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전주 풍남여자중학교 (현 : 솔빛중학교)
1990년 3월 1일 자 중등교사 인사발령내용이 신문에 실렸다.
“전주시 교육장이 지정한 중학교 근무를 명함”이라는 사령장이 왔다.
친구들이 교육청 장학사에게 찾아가서 좋은 학교에 발령을 받도록 부탁하라고 하였지만 아는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전주시에 있는 학교이니 어디가면 어떻겠냐는 생각에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다.
'풍남여자중학교 근무를 명함'
나와 함께 발령을 받은 교사는 모두 10명이었다.
‘김 상돈 ’
‘조 명희’
‘김 영구’
‘정 옥희’
‘김 양수’
‘박 채임’
‘김 용필’
.
.
전북의 중심 도시 전주에 근무하고 싶어서 몇 년씩 적어도 6년을 통근하거나 혹은 시골에서 자취를 하며 기다려 온 보람이 이뤄진 터여서 모두들 만족하고 있었다.
이곳은 규모가 큰 학교라서 미술교사가 나 말고도 두 명이 더 있었다.
‘라 동렬’선생과 ‘유 영곤’선생
모두 나보다 10년 정도 젊은 교사들이었으므로 나에게 형님이라 부르며 다가 왔기에 나는 어느 새 나이가 든 중년에서도 50대로 기울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며 마음속으로는 씁쓸했다.
이곳에서는 미술과목 외에 다른 과목을 겸하지 않아도 되었다.
‘유 영곤’ 교사가 근무하는 사무실에는
가정과 교사 ‘김 재봉’
도덕과 교사인 ‘강 란희’,
음악과 ‘정 영선’ 그리고 나까지
다섯 명이 작은 사무실에서 근무하였다.
정이 많은 김 재봉 선생님은 나와 각별히 친하게 지냈으며 지금도 가끔 만나서 식사를 한다.
작은 사무실이었지만 한쪽에 이젤을 펴놓고 ‘유 영곤’과 나는 그림을 그렸다.
‘유 영곤’은 수채화를 많이 그렸고 나는 유화를 그렸다.
남학생을 가르치다 여학생만 다니는 학교에 오니 분위기가 부드럽고 학생들의 감수성이 예민하였다.
여학생들이라서인지 나의 유머에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이들의 학습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나의 교수법이 잘 먹혀들어가서 재미있게 수업을 하였다.
이듬해에는 3학년 주임교사가 되어 3학년 9반의 담임이 되었다.
오랜만에 해보는 학급담임이었기에 나는 우리 반 학생들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았다.
실장 ‘이 하정’, ‘박 수경’,‘길 지인’, ‘김 현희’, ‘김 혜실’, ‘박 선영’ ‘김 현진’ ‘정 서린’ ....
귀엽고 깜찍한 50여명의 소녀들과 생활하던 그 시절은 하루하루가 기쁨의 연속이고 보람찬 나날이었다.
그 해 나의 생일날 직원조회를 마치고
학급조회를 하려고 막 교실 문을 열었을 때
출입문에서 칠판 주위와 교탁에 오색 풍선과 꽃들이 휘황찬란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선생님 생일축하 합니다.~~'
노래에 이어 박수와 환호를 지르며 나를 반겼다.
교탁에 작은 케익에 다섯개의 양초가 꽂혀있었다.
57명 학생 전원이 그림엽서에 사연을 적어 이 엽서들을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병풍처럼 만들어 선물로 주었다.
이 엽서를 읽다가 감격의 눈물이 쏟아지고 목이 메어 쩔쩔매던 그 순간......그립다.
우리 반 학생들이 나의 생일 날
종이학 1000마리가 담긴 유리병을 선물하였다.
눈물 나는 감동이었다.
그 학 천 마리는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
...
수경이는 서울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하정이는 서울대 의대에 들어가 서울대학병원 에서 내과 레지던트를 마치고
혜실이의 결혼에 내가 주례를 해 주었고......
‘길 지인’의 집 가까이 내가 이사를 와서 지인의 부모님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고 지인이는 물리치료사가 되어 서울에서 근무하고....
모두들 자기의 길을 따라 엄마가 되고
사회의 일꾼이 되어 잘 살아가고 있겠지
풍남여중에 근무하는 동안 성당에서 나의 역할이 또 하나 생겨서 내 인생에 잊지 못할 보람과 추억을 만들었다.
<성가대 지휘자>
풍남여중에 발령을 받고서 전주에 이사를 와서 남양 아파트 112호에 살게 되자
금암성당에 다니게 되었다.
금암성당은 아직 건물은 올라가지 않고 우선 지하실만 겨우 완성되어 옹색한 지하실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신자들이 자기 형편대로 성당을 짓기 위한 헌금을 하여 제법 성당다운 성당이 완성되기까지 2년 정도가 걸렸다.
나는 금암성당에 열심히 다녔다.
레지오 마리에에 가입하여 많은 신자들과 얼굴도 익히고 사목회에서 ‘교육부장’을 하였다.
‘김 영신’신부님께서 전근을 가시고 ‘왕 수해’신부님이 오셨다.
임실에서 나와 늘 함께 하던 신부님이었다.
무척 반갑고 기쁜 마음으로 성당에 더욱 열심히 다니게 되었다.
어느 일요일 오후
내가 사는 남양 아파트 101호에는 전주교대 2학년 다니는 ‘김 소영’이와 남녀 청년들 몇 명이 찾아왔다.
나는 ‘소영’이를 잘 알고 있고 또 나의 교대 후배인 관계로 친절하게 나를 방문한 까닭을 물었다.
“제가 금암성당 청년성가대 단장인데요 지휘자가 없어서 선생님께서 저희를 도와서 지휘를 해 주셨으면 해서 왔어요....꼭 들어 주셔야 해요....선생님 부탁해요.....”
“아니! 아닌 밤중에 홍두께라더니 이게 갑자기 뭔 말이야? 내가 어떻게 이 큰 성당에서 청년들 성가대 지휘를 해.....사람 잘 못 봤어~ 나는 미술선생이야....”
귀엽고 예쁘게 생긴 이 학생....쉽게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선생님! 저희들 다 알고 왔어요....”
“무얼 안다고 그래?”
“왕 수해 신부님께서 틀림없이 들어 주실 거라고 해서 왔거든요?”
“아니? 왕 신부님께서??????”
‘이것 참 야단이 났구나’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왕신부님께서는 나를 신임하시는데 거절하면 얼마나 실망하실까?’
생각해 보니 난감하였다.
하지만 깨구락지 합창단도 지휘를 했는데 이토록 멋있는 젊고 예쁜 대학생들과 청년들의 성가대를 지휘한다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일까?
그렇다고 자신 있게 승낙 할 일이 아니었다.
“소영학생!”
“네?”
“너무 갑작스럽고 당황스런 일이라서 생각을 좀 해보고 대답하면 안 될까?”
‘소영’이와 같이 온 청년들이
“잘 부탁드립니다.!”하고서 물러갔다.
저녁에 아내 ‘최 우남’에게 사실을 얘기 했다.
신부님께서 부탁하신 일을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느냐고 열심히 하면 나의 능력으로도 충분히 좋은 성가대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격려를 해 주었다.
신부님을 만나서 열심히 해 보겠다고 말씀드렸다.
신부님께서 무척 좋아하시고 고맙다는 말씀까지 하셨다.
금암성당 청년 성가대는 매주 금요일 밤 8시부터 성가 연습을 한다.
이들의 실력은 대단하였다.
그동안 익혔던 성가를 한 번 불러보도록 하고 들어보니 정말 훌륭한 성가대였다.
임실초등학교에서의 합창단을 지휘하는 것 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청년들의 4부 합창은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전 지휘자 ‘김 상훈’씨가 찾아와서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는 음악 전공자는 아니었지만 4부합창 지휘에 상당한 실력을 갖춘 음악인이었다.
나는 실제로 금암성가대원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며 지휘를 해 나갔다.
일요일 저녁미사에 입당성가, 시편성가, 봉헌 성가, 영성체 성가 퇴장성가, 그리고 미사 때마다 변함없이 부르는 미사곡 ‘기리에(자비송)’ ‘글로리아(대영광 송)’ ‘쌍뚜스(거룩하시다’) ‘아뉴스 데이(하느님의 어린양), 그리고 특송까지 연습을 하고 여기저기서 수집한 좋은 악보를 가지고 열심히 연습을 하였다.
나의 지휘 실력이 늘어가고 내 나름대로 곡상을 파악하여 지도 하였다.
성가연습이 끝나면 성당마당 앞 등나무 아래 벤치에 둘러 앉아 맥주 파티를 즐기는 것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었다.
또한 1년에 두 차례씩 성가대 야외 단합대회를 하는 날은 물놀이나 야영대회를 했는데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이 많이 생겼다.
1년이 지나자 어머니 성가대에서 지휘자가 갑자기 이사를 갔다면서 나에게 지도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약한 나는 차마 거절을 하지 못하였다.
주일의 교중미사에 어머니들과 남자 어른들이 하는 4부 합창 성가대였다.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부터 연습을 하는데 나는 풍남 여중에 근무하고 있을 시간이어서 처음에는 난감하였지만 교장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수요일 오전의 수업을 조정하여 시간을 내어 성당에 나와서 지도하였다.
일주일에 두 번 성가연습을 하고 주일이 되면 ‘교중미사’와 저녁 ‘청년미사’까지 지휘를 하게 되니 정말 나의 개인적인 시간이 없어서 불편하였지만 성가대를 지휘한다는 자부심과 또한 즐거움으로 7년 동안을 지휘를 하였다.
.......................
아!
4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까지의 인생 황금기를 여기서 갖가지 추억을 만들며 보내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 생각하니 아득한 세월이었다.
<승진의 꿈을 버리고>
풍남여중에 근무하면서 야간에 하는
원광대학교의 교육대학원을 다니며 대학원교육에 대한 새로운 분위기를 배웠다.
5학기 내내 모든 수업이 과제와 리포트였고 리포트를 발표하며 상호 토론하다가 교수가 마무리하는 게 수업이었다.
즐겁고 재미있는 가운데 5학기가 끝나고
한 맺힌 ‘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석사학위의 논문제목은
"학습 흥미 유발 방법에 관한 연구"
(중등학교 미술 교과을 중심으로).....였다.
평소에 내가 개발한 학습흥미 유발 방법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학습 효과를 검증한 논문이었다.
교수님들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주었다.
승진을 위한 연구점수 1점을 확보한 것이다.
나의 나이로 봐서 슬슬 승진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였다.
.................
풍남여중을 떠날 시기가 왔다.
다음으로 나는 어느 학교를 가야할 것인가?
승진을 위하여 벽지점수를 따는 곳으로 가야하는 것은 누구나 생각하는 일반적 사고였고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벽지학교에 쉽게 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서로 벽지에 가려고 경쟁하였고
벽지학교의 교장들은 자기가 잘 아는 사람들을 불러 오려고 노력하는 그런 시대였다.
아니면 그냥 승진을 포기하고 그림이나 열심히 그리며 화가로써의 길을 걸어가야 하나 ....
두 갈래 길에서 번민하고 있는데
순창교육청 학무과장 ‘김 용환’씨의 전화를 받았다.
최 우남과 상관중학교에서 행정실장을 할 때 그는 교감선생님으로 사이좋게 지내던 분이였다.
그는 미술교사 출신 선배로서 나와도 잘 아는 처지였다.
그가 순창군 학무과장으로 발령을 받고 떠난 직후의 일이었다.
순창군에 유일한 벽지학교인 ‘복흥중학교’에 미술교사 티오가 있으니 날더러 ‘희망서’를 내란다.
고맙고 반가웠다.
이어서 또 연락이 왔다.
진안군 학무과장 ‘김 규정’씨가 아내 ‘최 우남’을 통하여 연락이 왔다.
진안군에 유일한 벽지 학교인 ‘백운중학교’에 미술교사가 필요하니
그곳으로 내신 ‘희망서’를 써보라는 것이다.
권하는 장사 밑지는 일 없다고 생각하여
1희망을 진안군 중학교,
2희망을 순창군 중학교로 쓰고
나머지는
김제, 완주, 이리의 고등학교라고 기록하여 제출하였다.
이튿날 출근길에 친구‘ 이 영태’를 만났다.
‘
그는 전라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있었고 나에게 그림을 가르쳐준 유일한 친구며 훌륭한 화가였다.‘
이 영태와 나 사이에는 그야말로 막힘이 없이 모든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런 친구였다.
그의 아내 ‘진 용숙’과 ‘최 우남’도 친 자매처럼 잘 지냈으며 두 집안이 바로 이웃에 살았기에 더욱 가까웠다.
마침 나의 우울증 치료용으로 프라이드 승용차를 사서 운전하며 친구 이 영태와 같이 출근 할 수가 있어서 너무 좋았다.
나는' 풍남 여중', 이 영태는 풍남여중 바로 길 건너 학교인 '전라고등학교'의 미술 교사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날 아침 출근길에 그에게 나의 내신서 얘기를 했다.
이 영태는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했다.
"자네 그렇게 썼다면 정말로 ‘진안 백운중학교’로 발령을 받네!
그렇게 산골짜기에 들어가서 구차하게 근무하면서 꼭 승진을 해야 하겄는가?"
"이 사람아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다 승진도하고 그러데... "
그의 말을 듣고 나서 나는 그에게 대답할 말이 궁해졌다.
출근길에 옆 좌석에 앉아있던 영태가 하는 말이 송곳처럼 나의 자존심에 꽂혔다.
그렇지!
굴욕적인 생활을 감수하며 승진 하는 건 나에게 맞지 않아!
생각이 이렇게 바뀌고서 나는 그에게 말하였다.
'아 자네 말이 맞네 맞아! 당장 고칠 수가 있으면 고쳐야 하겄네'
.............
교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교감선생을 만났다.
“저 교감선생님!....'내신 서'를 다시 써야겠는데요...”
양 기현 교감은 의아하게 눈을 뜨며 내게 말하였다.
'어저끄 보냈는디 아직 '도 교육청'으로는 안 들어 갔겄구만 근디 왜 희망지를 바꿀라고 혀!! ?'
'암만 생각혀 봐도 나는 승진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아서
그냥 포기하고 고등학교로나 가서 그림이나 그리다가 그만 둘라고 그렁만요!!'
‘양 기현’ 교감선생님은 개인 신상문제라서 더 이상 말이 없었다.
....................
전주시 장학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박카스 두 박스를
사가지고 들어가 사정을 얘기 하였다.
전주시 장학사는
“그럼 바로 작성해서 오늘 오전 중으로 가져와얍니다...”
“오늘 오후에 도교육청에 들어가야 헝게요...”
“알겠습니다. 곧 작성해서 갖고 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서둘러 내신서를 고쳐 썼다.
제1희망지 완주군 고등학교
제2희망지 김제시 고등학교
제3희망지 익산시 고등학교
제4희망지 군산시 고등학교
제5희망지 남원시 고등학교.............
어느 곳 어떤 학교에 미술교사가 필요한지 전혀 알지도 못 한 채 그저 고등학교로만 발령을 받으면 그만이다는 생각이었다.
전출희망을 고쳐서 제출하고 나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아! 잘 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벽지학교에 가서 근무평정점수를 따기 위하여 동료교사와 아귀다툼을 하고 교장에게 살살이 노릇을 하며 아부하여야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소름이 돋았고
내가 산골에 묻혀서 주말에 한 번씩 집에 오는 그런 생활을 하게 될 때
아내의 고통을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었기에
휴~!하고 한숨이 나올 만큼 이영태의 충고가 고마웠다.
........................
........................
“어이! 자네 신문 봤는가?
축하허네 남원고등학교로 발령났구만!”
이영태는 아침 일찍 전화를 해 주었다.
기뻤다.
아! 남원고등학교면 통근도 가능하고
그림을 열심히 그릴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