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웅 찻집
등대찻집에 오심을 환영합니다.

풍란처럼 살아온 나의 이야기/11. 전주교대 입학 시험

11.전주교대 입학시험과 졸업까지

정일웅 찻집 2016. 7. 6. 14:14

11. 전주교대 입학시험과 졸업까지

 

입학시험을 보러가는 날 그 날은 무척 날씨가 차가왔다.

매형은 나에게 자기의 닭털 점퍼를 벗어주며 "따뜻하게 입고 시험 잘 봐" 하며 격려하여 주었다.

학과시험을 치렀는데 그다지 어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수학시험이 자신이 있었고 영어도 쉬웠다.

 

그러나 내가 쉬우면 누구나 다 쉽지 않겠는가?

1차 합격을 하는 것만도 3.71의 경쟁인데.... 걱정도 되었지만 운명에 맡기기로 하였다

 

1차 시험(학과) 결과를 발표하는 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나는 혹시 떨어졌을지 모르는 불안감 때문에 합격자 명단을 붙인 교육대학의 교문에 가기가 싫었다.

소주 한 병을 사다가 깡 술로 마시며 방구석에 앉아있었다.

'조 길동'이가 찾아와서 큰소리를 지르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 일웅아! 너 임마 축하한다. 합격했다.!"

"내가 금방 보고 왔는데 너 임마 합격할 줄 알았다."

그는 나의 합격이 자기의 합격이나 되는 양 무척 기뻐하였다.

길동이는 나와 함께 교육대학교에 갔다.

 

1차 합격자 400명 명단에 나의 이름이 있었다.

가나다 순으로 적어 놓은 이름 속에 금방 나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

며칠 후에 마지막 관문인 음악 미술 체육의 이론과 실기시험이 있다.

1차 합격자 400명 중에서 200명만 뽑는 21의 경쟁이기에 여기에서 중간을 넘어야 겨우 합격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담담하였다.

1차 시험에 합격한 것만으로도 나의 할 일은 다하였다는 생각이 들었고 2차 시험에 대한 공포감이나 두려움이 내 마음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 신기하였다.

첫 날엔 이론 시험이었다.

모두 기초적이고 상식적인 내용이었다.

 

실기 시험을 보는 날이 왔다.

실기 시험은 3일에 걸쳐서 실시되었다.

 

첫날은 음악 시험이었다. 교문에 들어서서 보니 많은 학생들이 히말라야시다 나무그늘과 벤치와 화단사이의 길을 조금 이상한 손놀림을 하고서 걸어 다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전주고등학교나 전주상고 전주공고 신흥고 등의 학교학생들로써 같은 학교출신의 친구끼리 삼삼오오 뭉쳐 다니면서 무언가 연습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영생학교에서 홀로 온 외톨이로서 그 누구도 나와 대화할 상대가 없었다.

군중 속에서 실로 고독한 신세였다.

 

그들의 대부분은 양손을 풍금을 치듯 90도로 꺾어 배 앞으로 내밀고 손바닥을 땅으로 향한 채 왼손의 손가락을 쫙 펴고서는 새끼손가락과 엄지와 장지를 번갈아 구부렸다 올렸다 하기를 계속하고 오른손은 어둔하게 움직이며 무슨 말인지 혼자서 시부렁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짓을 하고 다니는 게 한 두 명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마치 팔 병신같이 그러한 모습을 하며 돌아다녔다.

 

나는 그들의 그와 같은 손놀림이 올겐을 연주하며 노래하기라는 오늘의 시험문제를 위한 연습임을 알았고 그들의 노래는 간단한 동요라는 것도 알았다.

 

전주고등학교의 수험생들은 '그 집 앞'을 주로 연습하였고 상고의 수험생들은 '학교 종' 또는 '산토끼' 등등을 교육대학 특별 반 수업시간에 배운 것들이었다.

나는 그와 같은 손가락의 움직임에 대한 의미를 모르는 채 그냥 내 식으로 시험을 보리라 마음먹었다.

별로 떨리지도, 긴장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오늘 수험생들은 음악 강당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방송이 스피커에서 울려왔다.

나의 수험번호는 36번이었다.

강당에는 무대 앞좌석의 오른 쪽에서부터 차례로 번호표가 붙어있었고 나는 앞에서 3번째 줄에 앉았다.

 

1번부터 차례로 무대 위에 올라가서 피아노 또는 오르간을 선택하여 자리에 앉고 자기가 준비한 노래를 악기를 연주하면서 악기 소리에 맞춰 노래 부르는 시험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화단 사이 길을 오가면서 연습하던 그 어설픈 손놀림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토끼 토끼야--, -디를 가느냐--' 노래에 맞춰 손으로는 다장조의 으뜸화음과 버금딸림화음, 그리고 딸림화음을 분산화음으로 눌러댔고 듣기에 너무나 지루하고 맥이 빠졌다.

어쩌다 한번씩 '그 집 앞'을 제법 잘 연주하고 노래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연주하는 중간에 강당 맨 뒷좌석에서 심사담당교수들이 앉아서 듣다가 채점이 끝나면 작은 종을 두드렸고 종소리가 나면 학생은 그때 중단하고 내려왔다.

드디어 나의 차례가 되었다.

 

나는 풍금으로 걸어갔다.

나는 악보도 지참하지 않았었다.

의외로 편한 마음이 되었다.

'에라 모르겠다. 떨어지려면 떨어지라지'

 

'그러나 내가 부르는 노래는 다른 아이들것보다는 좀 특이하다고 인정하겠지'

이렇게 생각하며 발을 굴러 오르간의 송풍페달을 힘껏 밟아 바람을 가득 채워 넣었다.

무슨 노래를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며칠 전부터 머리를 떠나지 않았었고 나의 결론은 내가 제일 잘 부르는 이태리 칸쏘네를 부르자 그것도 나의 목소리에 잘 맞는 '푸니쿠니 푸니쿠라'로 결정하자.

 

오르간 연주는 남들처럼 손가락 하나하나씩 어설프게 누르는 분산화음이 아니었다.

 

왼손은 쫙 펴서 새끼와 엄지손가락으로 한 옥타아브의 위 아래의 음을 누르고 가운데 손가락은 살짝 구부려서 옥타아브 중간의 한 음을 누르면서 오른손은 내가 부르는 노래의 멜로디를 짚어가며 부르는 것이 내가 혼자 개발한 오르간 연주법이었다.

 

나는 이러한 방법으로 무슨 노래든지 내 마음대로 치며 부를 수가 있었다.

 

처음 피아노를 쳐보았던 전주여고의 강당에서 내가 아는 노래의 가락과 피아노의 건반 배열이 나의 뇌의 통제에 따라 이 정도면 그만한 높이의 음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누르면 영락없이 내가 생각한 음이 되는 것이 너무나 재미가 있었다.

 

일요일이 되면 가끔 전주여고의 강당에 무단 침입하여 피아노 연습하는 여학생들을 못살게 굴어서 내보내고 학교의 관리인 아저씨가 쫓아 올 때까지 내가 아는 노래들을 두드리며 놀았었기에 그와 같은 방법은 나의 손에 익어 있었다.

 

배에 숨을 가득 채우고 노래를 시작하였다.

 

"아 쎄라 나니 네메 넷사 일떼테 투 싸이에아도 투싸이에아토

 

아 도스또 코렌그라또 츄디 스피엣떼 파르메 논포 파르메 논포-

아 도-로 푸코코세 나씨 후리엣-떼 테라사스타 테라사스따...................

 

나는 목청을 있는 힘껏 내 지르며 노래를 불렀다.

한 소절이 넘어가고 나서는 자신이 생기고 재미가 있었다.

 

마치 내가 음악 발표회를 하고 여기에 많은 청중이 모여 있구나 하는 착각을 일으키며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노래의 거의 크라이막스 부분인 푸니쿠니 푸니쿠라 푸니쿠니 푸니쿠라-를 피아노에서 메죠피아노와 메죠포르테를 거쳐 포르티시모까지 효과를 내며 한창 신이나 있는데 관중석에서 심상찮은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얼른 관중석을 살펴보았다.

 

많은 학생들이 웃고 있었고 교수 한사람이 일어서서 나에게 손을 들고서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 이 종소리 안 들려?!!' 라고 하는 소리가 분명히 내 귀에까지 들렸다. 나는 얼른 연주를 멈추고서 얼굴이 새빨개 져버렸다.

 

"자네 이 노래 어디서 배웠는가?" "자네 영생학교 나왔구만!"

"! ‘전고(전주고등학교) 다니던 제 친구 '김 성욱'이 한테 처음에 배웠는고요....,

'삼렬'이라는 친구가 '신신악기점' 뽀이를 하는디 거기에 놀러가서 전축판 틀어놓고 따라 불러서 외웠습니다."

"그러면 이 노래가 어느 나라 노래인가 아는가?"

"어쩌면 이태리 깐소네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자네 풍금은 치지 말고 이 노래만 한번 불러 보게"

나는 신이 났다.

옳다구나! 내가 노래는 잘 했나 보구나!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더욱 큰소리로 무대 위에서 독창을 하듯 노래를 불렀다.

 

"아 쎄라 나니 네메 넷사 일레떼- 투 싸이에아도 투싸이에아또 뚜사이엣아또-

'아 도스또 코렌그라또 츄디 스피엣때 파르메 논포 파르메 논포--' ' 아 도-로 푸코코쎄 나씨 후리엣 테 라사스따 텔라사스따--'

..................

"알았네 ! 그만!"

 

나는 머리를 득득 긁으며 겸연쩍은 표정을 짖고 빙긋이 웃으며 무대를 내려왔다.

 

수험생들이 와르르 웃었다.

 

나는 부끄럽지 않았다.

..........................

다음날은 미술 실기 시험이었다.

준비물은 지우개와 칼과 4B연필 한 자루만 가져오면 된단다.

 

미술 시험은 고등학교에서 배우지 않았어도 그림을 그리는 것만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의 그림 실력은 자타가 공인하지 않았던가?

 

시험 내용은 8절 갱지 한 장과 4절 켄트지 한 장을 나누어주고서 한쪽 손에 갱지를 들고 있는 모습을 켄트지에 연필로 데생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갱지를 둘둘 말아서 가운데 부분을 왼손아귀에 놓고 발끈 쥐었다. 갱지가 구부려지며 꺾인 모습과 혈관이 튀어나오도록 힘을 불끈 쓴 주먹의 뼈와 힘줄을 강조하여 그렸다.

 

그림이 어쩐지 너무나 잘 그려지는 것 같았다.

...................................

다음날은 체육교과 실기시험이었다.

 

시험장소는 강당이었고 농구코트에서 시험이 실시되었다.

 

이동식 칠판에 적혀있는 시험문제는 두 가지였다.

 

1. 원 핸드 드리블 엔 러닝슛

 

2. 맨손 체조 하기

 

첫 번째 농구 실기는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차례가 오자 나는 온갖 째를 다 내어서 드리블을 하였다.

 

앞에서 한 사람이 나를 가로막는다 생각을 하고서 골대 앞에까지 볼을 치고 나갈 때 빙글빙글 돌며 전진하다가 골대 오른 편에서 러닝 슛을 하였다.

 

볼은 링을 빙글빙글 두 바퀴 돌다가 휙 빠져 나와 밖에 떨어져 골인은 되지 못하였다.

두 번째 시험은 교수가 말하는 맨손체조의 종목 하나를 구령을 붙여가며 하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팔운동!" 하고서 명령이 떨어졌다.

 

순간 생각나는 팔운동이 있었다.

한 동네에 사는 '전주고등학교'에 다니는 오 건일’ ‘전 기영’ ‘조 선정등 내 친구들이 전국체전에서 마스게임을 한다고 '네덜란드' 체조를 열심히 연습하는데 그 중에서 팔운동이 가장 어렵다고 하면서 밤에 어울려 놀 때 연습하는 것을 보고서 배운 운동이 있었다.

 

두 팔을 차례로 굽혀 어깨에 대었다가 위와 앞, 옆과 아래로 뻗는 운동인데 두 팔의 방향이 같은 방향으로 나가지 않고 각각 다른 방향으로 향하기 때문에 내 친구들은 몹시 어려워하며 이것을 연습하느라 애를 먹는 것을 내가 먼저 익혀서 그들과 함께 했던 생각이 났다.

 

나는 자신 있게 큰소리로 구령을 붙이며 네덜란드의 체조인 팔운동을 하였다.

 

교수가 나의 응시원서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또 나를 쳐다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체조를 다 마치고 차려 자세로 서 있는 나에게 그는 물었다.

 

"자네 영생 나왔는데 이 체조 어디서 배웠는가?"

"! 제 친구들이 '전고(全州高)' 다니는 애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이 체전 마스게임 연습하는 것을 보고서 배웠습니다.

교수가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다가

"다음!"하면서 내 뒷 번호를 불렀다.

.................................

실기시험이 끝나고 나서의 나는 희망적인 기대를 가슴속에 부풀리며 어쩌면 합격하였으리라고 하는 믿음이 마음의 밑바닥에 깔려있었다.

....................

예상대로 합격번호가 벽에 붙었다.

........................

!

드디어 정 일웅

전주교육대학 1학년 2반 학생이 되었다.

 

교육대학생 교복을 입은 나를 보는 어머니는 정말 기뻐하셨다.

 

천주님, 성모님, 은혜로 니가 교육대학에 갔응게 감사혀라

.........................

하늘색이 달라졌다.

숨 쉬던 공기가 더 신선해 졌다.

멀리보이는 저 산도 땅도

숱하게 많은 저 집들도

거리를 활보하는 모든 사람들도

뭐 하나도

세상에서 부러운 것이 없었다.

온 세상은 모두 나의 것이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이제 2년 후면

나는 선생님이 되어

엄마를

내 누나와 동생들을

내 힘으로 먹이고 행복하게 살아 갈수 있다.

...............

교육대학의 동창생이 된

초등학교 동창도 만나고 동경의 대상이었던 예쁜 여학생도 늘 볼 수 있게 되었다.

거지가 왕자의 자리로 돌아간 느낌이라할까

일시에 신분상승이 된 이 벅찬 감회를 어떻게 표현하리....

 

그러나

우선 입학금과 수업료 교과서 대금을 마련해야 한다.

교육대학은 일반 대학과 달라서 입학금도 수업료도 엄청나게 저렴하였다.

입학금과 수업료는 일단 납부하였고

교과서 대금은 내지 않았다.

교과서를 사지 않고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기로 마음먹었다.

 

입학식이 끝나고 특별 활동 부서를 조직하는데 선배들이 각 교실을 돌아다니며 외치는 무리들이 있었다.

 

"다음 부르는 학생은 미술부에 들어오면 좋겠다는 교수님의 부탁입니다."하고서 몇몇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 중에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이튿날 음악부장이라는 선배학생이 내 이름과 몇몇 학생의 이름을 부르며 음악부에 올 것을 권한다는 말을 듣고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날리며 내가 음악 점수도 잘 받았었구나 생각하였다.

 

나는 미술부에 등록을 하였다.

백 준기교수님, ‘홍 순무교수님이 미술을 가르치셨다.

오르간 연습실인 작은 방이 수십 개나 있고 아무 때나 자유롭게 혼자서 연습을 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이 득주교수님은 음악 학습 이론을,

천 길양교수님은 성악을 지도해 주셨다.

.........................

이제 대학생이 되었으니 성당 활동도 달라져야 했다.

 

맨 먼저 그토록 그리던 성가대에 입단을 하였다.

 

베이스 파트에 들어가 박 정양선생님의 굵직한 목소리와 음정을 흉내 내며 열심히 성가를 불렀다.

성심여자 중고등학교의 강 병규선생님과 조 지영선생님이 때때로 바꿔가며 성가대를 지휘해 주셨다.

4성부의 아름다운 화음이 가슴에 전율을 느낄 정도로 나를 매료시켰다.

합창을 한다는 것은 정말 행복하고 신나는 일이었다.

성체강복시에 부르는 그레고리안 성가가 너무 재미있었다.

 

딴뚬엘고

오살루 따리스

라우다떼 도미눔’....

 

레지오 마리에 활동도 시작하였다.

성가대원들의 쁘레시디움 천사의 모후에 입단하여 열심히 활동하였다.

..................

교육대학교는 내가 다녀본 학교에서 최고의 시설이었고

꿈에 그리던 그런 학교였다.

아름다운 정원, 넓은 운동장, 피아노와 풍금이 있는 수 십 개의 개인 음악실, 도서관, 히말라야시타 밑의 벤치, 회양목이 둘러진 아름다운 화단,.........

말쑥하고 멋있는 학생들.........

 

1학년은 5반까지 있었고 한 학급에 남학생 20, 여학생 20명이었다.

 

여학생들과 별로 말을 해 보지 못했지만 그들과 한 교실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였다.

하지만 나는 영생고등학교 출신으로 고등학교의 동창들과 끼리끼리 만나는 친구들이 없었기에 마냥 외톨이였다.

 

하지만 외로울 여유가 없었다.

학비와 용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

때마침

전주 신흥중학생 2학년, 7명을 과외공부 시켜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기꺼이 승낙하고 대학 수업이 끝나면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다가동의 학생 집으로 갔다.

열심히 지도하였다.

학생들은 내가 가르치는 수학이 너무 재미있다고 하며 수학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의 성적이 오르고 공부에 재미를 느끼며 학습태도가 달라지자

학부모들은 행여 내가 중간에 과외를 그만 둘까 걱정하며 공부시간 도중에 먹을 것을 가져오기도 하며 계속해서 지도해 주기를 부탁하여 교대를 졸업할 때까지 지도하여 주었고 학생들의 부모가 거두어 주는 과외비로 나의 학비는 충분하였다.

 

<교생 실습>

2학년이 되어 교육실습 현장학습이 1개월간 있었다.

나는 전주 완산초등학교의 4학년 2반에 이 상기와 함께 배정되었다.

실습 담임선생님은 최 병호선생님이었다.

자상하고 친절하며 최선을 다하여 지도해 주셨다.

그는 전주시내 초등학교 선생님들 중에서도 실력가로 유명하신 분이었다.

 

실습의 마지막 주 맨 끝 시간에 교생 대표 연구수업이 있다.

 

최 병호선생님은 나에게 교생 대표 수업을 한 번 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 나의 수업 방법을 좋게 보셨구나 생각하니 감사하고 기뻤다.

나는 기꺼이 승낙하였다.

실습생 모두가 대표수업을 꺼리고 사양하는데 용감하게 나서주니 고맙다고 하였다.

 

토요일 방과 후 최 병호 선생님께서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하여 그를 따라 어느 백반 전문 식당으로 갔다.

나에게 소개시켜 줄 분이 곧 오신다는 것이었다.

 

잠시 후 전라북도 교육청 오 성근연구사라는 분이 찾아 오셨다.

그는 최 병호성생님과 동기 동창이며 미국과 일본에서 초중등교육의 새로운 방향을 연구하신 저명인사라고 소개하며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실 거라고 하셨다.

그를 만나서 배운 것은 정말 나의 교단생활에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우선 교과 선정이었다.

국어 교과를 하기로 했다.

단원선정은 4학년 2학기 <춘천발전소>라는 논설문이었고

수업내용은 2차시 <문단 나누기>로 하기로 하였다.

 

수업형태는 분단학습을 통한 토의 학습이었다.

 

오 성근선생님은 역시 연구사답게 새로운 학습형태와 지도요령을 알아듣기 쉽게 가르쳐 주셨다.

집에 와서 그의 가르침을 상기하며 학습지도안을 작성하였다.

다음 날 연구사님을 다시 만나 나의 지도안을 보여 드리고 지도 조언을 받았다.

판서(칠판에 쓰는 글씨)는 카드식 판서로 하여

판서의 카드 글씨는 최 병호선생님께서 직접 붓글씨로 써 주셨다.

포스터 칼라로 써서 시각적 효과를 높였다.

선생님은 붓글씨 솜씨가 일품이셨다.

 

학생들이 문단의 단락을 잘 나누고 문단의 요점, 중심 낱말, 을 찾을 수 있도록 미리 예견하여 발문과 학생답변을 유도하는 요령들을 지도 받았다.

 

나의 연구수업은 강당에서 하기로 하였다.

강당 한 가운데 이동식 칠판을 설치하고 학생 책걸상을 정돈하였다.

삥 둘러 학생 수보다 훨씬 많은 참관인들이 서서 돌아다니며 학생들의 노트를 떠들러 보기도하고 나의 수업에서 느낀 점을 메모하기도 하였다.

 

<일제학습>...도입단계,

 

<분단학습>....토의 단계,

 

<일제학습>....정리단계로 진행하는 수업의 흐름을 정하고

일제 학습에서의 좌석배치에서

분단으로 나뉘어져 조 편성을 할때의 책상 배열의 시간을 빠르고 조용히 하는 요령을

미리 약속하였고 그 순간 책 걸상의 소음을 감추기 위하여 녹음기에 (백조의 호수)를 녹음하였다가

잠깐씩 틀어 주는 것 까지 신경을 썼다.

 

전 교직원과 교생실습학생 40, 전주시 교육청의 장학사, 연구사, 학부모까지 수업참관인으로 참석하였다.

백 명이 넘는 참관인들이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대중이 모인 앞에서는 마음이 졸아 들거나 겁이 나지 않는다.

수업은 내 의도대로 잘 진행되었다.

우선 학생들이 위축되지 않도록 여러 번 웃기고 삥 둘러서서 참관하는 선생님들과 교생들에게도 웃음이 터지도록 나의 온갖 기지를 다 발휘하였다.

수업을 마치고 인사를 할 때 내 마음 속에 기쁨에 넘치고 있었다.

 

학생들은 밖에 내 보내고

연구수업 비정회(批正會)를 하는데

맨 먼저 수업자 반성을 하는 시간에 수업을 위하여 준비과정을 모두 얘기 하고 카드식판서의 요령과 학생에게 하는 산파(産婆)식 질문법에 대한 것들을 똑똑하게 말 하였다.

오 성근연구사님과 최 병호담임선생님께 잘 지도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도 곁들였다.

참관인들이 찬사가 쏟아졌다.

능숙한 수업기술에 대하여 수 십 년 교사생활을 한 선생님들보다 더 훌륭하다는 분에 넘치는 찬사도 있었다.

.................

2학년 2학기가 끝나고

학생들은 모두 초등학교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받았다.

인사발령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여 제출하고

발령을 기다리는 동안에 졸업식이 있었다.

 

평생 처음 영화에서나 보던 학사모를 쓰고 까만색 망토인 학사 복을 빌려 입어보았다.

1학년 때부터 나와 같은 반이었던 김 태식과 사진을 찍었다.

내가 전도하여 세례를 받게 한 친구이자 대자인 그와 헤어지는 게 섭섭하였다.

하지만 선생님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어머니와 누나 매형 여동생 춘희, 현자....모두 꿈을 꾸는 것만 같은 행복한 순간이었다.

나의 졸업 기념으로 매형이 우리 식구들을 중국집으로 데려가 자장면을 사 먹었다.

.....................

당시에 초등학교 교사는 매우 부족한 상태여서 졸업을 하자마자 연령 미달등 결격 사유만 없으면 바로 발령이 났다.

 

<기다리던 발령이 나지 않고>

 

31일자에 발령통지는 적어도 220일 경이면 우편으로 본인에게 전달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2월 말일이 가까워지는데도 소식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기다리던 우체부가 가져다 준 우편물 속에 발령통지서는 없고 뜻밖의 인쇄물이 한 장 들어 있었다.

그 통지문에는 '6.25 당시 거주지 불명으로 신원조회를 할 수 없으니 신원조사 의뢰서를 다시 작성 제출하고 경찰의 신원조회를 마친 후에야 발령을 낼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이 실려 있었다.

 

청천에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도대체 나는 왜 이다지도 재수가 없는 놈이란 말인가?

 

그러나 지체할 수가 없었다.

부리나케 일어나 인근 파출소에 출두하여 보니 나의 신원조사 의뢰서가 있었고 경찰은 내게 이유를 설명하여 주었다.

 

8.15이후 거주지를 기록하는 난이 있는데 그곳에 6.25당시의 거주지가 누락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또 한 번 가난하게 살아온 나의 운명에 대하여 비통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의 집 셋방살이로 너무나 많은 이사를 다녔고 또한 6.25 당시는 초등학교 1학년 당시라서 당시에 내가 살았던 집의 주소를 기억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좀 오래 살고 기억에 남는 집 주소를 대충 적었던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중요 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6.25당시 거주지가 불명한 것은 그 당시 부역을 하였는지 공산당에 협조하였는지 확인할 길이 없으므로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너무나 기가 막혀서

"여보세요 경찰관 아저씨 6.25당시 제 나이 겨우 일곱 살이었는데 부역은 무어고 공산당 협조는 또 웬 말입니까?"

"아무튼 법은 법이고 서류상 하자가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빨리 서둘러서 다시 제출하시죠!"

 

그로부터 한 달 동안 말할 수 없는 불쾌감과 긴장 초조 속에 겨우 신원조사를 마쳤고

320일 경에 기다리던 발령 통지서가 배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