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백내장
친목행사로 한 낮에 배구 시합을 하는 데 자꾸만 눈이 침침하였다.
햇빛은 쨍쨍한데 별일이다.
손등으로 문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교실에 들어가서 회식을 하는 동안엔 눈이 잘 보였다.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고 눈에 통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안과 병원에 들려 진찰을 받았다.
“언제 왼쪽 눈에 큰 충격 받을 일이 있었나요?”
..................
한 참 후에야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그렇다.
교생실습을 할 때 교생들 끼리 축구시합을 할 때 바로 내 앞에서 세게 찬 볼이 왼 쪽 눈에 맞아서 눈두덩이 붓고 며칠간 시력이 잘 회복되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
...............
"두 눈 모두 심한 백내장에 걸려 있습니다.!"
"백내장이라뇨??? 그게 뭐란 것인데요??"
"수정체에 단백질이 쌓여서 흐려 보이다가 그냥 오래 놔두면 실명하게 되는 병이지요!"
"???????............"
'실명?'
'내 눈이 ....실명이라니!!!!'
청천벽력이었다.
정신이 혼미하여 져 왔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처럼
암 선고를 받은 환자처럼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 절망적인 현실을 탈피할 방법이 없이 죽음의 계곡에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림을 그리는 내가 장님이 되다니
그렇다면 나의 교직 생활도 끝을 내야 한다는 말인가?
아내의 절망하는 얼굴이 눈에 그려진다.
어머니의 근심 띤 얼굴이 보인다.
아직 고물고물한 아들 셋의 얼굴이 떠오른다.
...........
간호수녀로 평생을 살아온 고모 수녀님 생각이 났다.
고모 수녀님은 얼마 전까지 서울 명동성모병원에 근무하시다가 울산 현대해성 병원으로 옮겼다.
명동성모병원이 안과 진료를 잘 한다는 소문을 들은 기억이 났기에
고모님께 전화를 하여 백내장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고모님은 나를 안심시키며 전화를 하여줄 터이니
서울 ‘명동 성모병원’ 안과 과장 의사님을 만나보라고 하였다.
....................
‘명동성모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사진촬영과 안압 등 여러 가지 검사를 마치고 수술 날을 잡았다.
의사선생님은 나를 안심시켰다.
'인공수정체'가 발명되어 이것을 눈 알속의 수정체와 교환하는 수술이라는 것이다.
한국에 들어온 지 아직 4-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수술결과는 부작용이 없이 무난하다는 것이었다.
아내와 함께 서울에 올라가 수술을 위하여 입원을 하였다.
..............
수술 전 공포에 질리던 것에 비하면 수술 그 자체는 간단히 끝났다.
요즘은 백내장 수술 후 바로 활동을 해도 괜찮을 만큼 발달 하였지만
당시에는 수술 후 머리 양쪽에 모래주머니를 받혀놓고 24시간 동안 머리를 움직이지 말라는 것이다.
머리를 움직이면 삽입한 인공수성체가 고정되는데 지장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머리를 24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지내는 것은 보통 힘 드는 일이 아니었다.
허리가 끊어지는 듯 아파왔고 물을 마시기도 음식을 먹기도 너무 힘들었다.
항상 옆으로만 누어서 잠을 자는 습관이 되었던 나에게는 잠자는 것도 불가능했고 나의 시중을 드는 아내 역시 내가 잠을 자는 동안 고개가 비뚤어 질 가봐 지켜보느라고 더욱 힘들었다.
일주일 후
수술한 왼쪽 눈에 사물이 흐릿하고 일그러져 보였다.
이렇게 보여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거 같았다.
의사 선생님은 수술 후 각막에 작은 주름이 생겨서 생기는 난시 현상임으로 걱정 말라 한다.
난시는 안경으로 교정한단다.
...............
퇴원 후 난시 안경을 맞춰 써보고서야 완전한 절망 상태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
일 년 후
강남성모병원 안과에서 오른쪽 눈의 백내장을 또다시 수술하여 두 눈 모두 인공수정체로 교환하였다.
우측 눈은 수술결과가 의외로 좋아서 1년 사이에 의술이 놀랍게 발전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오른쪽 눈은 거의 난시 현상도 거의 없이 처음부터 잘 보이는 것이었다.
이 때는 모래주머니로 고정하는 고통은 없었다.
석 달 후에 다시 ‘다 초점’ 안경을 맞춰서 썼다.
나의 교정시력은 거의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갔다.
................
건강에 자신이 넘쳐 바보처럼 마셔대던 술,
노는 분위기에 빠져 철없이 덜렁대던 나의 행위로 이리남중의 6년 동안에 큰 병을 두 번이나 앓고 말았다.
<원광대 교육대학원 합격>
박 기덕선생이 나에게 은근히 충고해 준 기억이 생생하여
그렇게 술을 마시면서도 남모르게 방송통신대학 공부를 꾸준히 하였다.
<시간이 없어서 못한다는 사람은 시간이 남아도 못하는 사람이다.>
나의 뇌리에 늘 담고 다니던 금언이다.
술은 술이고 내 할 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공부하자!’ 이렇게 다짐하고 요령껏 열심히 공부했다.
방송대를 다닌다는 게 자랑할 만 한 건 아니었다.
아무튼 되도록 남에게 들키지 않고 공부를 하였고
경제학과의 친구들과 함께 통신대학을 졸업한 것이 스스로 생각하여도 대견스러웠다.
초급대학인 교육대학만 나와서 원서를 낼 수 없다고 말을 차마 하지 못하였었지만 통신대학이라는 제도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대학원 가는 길을 가로막았던 ‘학사자격’이 생겼다.
원광대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에 원서를 접수하였다.
겨우 두 명만 뽑는 다고 한다.
지원자가 열 명 정도 되는 거 같았다.
면접관인 교수가 그림 때문에 자주 만나던 ‘이 창규’교수와 ‘이 중기’ 교수였다.
뜻밖이었다.
그들은 나보다 한두 살 적은 나이로 매우 겸손하고 착한 사람이었으며
중고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교수가 된 것으로 생각 된다.
엄청 반가웠다.
면접 도중에 그들은 호의적인 눈빛을 보내왔고
나와 ‘박 은미’라는 원대 미대 출신 여학생이 합격하였다.
대학원 합격의 소식과 함께 나는 발령을 받고 이리시를 떠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