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2. 2. 레지오마리에 교육}
파티마의 모후 꼬미시움주관
전주레지아 지도 신부 김광태 야고보 신부님의 강의
작년 9월이었습니다.
시골집 담에 커다랗게 익은 하얀 박을 봤습니다.
박 속에 수많은 씨앗을 영글게 하고 줄기와 잎은 모두 말라 죽고 말았습니다.
TV“동물의 왕국”프로에서 ‘연어의 귀환’을 봤습니다.
먼 바다에서 살던 연어는 알을 낳기 위하여 자기가 태어난 강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옵니다.
온갖 난관을 다 극복하고서 결국 자기의 고향에 돌아온 연어는 알을 낳고 자기의 몸으로 주위의 모래를 퍼 올려 알을 덮어줍니다.
굵은 모래와 자갈을 퍼 올리느라 꼬리 지느러미가 모두 망가지고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서도 연어는 알이 부화 할 때까지 떠나지 않고 있다가 결국 새끼연어의 밥이 되어주며 죽음을 맞이합니다.
동 식물은 왜 사는 것일까요?
자기와 닮은 생명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동식물은 후손을 남기면 삶의 목적을 다 이룬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 ‘천주교요리문답’ 제 1번은
문 1:‘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태어났느뇨?’
답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태어났느니라’
자기의 영혼을 구하는 것, 즉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말 할 것 없이 우리 신앙의 근본이지요.
루카복음 9장 25절 말씀에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버리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의 목숨은 ‘영원한 생명’을 말 합니다.
순교자들은 사는 동안에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이었고 목숨을 잃는다 해도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순교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을 만난 일이 있었던가요?
하느님께서는 정말 어떤 분이신가? 이것을 늘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마태오 복음 20장에 포도원 일꾼과 품삯을 하느님 나라에 비유한 말씀이 나옵니다.
품삯을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아침 아홉시부터 일한 일꾼,
열두시부터 일 한 일꾼, 오후 세시부터 일한 일꾼,
마감 한 시간 전인 오후 다섯시부터 일 한 일꾼.....
일이 끝나고 셈을 할 때
주인은 마지막에 온 일꾼에게 먼저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그 것을 본 다른 일꾼들은 모두 ‘나는 더 받겠구나’하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세시에 온 일꾼도 한 데나리온, 아침 아홉시에 온 일꾼도 한 데나리온 밖에 주지 않자, 일을 더 많이 한 일꾼의 마음에 불만이 생겨 받은 품삯에 대한 불만을 터뜨린다는 비유의 말씀....우리는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전주시에도 여러곳에 인력시장이 있습니다.
전주역 앞, 완산동 된장가게 옆, 서신동 화산공원 밑.....
그 곳에 나가서 보면 하루 품삯을 벌기 위해서 새벽부터 많은 사람들이 북적댑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 두 사람씩 팔려 나갑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꾼을 찾는 곳이 줄어들고 아직 팔리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의 초조한 시간은 그들의 절실한 마음을 더욱 옥죄어 옵니다.
‘오늘 어떻게 해서든 몇 푼을 벌어야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 있을텐데.... ’
기다리다 못해 포기하고 돌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혹시나 하며 마감시간이 될 때까지 초조하게 기다리는 일꾼의 절실한 마음은 얼마나 참담 할까요 .
하느님의 눈으로 본 정의와 인간이 생각하는 정의는 다릅니다.
일찍 나온 일꾼이 일을 하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신바람이 났을까요
“아! 오늘은 바로 일자리가 생겨서 얼마나 다행인가?”하면서 말입니다.
그랬으면서도 마지막 셈을 할 때에는 남보다 더 많이 받으려는 욕심이 생겼고 약속한 대로 주는 주인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바뀌고 맙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정의는
인간이 생각하는 시간 개념의 늦고 빠르고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정의로우시고 늦는 법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까지 제자들은 어떤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며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예수님은 숨을 거두셨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실망에 빠지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예수님의 부활로 제자들은 다시 용기를 얻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 세상에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요즈음
우리 레지오 마리에가 점점 고령화되어가고 쇠퇴해 간다는 소식에 접합니다.
하지만, 한국 초기 천주교회의 어려웠던 시절을 상기해야 합니다.
박해의 어려웠던 시절을 다 이겨낸 우리의 선조들....
늦은 시간까지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기다린 포도원의 일꾼의 마음....
하느님께서는 모두 기억하고 계십니다.
신명기 6장에
모세를 통하여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하시고 하느님께서 해 주실 것들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들도 돌아보면 하느님께로부터 이미 받았고 감사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지금 당장의 작은 갈등에서 하느님을 원망하지 말고
우리의 인생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정리해 봅시다.
나는 하느님께 무엇을 받았는지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께 선물로 받은 좋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그 선물을 다섯 가지 정도만 종이에 크게 기록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선물을 주신 주님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립시다.
그래서 골로사이서 3장 15절 말씀처럼“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레지오 단원 여러분
베드로전서 4장 17절에
‘심판의 때는 왔습니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계산을 할 때 우리의 마음을 잘 다스리고 있어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레지오 간부를 못하시겠다는 분이 계십니다.
하지만
“이렇게 늦게라도 하느님께서 저를 불러주시고 레지오 간부를 맡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하고 감사하십시오.
모세가 왕자를 때려누이고 도망갈 때가 40세 때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다시 부르신 때는 그가 80세 때였습니다.
힘이 다 빠졌을 때 하느님의 일을 더 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 여러분!
나이 든 사람에게 일을 맡긴다고 불평하지 말고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며 순종 하십시오.
“하느님!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저를 불러 시켜주심에 감사드립니다.”하고 말입니다.
교구에서
레지오 상황을 분석해 보면
분명히 <고령화> <쇠퇴기> <쁘레시디움 감소> <꾸리아 통폐합>이라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레지오를 활성화 시킬 수 있을까요?
레지오 활동, 개인의 기도, 교본연구, 레지오 교육, 단원 확보,....
우리가 무수히 다짐을 하지만 레지오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레지오는 교구사목의 전체입니다.
레지오는 교구 사목의 뿌리요 힘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의 기쁜 말씀으로 살아 갑시다”.
“부활시기가 없이 사순시기로만 살면 안 됩니다”
개신교에서 개종한 신자가 천주교의 특징이 뭐냐 하니까
“경건하다”라고 했답니다....이 말은 웃는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미사 끝나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미사가 끝나면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갑니다.
교회 안에서 기쁜 일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기쁘고 즐거워야 하는데 늘상 침울한 사순시기만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레지오 단원들에게 무엇을 처방해야 할까요?
정답은?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 들여라!”는 것일 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복음의 기쁨’이란 문헌에서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산에 토끼사냥을 갔을 때 사냥개를 풀어 놓으면
다른 개 들은 이러저리 뛰어다니다가 마는데
토끼를 잡으러 끝까지 달려가는 개가 있는데 그 사냥개는 어떤 개일까요?
그 개는 산토끼를 눈으로 본 사냥개입니다.
자기 눈으로 확실하게 봤으니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갑니다.
만일 이 자리에 ‘김연아’가 이 가운데 복도로 걸어서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을 어떠할까요?
모두 휴대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기도 하고 좀 더 잘 보려고 소란을 피우며 카톡으로 친구들에게 급히 연락하며
‘여기 김연아가 지금 왔으니 빨리와서 같이 보자! ’라고 문자를 보내며 호들갑을 떨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났다면 어떠할까요?
진짜 예수님을 만났다면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기쁨에 들뜨고 벅차오를까요?
남의 눈을 피해 살짝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 물을 달라고 청하자 그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임을 알아보고서 황급히 달려가 친지와 친척들에게 예수님을 알리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 감동의 행동.....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하느님을 새롭게 만나야 합니다.
성서를 읽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못 만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같은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곁에 두고도 못 만납니다
세리처럼 겸손하고 회계하는 마음을 가진 자 만이 하느님을 만납니다.
상식적 신앙에 안주하지 말고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우리는 죄에 묶여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강의를 건성으로 듣는 것
성경을 건성으로 읽는 것
성경을 아무리 필사를 해 봐도 하느님을 살아있는 분으로 만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개인주의적인 신앙이 가장 위험한 신앙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당에서 아무하고도 친하지 않고>
<혼자서 조용히 미사하고 집에 가는 신자>
<어떤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고 혼자서 기도하며 조용히 지내는 신자>
이런 신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서 교황님께서는
“백성을 이루어서 하느님을 만나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혼자서는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하느님 백성으로 되기가 어렵다”
“그런 사람은 결코 자기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함께 모이고 함께 성경을 읽고 함께 생각하여야 한다.” 고 하십니다.
제주도에가면
유명한 ‘용두암’이 있습니다....모양이 기괴하고 용처럼 생겼다는 바위입니다.
또한 바닷가에 ‘몽돌 해수욕장’이 있습니다.
몽돌해수욕장의 바위들은 모두 둥글둥글 아름답게 다듬어져있고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용두암은 혼자 있기에 그토록 기괴하고 험하지만
몽돌해수욕장의 돌들은 수백수천개가 모두 모여 파도에 밀리다가 그토록 아름답고 곱게 다듬어 졌습니다.
우리도 몽돌처럼 서로 의지하고 서로를 어루만져 신앙인의 모습이 아름답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님께서는
성경을 스스로 묵상하신 말씀으로 강론을 하시어 듣는 모든이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십니다.
하지만 그 주교님께서 본당을 순방하실 때는
신자들의 신앙체험담을 들으시며 무한한 감동을 받는다고 고백하십니다.
햇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빨’‘주’‘노’‘초’‘파’‘남’‘보’의 아름다운 무지개 색으로 분광이 되듯, 성격과 환경이 다른 사람들이 모인 소공동체에서 성서를 읽고 묵상을 나눌 때 우리들은 새롭게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가만히 앉아서 기도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을 찾아서 나가라.
어려운 이를 찾아서 나가라.
거기에 가야 더 많을 것을 배우고 치유받게 된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의심으로 가득차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마태오복음 28장 17절에서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절하는 열한 제자들 중에서도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세례를 베풀고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의심이 있던 그들도
세상에 나가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다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참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번에 강정 마을에 가서 직접 그들의 모습을 보니까 저절로 기도가 나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 레지오 마리에 단체는 하느님께 바칠 것이 있는 단체가 되어야 합니다.
성 베네딕토 수도원의 현판에는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레지오마리에 단원으로서 살아옴에 자부심을 가지고 생활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총을 조목조목 써놓고
늘 감사하고 묵상하며 살아가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활동합시다.
우리가 만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고 물으신다면
우리가 사는 모습을
“가서 봅시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살아갑시다. 아멘
<신부님의 강의를 듣고 메모한 것을 옮겨 봤습니다만 내용상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이해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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