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웅 찻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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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슴에 스며드는 노래 모음

[스크랩] 학창시절 즐겨 불렀던 부용산 노래와 악보

정일웅 찻집 2010. 7. 8. 21:29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체로 
붉은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 부용산 - 안치환. ♪


♬ 부용산 - 이동원. ♪


♬ 부용산 - 박흥우(바리톤). ♪


♬ 부용산 - 국소남. ♪

 

 

 

 

부용산.
부용산을 아십니까?
가슴 속으로만 흘렀던 아름다운 가사와 애절한 곡조,
50여 년만에 노래비로 부활하다.


부용산(609m)은 용산면을 동쪽에 안고 있는 명산이다.
장흥의 진산인 천관산(723.1m)을 중심으로 보자면 북쪽 자락에 위치한다.
부처가 솟은 산이라 하여 불용산,
약초가 많다 하여 약다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가을 단풍철에 이 산을 찾는 산악인들은 약초에서 풍기는 향기로 인해
체력을 회복하고 돌아간다는 설이 있다.
산 아래 마을이 운주라고 불리는 것은
구름이 산마루에 걸려서 머무는 날이 많기 때문이다.

장흥읍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국도23호선을 따라 14.6km쯤 가면
용산면 소재지에 이른다.
여기에서 용산면사무소 담장쪽으로 우회전 하는 길을 따라
약 2.5km를 가면 운주마을에 도착한다.
운주마을에서 부용사 가는 도로를 따라 20여분 오르면
4부능선 상의 부용사가 나온다.
부용사 뒤쪽을 통해 등산로를 오르면 정상에 오르게 된다.

부용산의 정상에서는 천관산이 가깝게 보인다.

<부용산>은 박기동씨가 1947년 24살 꽃다운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한 누이의 주검을 묻고 돌아와 쓴 시에
목포 항도여중에서 함께 재직하던 안성현
(월북· <엄마야 누나야> 작곡가)이 1948년 곡을 붙인 노래다.
수년 전, 노동부장관을 지냈던 남재희씨가 어떤 인터뷰에서
“남도에서 <부용산> 모르면 간첩”이라며 열창할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곡이다.

노래 <부용산>은 해방과 전쟁 뒤 폐허라는 당시 상황과 어우러져
당대의 최대 히트곡이 됐지만
작곡가 안성현이 월북하면서 지하에 묻히고 말았다.
한국전쟁 때 작곡가 안성현이 무용가 최승희와 함께 월북하자
이 노래도 공식무대에서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당시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가슴과 가슴 속에서만 불려지게 되었다.
“노래가 자신들의 신세와 비슷해서 그들이 즐겨 불렀던 것 같아요.
작곡가 안성현은 목포항도여중 교사시절 저와 단짝이었는데,
예술을 좋아하는 <엄마야 누나야> 같은 낭만주의자였어요.”
박기동 시인은 “안성현의 아름다운 곡조 때문에 <부용산> 시가 살았다”며
작곡가에게 그 공을 돌렸다.
 
이런 <부용산>의 사연이 지식인들에게 알려지면서 노래는 빛을 보기 시작했다.
1997년 가수 이동원과 안치환에 의해 처음 무대에서 불려졌고,
지난 5월13일과 14일에는 ‘삶과 꿈 싱어즈’에 의해
포항공대와 포스코 공연에서 합창으로 소개됐다.
또 5월29일에는 전남 목포에서 열린 소프라노 송광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초청음악회에서 불려졌다.
송광선씨의 초청음악회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살던 박기동 시인이
가사1절이 나온 지 52년 만에 2절을 보내와 처음으로 공개된 자리이기도 했다.
가사2절에는 1절의 애상과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부용산은 어머니 같은 산이예요.
지인이 2절을 붙여 달라기에 썼는데, 다 쓰고 나니 가슴이 먹먹했어요.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이 대목을 쓰고 나서는 많이 울었어요.”

팔순의 노 시인은 머나 먼 타국땅에서
52년 만에 <부용산> 가사2절을 써놓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금지곡이 되다시피한 노래의 작사가라는 이유로
70년 이후 독재정권의 탄압을 받았던 아픈 세월이 밀려왔던 탓이다.
일본 관서대학 영문과를 나온 박기동시인은 지식인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시대를 비판하고 저항하는 문학청년의 길을 걸어왔다.
여러 차례에 걸친 가택수색으로 시작 노트를 압수 당하고
이 땅에서 시를 쓰는 것을 포기, 93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서 지금도 모국어로 시를 쓰고 있다.

부용산에서/보성 벌교.

보성 벌교땅 부용산에는
24살의 꽃다운 나이에 죽은 박기동씨의 누이가 누워있다고 하여
길 물어물어 찾아가 보았더니
누워 있어야 할 누이는 어느새 잠에서 깨어
부용산 등산로입구에 詩碑로 서 있구나.

1947년 요절한 누이의 주검을
부용산 산허리에 파묻고 되돌아서는 오빠의 발목 부여잡고
홀로 남겨두고 가지마란 듯이 산새도 슬피 울었다.

살점 도려내는 아픔과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서
부용산 5리길에 잔디만 푸르다고 恨의 피눈물 쏟아내면서
詩 한 구절 부용산 잔디에 써놓고,
누이를 잊은 지 어언 60여 년의 세월,
부용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멀리 벌교 앞바다 여자만(汝自灣)은
그때나 지금이나 햇살만 반짝이고 있다.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영화필름처럼 돌아가는 동안에
그 시가 노래가 되고,
그 노래가 빨치산이 즐겨부르는 榮辱의 세월 보낸 지금
누이도 시도 노래도
부용산에 산허리에서 부활하여 세상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누이가 보고 싶을 때마다
부용산 노래를 차마 큰 소리로 부르지도 못하고,
좌우 이념의 강물이 흐르는 강 언덕 저편에서
입술에서 맴도는 나지막한 소리로 부용산 산허리의 잔디만 푸르다고
고장난 축음기가 반복하듯 내뱉었을 수 밖에 없었으니...

부용산 산허리는 사람 사는 동네와 접해 있어서
마음 답답할 때 바람 쏘이러 가는 언덕배기에 마치 골고다 언덕처럼
꼭 그 자리 만큼에 예수님의 십자가 서 있듯 부용산 詩碑가 있어서
사람들이 詩碑를 보러 가는지,
부용산 누이를 보러 가는지,
아니면 恨의 상징인 詩碑가 멀리 여자만 남해바다를 응시 하는지,
부용산 5리길 산허리에 직접 올라가 보아야 알 것 같다.
 
그는 시집을 내려면 건강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31년째 매일 아침에 2시간씩 요가를 하고 있다.
부용산 산허리의 푸르른 잔디처럼...

2000.10.24. 한겨레21/제331호/ 광주=정금자/ 프리랜서·‘엔터닷컴’ 실장.


부용산 노래비.

부용산에서/보성 벌교.

출처 : 녹향 김일랑 시인방
글쓴이 : 호동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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