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임실초등학교로 전근 발령
친구들의 소식이 들려왔다.
이미 3월 1일 자로 많은 동창생들이 전주에서 가까운 곳으로 이동을 하였다.
하지만 나는 재수가 없게도 신원조회가 1개월 늦어지는 바람에 4월 1일에 발령을 받았으므로 이동 내신을 쓸 자격조차 없었다.
이 산골 학교에서 또다시 1년을 더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절망감이 밀려와 또 다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심정으로 3월 달이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학교에 전화가 개통되었다.
전화만 있어도 답답함은 좀 덜 하였다.
반가운 소식이 하나 들어왔다.
아! 나의 4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셨던 ‘박 진규’선생님께서 임실군 장학사로 오셨다는 것이었다.
구세주가 강림한 것처럼 반갑고 기분이 좋았다.
환경정리 물품을 구입하려고 임실에 출장을 가는 날이었다.
일찍 필요한 물품을 구입해 놓고 교육청을 들렸다.
나의 머리에 기계독을 낳게 해 주신 고마운 담임선생님....그 분께 인사를 드리려 교육청을 들렸다.
‘혹시 나를 잊으셨을까?’ 생각하니 은근히 걱정도 되었지만 인사를 드리는 것이 나의 도리라고 생각되어 교육청을 들어섰다.
아! 안경도 그대로이고 하얀 얼굴색도 그대로 늙지 않으신 모습이 너무 반가웠다.
“선생님 중앙 초등학교 4학년 2반때 제자였던 정 일웅입니다.” 하고 인사를 하자
박 진규 장학사님께서는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나를 그냥 알아보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의 손을 잡았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난 것만큼 기분이 좋았다.
“자네가 학석에서 열심히 합창지도를 한다는 소문을 들어서 잘 안다네”
“학무과장님께서 자네를 얼마나 칭찬하셨는지 ‘정 일웅’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네.”
“마침 임실초등학교에서 합창부 지도할 선생님을 찾고 있는데 자네 말이 나와서
그렇지 않아도 만나보려 했네.....“
“임실 초등학교에 ‘이 승남’ 선생님이 계시잖나요?”
“아! 지난 3월 1일 자로 전주시로 영전하셨네”
“마침 4월 1일자로 임실초등에 선생님 한 분이 교사 한 명이 필요하다네....”
“그래서 이왕이면 합창지도를 맡을 선생님을 찾고 있는데.....”
“어쩔랑가?”
<불감청(不敢請)이어든 고소원(固所願)이라>는 옛 말이 이럴 때 쓰는 말 인가보다.
손톱만큼도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 나에게 일어나고 있구나 생각하니
나의 심장 깊은 곳에서 뜨거운 전율이 전신으로 흐르고
감격하여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런 것이 주님의 섭리 인가보구나’..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보내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얼마나 큰 소리로 말하였던지 학무과 직원들이 모두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마침 그 때 학무과의 열린 문으로 ‘오 태엽’ 학무과장님이 들어오셨다.
그는 나를 보는 순간
“오~! 학석 보물선생님 오셨네--!” 하시며 나의 등을 도닥거려 주셨다.
예뻐하는 강아지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같았다.
모두 깨구락지 합창단 얘기를 했고 나를 칭찬하는 것을 보니.....
그 날의 초라했던 나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
귀엽고 예쁜 나의 깨구락지들이 나를 영전 시켜준 거나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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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로 돌아 왔다.
교장선생님이 빙긋이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나! 방금 전화 받았네.....”
“여기 ‘내신서’에 지망학교를 임실초등으로 쓰고 빠진 곳 없이 잘 써서 가져와”
“그동안 고상 많이 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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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령통지서가 학교로 배달되었다.
학석초등학교
교사 정일웅
1968년 4월 1일부터
임실초등학교 근무를 명함
1968년 3월 일
전라북도 임실군 교육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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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나의 전근을 축하하면서도 몹시 섭섭해 하였다.
떠나오는 나의 눈에서도 학생들의 눈에서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슬퍼하였다.
나의 이불과 옷, 책 몇 권의 이삿짐이었지만
아이들이 ‘갈담’까지 들어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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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담에서 전주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갈담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동창을 만났다.
그는 나의 발령 소식을 알고 있었다.
“너 어떻게 학석에서 임실로 한 번에 발령이 났냐?”
“..........그게....왜?.....”
“‘빽’ 깨나 썼구나! 학석에서 임실로 갈라면 일단 ‘갈담’이나 ‘청웅’으로 와서 몇 년은 있어야 가는 데지....단 번에 가는 일은 보통 ‘빽’이 없으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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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구나!”....“사실 ‘빽’도 아주 큰 ‘빽’이 있긴 있지 하하하하” 웃음이 나왔다.
나에겐 <하느님 ‘빽’> 빼고는 사람이나 돈이나 권력, ‘빽’은 하나도 없는 놈이었으니까< ‘하느님 빽’>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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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학석 초등학교’에서의 갖가지 일들이 빠르게 돌아가는 활동사진을 보는 것처럼 떠올랐다.
임실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는 나의 말을 들은 어머니와 누나 동생이 나보다 더 기쁜 듯 박수를 치며 좋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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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4월 1일
월요일이었다.
운동장 조회를 하려고 전교생이 모였다.
드넓은 운동장
한 학년에 5~6학급
한 학급에 60명 이상의 학생들
운동장 조회에서 나의 인사소개를 할 때 2000명 가까운 수의 학생들이 운동장을 꽉 메운 광경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신 동우’선생님이 전주로 전근 가시고 그가 맡았던 2학년 6반을 담임하게 되었다.
교실이 모자라서 ‘오후에 수업하는 반’이었다.
남자어린이 30명, 여자어린이 30명의 혼합 반이었다.
이렇게 어린 학생들을 맡게 되어 황당하였으나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고,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모든 학습을 놀이화하여 진행하였다.
어린애들이었지만 감정은 서로 통하였다.
진정한 사랑의 마음으로 지도하는 나를 부모처럼 삼촌처럼 오빠 형님처럼 잘 따르고 말도 잘 들었다.
연구주임이 나에게 신임교사의 대표로 ‘연구수업’을 하라고 하였다.
기꺼이 승낙하고 이 아이들과 ‘미술과 연구수업’을 하기로 하였다.
수업 내용은 ‘조소(彫塑)(조각과 소조)’의 소조(塑造(찰흙등 가소제를 붙여가며 형태를 만듦))로서 찰흙으로 소꿉놀이 기구를 만드는 수업이다.
도입단계는 일제 학습으로 학습목표를 잘 알도록 하고
노래를 하며 분단을 편성한 다음 분단 친구끼리 역할을 정하고 각자 만들 소꿉놀이 기구를 선택하여 만든다.
일제 수업을 하다가 분단을 편성할 때 노래를 부르며 분단을 조성하도록 했다.
동요 <나는 나는 갈테야> 의 곡에 가사를 바꿔서 부르며 분단을 만든다.
한도막 형식의 짧은 노래지만 그동안에 8개 분단으로 순식간에 정돈되었다.
<소꼽-동무 내동무 우리집을 만들자 소꼽동무 내동무 좋은-집을 만들자>
<집을 먼저 만들고 살림장만 해야지 우리들은 즐거-운 소꼽-동무 내동무>
짧은 시간에 분단이 편성되고 금방 학습 분위기가 바뀌는 과정을 참관하던 선생님들이 모두 감탄하며 신기하다는 듯 열심히 뭔가를 메모하고 있었다.
교사는 분단을 순시하며 작업 중의 어린이와 대화를 통하여 좋은 점을 발견하여 전체에게 설명과 칭찬을 해 주고
종결단계에서 각 분단별 대표가 자기들의 작품을 설명하는 진행으로 모든 학생이 열심히 만들고 재미있게 만들며 얘기하고 떠들고 흥미진진하게 이끌었다.
전 교직원이 모두 참관하였다.
특히 ‘진 경현’교장선생님은 나의 수업이 매우 즐거운지 밝은 표정에 시종 웃음 띤 모습이었다.
평소에 엄격하고 잘 웃지도 않는 분인데 웃음 띤 그 모습에 나는 더욱 신이 나서 아이들을 웃기기도하고 참관하는 선생님들을 웃기기도 하였다.
수업 평가회에서 칭찬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수업만은 자신이 만만 하였다.
교생 실습을 할 때에도 전체 실습생을 대표해서 ‘연구 수업’을 한 경험도 있고....뿐 만이 아니라 평소의 어떤 수업도 웃으며 즐겁게 학습하며 학습목표를 달성하도록 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기에 누구에게 보여도 떳떳한 수업을 평소에 늘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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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교실이 더워서 수업이 어려울 때는 학교 뒷문을 나가면 잔잔히 흐르는 임실천에 데리고 나가 물가에 플라타나스 그늘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고 눈이 많이 내린 겨울 운동장에서 눈싸움을 하였다.
눈싸움은 아이들 전체가 선생님인 나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뭉쳐온 눈덩이를 나에게 던지고 나는 한 아름 집어든 눈가루를 나에게 달려드는 어린이에게 뿌려 눈 세례를 주기도 하였다.
아무리 어린이들이지만 60명이 모두 공격하니 나는 결국 눈 위에 넘어지고 아이들은 나를 눈에 묻어버린다.
나는 눈 속에 묻혀 ‘항복’을 선언한다.
아이들은 ‘만세!’를 부르며 얼마나 좋아 하였던지 세월이 오래 지난 요즘에도 그 때의 학생을 만나면 옛날의 눈싸움 얘기를 나누고 그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문 소운, 백 혜숙, 노명란, 임영언, ..... 그 꼬맹이들이 손자를 둔 할머니가 된 사람도 있다니 .....아! 추억은 늙지 않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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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년이 시작되기 전 학년말 방학 마지막 날
개학을 앞두고 전 직원 회의가 있었다.
주요 안건은 담임배정과 업무 분장 발표였다.
교장선생님이 작성한 담임 배정 표를 보며
교무부장이 발표하였다.
6학년 담임부터 발표를 하였는데
뜻밖의 사태로 교무실이 잠시 어수선 하였다.
6학년 담임은 중학교에 입시가 있던 시절이라서 교육경력이 많고 실력 있는 ‘베테랑’급 선생님들이 고정적으로 맡고 있었다.
“6학년 1반 ‘김 공영’선생님”
“6학년 2반 ‘최 종주’선생님”
“6학년 3반 ‘정 일웅’선생님”.... ‘헉’!!! 내가? 6학년 담임이라고? 잘 못 들었나?
나를 6학년 담임으로 정하다니......나는 내 귀를 의심하였다. 잘 못 불렀겠지....
순간 교무실의 모든 선생님들이 ‘어~~~?’하는 소리를 지르며 의아해 했다.
이제 교대를 졸업한 지 3년 밖에 안 된 병아리 선생에게 학교의 명예가 걸린 6학년 담임을 맡기다니.....하는 불만의 신음소리였다.
나는 영문도 모르게 갑자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얼굴이 확 붉어지며 얼떨떨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그냥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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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를 알아차린 교장선생님께서 화가 난 얼굴로 벌떡 일어서셨다.
“..................”아무 말도 없이 웅성거리는 쪽을 쏘아보셨다.
“.........................”
교장선생님의 무서운 표정에 쥐 죽은 듯 조용해 졌다.
...............
“계속 발표혀요!!” 교장선생님이 교무주임에게 명령하였다.
“6학년 4반 ‘권 용근’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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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구수업을 보신 교장선생님께서 나의 수업 능력을 인정하셨나보다.
고마우신 교장선생님이시다.
부탁을 한 것도 아니고, 부탁을 할 처지도 아닌 나였다.
6학년 3반 ...........
정말 귀엽고 예쁜 여자 아이들이었다.
61명의 소녀들...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러야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시대였기 때문에 이들에게 학교의 명예가 걸려있고 담임의 능력이 평가를 받는 것이었다.
정규수업이 끝나고 4개 반 모두 방과 후 2시간씩 과외공부를 시켰다.
나는 정말 열심히 가르쳤다.
국어, 산수, 사회, 자연, 주요과목은 주요 포인트를 달달 외우게 하였다.
음악은 교과서의 참고 곡을 제외한 모든 곡을 오선에 스스로 암기하여 악보를 그릴 수 있게 하였다.
제1과 ‘대한의 노래’를 배울 때 학생들이 노래를 부르기 전 외울 사항은 이렇다.
물론 음악의 기초이론은 미리 철저하게 지도 한 뒤에 이루어지는 학습이다.
“대한의 노래...바장조..4분의 4박자...두도막형식...16마디...
으뜸음..바, 여기까지 구호를 제창하고,
모두 오른손을 들어서 지휘 폼을 잡는다.
노래 할 때는 4박자의 지휘법에 따라 손을 저으며 노래한다.
계명창...미-도솔, 도-레미도, 파미레도, 솔---......................
리듬창...4-2 2, 3-122, 2222, 6---,사
가사창...백두산 벋어내려 반도삼천 리---
리듬창의 4=사분음표...2=이분음표, 3=점사분음표, 사=사분쉼표
1=팔분음표
이렇게 노래를 암기하고 나면
오선지를 나누어 주고 ‘대한의 노래를 적어라’ 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악보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노래는 교과서 노래 외에도 많은 한국가곡과 민요를 가르쳤다.
주입식!
단기에 성과를 올리는데 ‘주입식’만큼 효과적인 교수법이 또 있을까?
단 ‘비폭력적 주입식’교육을 시키는 게 나의 독창적 교육 방법이었다.
비폭력으로 어떻게 주입을 시키느냐?
그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학습흥미유발 방법’에 의한 교육이었다.
즐겁게 외우면 피곤하지 않게 지식이 머리에 쌓인다는 게 나의 교육 방법이요 철학이라면 철학이었다.
아무튼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였고
일제고사를 보면 언제나 4학급 중 평균이 1위였고
전체 1등은 한 번도 빠진 적 없이 우리 반의 실장 ‘김 인숙’이었다.
당시 임실군청 내무과장의 장녀였던 ‘김 인숙’은 그 품성이 마치 학석초등의 ‘남숙’이처럼 차분하고 영리하며 겸손한 아이였다.
.....................
‘김 인숙’ ‘김 혜란’ ‘윤 영란’ ‘문 소영’ ‘진 미원’ ‘노 명숙’ ‘박 영숙’ ‘원 정섭’ ‘정 숙귀’ ‘곽 은나’.............사랑스런 이름들은 항상 잊혀 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