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웅 찻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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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처럼 쓸 이야기가 있는 날

막둥이의 할머니에 대한 지극한 그리움

정일웅 찻집 2011. 8. 5. 17:00

상원이가

결혼을 앞두고 할머니를 생각하나보다

아기 때 부터 할머니의 사랑을 극진히 받고 자라온 막둥이.......

상원이의 꿈 이야기를 편지로 보내왔기에

여기에

올려 본다.

 

2011. 8. 5. 금

어제 나는 더 재킷이라는 영화를 보고 잤다.
다른 시공으로의 여행.
꿈을 통해서 나도 그렇게 몸은 이곳에 있지만
다른 곳으로 여행을 하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공항의 대합실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 비행기는 2시 출발이었다. 1시가 좀 넘은 시각.
하얀 한복 차림의 할머니가 왼편에 앉아 계셨고 나는 바로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할머니는 100세가 다 되셨다. 마지막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 중이었다.
나는 마음속 깊이 두 가지 생각으로 가득하다.

하나는 내가 사랑하는 할머니와 여행을 간다는 설렘이었다.
할머니는 아프지 않고 정정하셨다. 우리는 일본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쿄 공항으로 가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나는 일본에 몇 번 다녀온 적이 있었고
일본어는 안되지만 영어로 대충 여기저기 찾아다닐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많이 걸어다니는 코스로 다닐 순 없겠지. 오사카 성 같은 곳은 할머니가 돌아다니기에
별로 볼 것도 없고 힘만 들 것이다. 빌딩 전망대 같은 곳은 어떨까...
우리 할머니도 소녀처럼 밝고 환하게 웃으며 이 즐거운 여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이번이 마지막 여행이 되겠구나... 가자마자 돌아가실 지도 모른다.
지금 옆에 앉아 계신 것이 꿈만 같다... 아니 꿈이 맞다. 곧 깨어날 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아침 9시나 10시쯤 되어서 늦잠을 자고 있다. 내 요즘 주기로는 이제 더는 잠이 안 올 시간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할머니 옆에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흐느끼고 있었다.

할머니와 나는 행복이 가득했다. 아무런 걱정거리가 없었다. 단 둘이서 여행을 갈 정도로 정정하신 할머니가
조금도 부담스럽거나 하지 않았다.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온통 들뜬 생각으로 기분이 좋았다.
우리는 대합실에서 계속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저것이 뭐시냐?"
"전화카드여."
"전화를 왜 카드로 한다냐?"
"비싼게 그러지.. 국제전화할 때 쓰는 거여. 외국으로 전화할라면 돈이 많이 들잖여
집전화로 전화하면 몇십만원씩 들어. 근디 저 카드로 전화하면 돈이 별로 안들어."
"그런다냐?"
"긍게 할머니도 외국에 전화할 때는 절대로 집전화로 하면 안뒤아."

"일본에 가면 뭣이 있을랑가? 금암동이랑 다 있을랑가?"
"일본에 금암동이 있다고?" (나는 껄껄 웃었다)
"아니 할머니 일본에는 도쿄, 히로시마 이런데가 있지 무슨 금암동이 있어."
"그런다냐?"
"지금 우리는 일본 가는 거여. 일본에는 엉? 도쿄나 히로시마나... 그런 도시가 있지.
금암동은 옛날 우리 동네 옆이잖어."
나는 주변 사람들이 다 들리게 크기 웃었다.
할머니도 환하게 웃었다.

"두시 되�다!"
(시계를 보니 1:35이다)
"아니 할머니 지금 한시 삼십 오분이잖어!! 아니, 이게 무슨 두시여!!"
나는 너무나 웃겨서 배를 움켜잡았다.

할머니는 항상 이른 시간부터 준비하시는 버릇이 있었다.
아침에 깨울 때에도 7시 40분쯤 되면 8시라고 소리를 질러서 나를 벌떡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짜증스런 말로 지금이 왜 8시여!!하고 소리지르고 다시 들어가 자곤 했다.
지금 내가 시간관리가 철저한 것도 할머니가 만들어 준 습관이구나.

주변이 희미해 지면서 잠에서 깨어나려 하고 있다.
나는 언제 다시 볼 지 모르는 할머니가 그리워
조금이라도 더 꿈을 꾸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이곳은 서울의 신혼집, 나는 천장을 보고 있다.
또다시 눈물이 울컥 하고 쏟아진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여러번 꿈에 나타나셨다.

처음에는... 돌아가시고 며칠 되지 않아서
무슨 인도나 중국의 왕비같은 차림을 하고
입에 보석으로 된 마스크를 하고
가마에 실려서 어딘가로 가고 계셨다.
마스크때문에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셨는데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습은 분명 어딘가 좋은 곳을 향해 가시는 것이었다.
깨어나서 나는 할머니가 천국에 거의 도착하셨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마천루 빌딩 숲에 우리 가족이 다 모여서 살고 있었다.
우리는 거의 꼭대기 층이었고 엄청나게 넓은 호화 아파트였다.
내가 아이 때 우리 가족같았다. 형들과 할머니, 엄마 아빠. 여섯 식구였다.
높은 곳은 아마도 하늘나라를 뜻하는 것 같고
우리 가족 모두가 언젠가 그곳에서 만날 것을 일러준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잠시 우리가 할머니를 면회 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다과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빌딩 옥상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이 때는 그리 생생한 할머니 모습이 남아있진 않았다.

정말 생생하고 놀라운 꿈은 하얀 집에서 우리 할머니를 누군가가 만나고 가라고 해 주신
일종의 면회소였다.
"니가 보고싶어 하는 분이 저 뒤에 있다. 만나보고 가거라."
그 목소리는 낮은 음성이었는데 내게 음성으로 들린 것이 아니고
그냥 하나의 계시처럼 들렸다.
그 분은 하얀 옷을 입고
얼굴까지는 올려다 볼 엄두도 내지 못하게 너무도 밝게 빛나는,
그리고 그 존재에 압도되어 나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드는 그런 분이었다.
그 때의 할머니와의 대화도 생생히 기억난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지금처럼...
눈물을 왈칵 쏟으며 기억나는 모든 것을 수첩에 적었다.
할머니는
아버지 칠순잔치 때 자기 사진을 하나 걸어두라고 하셨다.
거기 온 사람들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나는 꿈을 많이 꾸지만... 대부분 그 꿈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나와 대화가 많지 않다.
그리고 뭔가 어설프게 존재하다가 사라져 가곤 한다.
그 사람들은 투사체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사람들에 대한 느낌과 생각이 만들어 낸
가짜 형상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할머니는 늘 내가 예상하거나 생각한 말을 하지 않고
새로운 사실을 말한다.
내가 만들어 낸 투사체라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뻔한 얘기만 하다가 사라지겠지.
할머니는 투사체가 아니고
진짜 영혼이었다.
꿈을 통해 나를 보러 오신 것이다. 하얀 하늘나라 천국에서 하느님과 함께 사시다가...
아마도 그 구름같은 채소밭에 고추나 상추 같은 것을 심어서
하느님 밥상에 올리시고 고무신을 신고 여기저기
성당 안에 빈 방들의 불을 끄러 다니시고 계실 것이다.

가끔 우리를 내려다보며
땅에 붙어서 이리 저리
근심에 차서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기도를 하시겠지.
그리고 그 기도는 다 이루어졌다.
내가 성당에서 복사하던 어린 시절에 '우리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게 해 주세요'
하던 나의 기도와... 군대에서 '여기서 살아서 나가게 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가 다 이루어졌듯이

이렇게 좋은 집을 구하게 해 주시고(전주 우성아파트, 여기 청호아파트, 대전 신선마을, 구로 거성아파트)
우리 가족이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이
다 우리 할머니가 하느님께 기도드린 힘이다.

14세 이후로 과학과 논리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을 믿기 시작했지만
할머니는 그 너머에 계시다.
과학과 논리에 따르면 연기처럼 사라져 가야 할 우리들이
내세와 영혼을 믿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렇게 가끔 나를 찾아와서
계시를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이곳보다 훨씬 아름답고 평온한 하늘나라에서
다같이 모여 살게 될 것이라는. 이제 그 식구가 하나 또 늘게 되었네요.
우리가족 모두... 마음 속 깊이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