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윤 정자’ 선생님
‘윤 정자’ 그녀는 연령 미달로 나보다 한 달 늦게 학교에 발령을 받았었다.
그녀가 우리학교로 발령을 받았다는 통지를 받고서 나의 맘 속 엔 반가움과 함께 야릇한 고소함이 일고 있었다.
그녀는 함께 학교에 다니던 동안 줄 곳 나와 같은 반이었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녀는 꿈의 궁전에 사는 공주였고 그 누구도 함부로 접근 할 수 없는 경계선이 쳐진 그런 특별한 학생이었다.
그런 여학생이 이와 같이 초라한 학교에서 어떻게 근무를 할까? 생각하니 너도 별수 없는 '나와 같은 인간이었구나' 하는 마음의 동질의식을 같게 되면서 고소하기도 하고 한편 측은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처음 학교에 오던 날 나는 새로운 나를 발견하였다.
그녀는 이미 학창시절의 공주님이 아니었고 처량하게 날아와 내 품에 안긴 한 마리의 참새와 같았다.
나는 그러한 그녀를 보호하고 지켜줄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학창 시절에는 감히 근접하지 못하였던 그녀가 학교를 향하여 언덕을 걸어서 올라오는 것이 보이자 나는 슬리퍼를 신은 채로 뛰어나갔다.
"윤 정자 선생님! 어서와 ! 발령받을 것 축하해!"
사실상 나는 그녀와 2년을 학교에서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였지만 처음으로 말을 거는 거였다.
나의 반기는 말에 그녀는 시큰둥한 낯빛으로 반응하였으며 싸늘한 미소를 띈 얼굴에 실망과 분노가 범벅된 표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듯 허탈한 발걸음을 저벅저벅 내딛고 있었다.
그녀의 감정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는다.
나는 어찌 하였던가 부임 거부를 하려고 사흘이나 집에서 뒹굴고 몸부림을 치지 않았던가.
"너무 실망하지마!"
"............................."입이 불어터진 그녀는 말이 없었다.
"나도 처음에는 이곳이 너무나 싫었어! 그래도 그냥 있어보니까 괜찮은 점도 있어!"
".........그러면 댁이나 오래 있어요!"
그녀는 나의 이름도 모르는지 나를 '댁'이라 불렀다.
"............."
그 말에는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넌 이미 발령을 받았고 너를 보호할 사람은 그래도 나밖에 없음을 알아라. 흐흐흠..... )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리고 솔직히 즐거웠다.
콧대 높은 공주님과 함께 근무를 하다니 꿈같은 일이 아닌가?
그녀는 학창시절에 느끼던 그녀와는 달랐다
여성다움과 정숙함이 그녀의 품위를 격상시켰으며 쉽게 접근 할 수 없도록 보이지 않는 방어벽이 되어 그녀를 지켜주었다.
그녀는 일단 '용동'마을의 '조주사(조병용씨)집에 자취방을 얻고 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직장에서 같이 생활하게 된 이상 그녀는 나 외에 다른 교사에게 도움을 청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나 보다.
나는 그녀에게 갖가지 공문의 처리와 교실 환경정리, 그리고 교실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하여 나와 많은 상의를 하였고 나는 친절히 그녀의 상담자가 되어 주었다.
암울했던 학창시절을 지내던 나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여 그 동안 감춰지고 짓눌린 나의 잠재력을 마음껏 발산하며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한 패기와 용기로 의기충천하여 있었다.
................
합창대회로 더욱 친하게 된 우리는 스스럼없는 오누이처럼 가까웠다.
가정방문을 하는 시기가 돌아오면 나는 그녀와 함께 다녔다.
겨울이 되었다.
학석은 다른 곳보다 겨울이 한 달은 더 빨리 왔다.
종관이와 종석이는 6학년과 4학년인 형제간이었다.
종관이는 내가 맡은 반이고 종석이는 윤선생 반이었는데 하루는 초대가 왔다.
집에 잔치가 있었으니 식사라도 꼭 대접하겠다고 들려 달라는 것이었다.
윤선생은 내가 같이 간다면 가고 싶다고 하였다.
우리는 종관이를 따라 방문 길을 떠났다.
발이 빠른 종관이는 저만치 앞서서 올라가고 있었고 길이 휘어져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기다렸다가 우리가 보이면 또 쏜살같이 뛰어가곤 하였다.
(짜식 우리 둘이서 손이라도 잡고 올라오는 것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거지? 싹 수 있다 너!)
그 집은 윗 밤재의 맨 꼭대기에 '강대울'이라는 지역으로 마을에서 산으로 한 참을 올라가야 도착을 할 수가 있었다. 추운 날씨이지만 땀이 흐르고 오랜만에 하는 등산이라서 허벅지가 팍팍하였다.
가파른 길에서 나는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끌어 주려고 손을 내밀자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녀는 내 손을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전달되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계속 잡고 있었다.
................
깜짝 반기는 '종관'이 어머니의 안내로 문간방에 들었다.
"아이고! 어서오세요 선상님들! 이렇게 산꼭대기까지 오시라고 혀서 미안 혀서 어쩐대요!"
산골의 오두막집 문간방은 무척 따뜻하였다.
홍시감, 인절미, 고사리 나물, 머우대 나물, 토란국, 호박말랭이나물, 더덕주, 식혜, 고등어 구이, 쌀밥,............많이 먹고 술도 적당하게 취하였다.
시간이 늦어져도 좋았다. 늦어질수록 더욱 좋았다.
나는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맥없이 즐거웠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
창밖이 어둑해 지고 호롱에 불을 밝혀야할 즈음 소변이 마려웠다.
그녀도 나와 같았나 보다.
나는 그녀에게
"화장실 가고 싶지?"
"............."그녀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을 밀어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는 어느덧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언제 왔는지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누군가가 우리의 신발을 한쪽에 세우고 신발에 눈이 맞지 않도록 키를 벽에 기대어 신발을 덮어놓았다.
눈 위를 스치는 찬바람이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히야!"
나는 탄성을 질렀고
"어머! 어떻헌데!"그녀는 걱정을 하였다.
"여기서 주무시고 가시기라우"
종석의 어머니는 우리가 머물기를 권하였다.
"안돼요 가야해요!"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정색을 하고 말하였다.
마당을 건너 삽장문 옆에 있는 곳간 같은 화장실로 그녀를 안내하여 일을 보게 하고 그녀의 소변이 잿간에 떨어지는 소리를 나는 듣고 있었다.
그녀가 나오고 내가 들어가 굵은 줄기의 오줌을 벽에 쌓인 잿더미에 내 갈기고 시원한 몸이 되어 밖으로 나왔다.
"선생님! 우리 빨리 가게요!" 그녀는 호들갑을 떨었다.
눈이 쌓여서인지 방안에서 생각하던 것보다는 어둡지 않았다.
만류하는 '종관' 부모의 권유를 부드럽게 사양하면서 가느다란 새끼줄을 가져오게 하여 신발과 발등을 칭칭 감았다.
윤선생의 구두를 새끼줄로 감아 주면서 여자치고는 발리 꽤나 크다는 생각을 하였다.
발목만큼 쌓인 눈 덮인 산길을 미끄러지며 넘어지며 신나게 내려 왔다.
내가 앞서가며 길을 내었고 그녀는 나의 뒤에서 따라 내려왔다.
희미한 눈빛을 의지하여 산길을 내려오는 젊은 남녀의 환상적인 산행이었다.
"아야!" 그녀의 비명이 바로 뒤에서 들렸다.
그녀가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뒤로 돌아가 겨드랑이 사이에 두 손을 넣어 그녀를 일으켰다.
뭉클한 젖무덤의 부드러운 감촉이 전달되었다.
너무나 신이 났다. 공주님의 젖무덤! 그 근처에 나의 손을 댄 것이다.
비록 두터운 코트의 위로 전달되는 느낌이었지만 그토록 짜릿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와 느낌이 다른 듯 아무렇지도 않게 나의 부축을 받으며 산을 내려 왔다.
난생처음 느끼는 여인의 감촉이었고 짜릿한 흥분이었다.
그녀는 나의 이런 감정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용기가 없는 내 자신이 병신처럼 느껴졌다.
만일 그때 나의 사랑을 고백하고 그녀의 입술이라도 정복하였더라면 나의 인생은 전혀 지금과 다른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입맞춤은 영화에서 배우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았고 남녀의 성(性)에 관해서 나는 완전 백지상태였다.
나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나쁘지 않았다.
나는 그녀와 같이 그녀의 할머니가 계시는 집에 자주 들렀었고
그녀와 함께 내 식구들이 살고 있는 초라한 집에까지 같이 온 일도 있었다.
그녀는 오수 초등학교로 나는 임실 초등학교로 우리는 동시에 학석초등학교를 떠나왔다.
그녀가 오수에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이웃집의 총각 한 사람이 저녁때만 되면 그녀의 퇴근길을 지키고 서 있다가 따라다니면서 결혼하자고 괴롭혀서 힘들다는 말을 내게 전화로 알려왔었다.
어느 토요일 아침 일찍 내게 전화가 왔다. 일과가 끝나는 대로 급히 만나고 싶단다.
버스정류장에서 만나본 그녀의 모습은 피곤해 보였으며 밝은 표정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본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고 뭔가 좋지 않은 일이 그녀에게 있었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았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냇가 둑길을 한참이나 거닐었다.
...................................
가다가 다시 돌아서서 전주행 버스를 탔다.
서학동에서 내려 가까운 치명자산에 올라갔다. 산에는 인적이 없고 우리는 양지바른 바위 밑에 잔디 위에 앉았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바로 어제 학급 사무정리를 하고서 늦게 퇴근을 하는데 한적한 곳에서 숨어있던 바로 그 녀석이 그녀를 강제로 길가의 야산에 끌고 가서 폭행을 하려고 온갖 폭력을 다 행사한 모양이다.
여기저기 팔뚝과 다리에 멍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계속 해서 말하며 거의 울먹이는 하소연을 하는 것이었다.
............
"그래도 제가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선생님은 믿을 수 있죠?"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저는 당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어요"
그녀의 자기 방어력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 난 윤선생을 믿어! 믿고 말고 ! 윤선생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나는 다 알고 있어 걱정하지마!"
"그럼 전 이제 어떻해야 해요?"
나를 자기의 구원자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
아! 나의 가슴은 터질 듯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나에게 구원을 청하는 여인이 있다니.......
"걱정하지마 내가 녀석을 만날 거야! ....... 윤선생하고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니 한번만 더 괴롭히면 죽여버린다고 할거야!"
"..................."
" 내일 당장 처리해 줄 테니까 안심해!"
그녀는 순간 표정이 밝아지며 웃음을 띄었다.
"...약혼자라고요?....그러다가 진짜로 그렇게 되면..........어....떻....하..지..?.....그래도 괜찮지만.....흐~흥~!"
말끝은 웃음으로 흐려지며 살며시 그녀의 몸이 나에게 기우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순간 그녀를 꼭 껴안지 않을 수 없었다.
신기하리 만치 그녀는 저항하지 않고 한참이나 나의 품에 안겨 있었다.
행복감이란 이런 것일까?
사랑하는 연인의 포옹이 이렇게 달콤한 것일까?
그녀의 등위에 올려 진 나의 손을 움직여 감정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화들짝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에서는 각가지 상상들이 어지럽게 내 자신에게 명령하며 괴롭혔다.
(지금이다. 지금 다시 그녀를 놓치면 영영 기회는 오지 않는다.)
(어서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하여라!!)
본능적 충동의 명령대로 행동을 하기엔 나의 심장이 너무 빠르게 박동을 치고 있었다.
영화에서 배우들은 잘도 하더라만 내 자신이 키스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얼굴만 홍당무처럼 달아오르고 입가에 경련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의 어깨에서 가볍게 떨리는 전율이 전달되었다.
"지금 울어?"
"아-뇨!"
"그럼 왜 떨고 있어?"
그녀는 화들짝 몸을 세우고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쓸어 올렸다.
밝은 표정에 미소를 지으며 몸을 가다듬었다.
"우리 이제 집에 돌아가요!"
그녀의 몸이 나의 품에서 빠져나간 허전한 공간엔 후회와 허탈만이 가득 차 있었다.
...........
아뿔싸 또 놓쳤구나! 아! 언제 이런 기회가 또 오려나!
(‘윤 정자!’ 난 널 사랑해!)
(우리 그냥 결혼해 버리자!)
(.....병신아! 등신아! 빨리 말해!....)
나는 혀끝에서 빙빙 도는 말을 끝내 꺼내지 못하고 묵묵히 일어서 그녀의 손을 잡고 산을 내려왔다.
....................
다음날 오수에 사는 중학교 동창을 통하여 그 사나이를 시장 통에서 만났다.
내 친구는 당시 힘깨나 쓰는 당시의 오수의 '깡'이었다.
험상궂은 나의 인상과 내 친구에게 위압감을 받은 그는 다시는 그녀의 곁에 그의 접근하지 않겠노라고 약속을 하였다.
...................
그는 그녀에게서 쉽게 물러갔다.
............
그녀의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가야한다는 말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녀는 타 시도 전출 내신 원서를 내었고 운 좋게 서울로 전출을 갔다.
서울로 떠나는 기차역에서 그녀는 내게 전화를 했다.
"정 선생님! 그동안 정말 고마왔어요! 서울 가면 소식 줄게요!"
"그래 잘가!"
.....................
그녀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