로를 걸어 방송실로 향하는데 방송실 문이 열리더니 몸집이 크고 머리카락이 허연 '오 태엽' 학무과장이 손에 든 종이를 들여다보며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의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저 -- 저를 찾으셨습니까?"
나를 만난 그는 걸음을 멈추고 두툼한 돋보기안경 위로 눈을 치뜨고 바라보더니
"아! --선생님이 학석의 '정 일웅' 선생님 이십니까?"
"예! 그...그렇습니다만 -- 어떤일로 --.........."나는 머뭇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그는 종이쪽지를 양복 주머니에 접어서 넣고는 두 손으로 나의 오른 손을 덥석 잡았다.
"원 세상에 .....! 세상에 ..........학석에서 합창을 나오다니 ........"
그는 나의 손을 놓지 않고 계속 흔들면서 '세상에.....! 이런 세상에......' 소리만 연발하고 있었다..
그의 손은 자라 몸집처럼 두터웠고 따뜻하였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사랑 어린 동정심과 애처로움이 서려 있었다.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후에 그가 말문을 열었다.
"정 선생! 지금 아이들 어디 있지?"
그의 말투가 금 새 다정한 형님이나 아저씨처럼 바뀌고 그의 팔은 나의 어깨 위를 감싸고 있었다.
"지금 돌아가려고 밖에 모여 있는 데요-"
나의 이 말에 그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 아! 아니 지금 돌아가지 말고 잠깐 ...... 아 아니 ........저 정선생 ! 아이들 모두 몇 명이지?"
"40명인데요!?"
나의 대답에 그는 나의 등을 밀며 극장 밖으로 걷게 하면서 말을 계속하였다.
"아이들 점심을 내가 사줄 테니까 먹고 가도록 하고 3등 상장을 두 장 만들도록 하였으니까 상장도 받아 가지고 가도록 혀!"
“극장 앞에 저쪽 사거리 옆에 가면 ‘갑원’이라는 중국집이 있으니까”
“지금 애들 데리고 거기 가서 짜장면 하나씩 맥여....”
“내가 전화 해 놀테니까”
................
나는 그야말로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과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과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감사와 감동을 가슴 깊이 느끼며 깊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였다.
학무과장의 마음속에 하느님이 숨어계시는 것 같았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 마음속에서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나왔다.
......................
학무과장님이 전해준 말을 들은 윤 선생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진정으로 기뻐하는 그녀의 표정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
임실에서 유명하다는 ‘갑원’이라는 중국집이다.
짜장면을 처음 먹어 보는 아이들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몇몇 아이들은 입가에 온통 짜장 범벅을 하고서 누런 코가 섞여 들어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
무용대회까지 끝나고 시상식이 시작되어
합창대회 3등 상장을 받았다.
돌아가는 나와 윤선생의 발걸음은 개선장군처럼 가슴 뿌듯한 감회에 벅차 있었다.
득의양양한 아이들은 갈담까지의 버스 안에서와 학석까지의 시골길에 시끌벅적한 웃음소리와 고함소리를 흩날리며 내달렸다.
"우리 깨구락지 합창단이 임실군 전체에서 3등혔다.!"
아이들이 지르는 고함소리는 필봉을 거쳐 윗 밤재까지 메아리치며 울렸다.
산속의 나무도 새도 하늘의 구름도 골짜기의 바람도 모두 우리를 축하해 주고 있었다.
깨구락지 합창단을 이끌고 갔던 그날의 추억은 영원히 나의 가슴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이 되어 간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