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비오는 날
양철지붕집 골방에서
베개를 베고 누었노라면
빗소리가 꿈속에 자장가처럼 나를 재우곤 했다.
방안에서 듣는 빗소리는
나를 행복하게 한다.
양철지붕이 아닌 아파트라도
바람불고 비오면 유리창이 덜컹거리고
빗방울이 베란다 창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누어있으면 얼마나 행복한지.....
<비오는 날 갈 곳이 없어
차가운 비를 맞으며 도시의 밤길을 방황해본 사람이 아니면
방안에서 듣는 빗소리에 행복한 마음을 알 길 없겠지>
태풍 볼라벤이 온다고 메스컴에서는 난리바가지다.
태풍 메미도 그랬고 루사, 곤파스, 무이파.....
전주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처럼 재난에 불감증이 많다.
안전 불감증 중증인 나는
어제 밤도
바람소리를 들으며 달콤한 잠에 빠져 들었다.
아침
날이 환히 밝은 후에 잠에서 깬 후
들려오는 유리창 흔들리는 소리는
잠이 들 정도의 그런 소리가 아니었다.
베란다의 유리창을 꼭꼭 잠갔는데도
안방의 이중창 유리창이 엄청나게 흔들렸다.
심상치않은 기분이 들어
거실에 나가 베란다 유리창을 살폈다.
커다란 유리창이 통째로 박살 날 것처럼
심하게 흔들거린다.
처음으로 불안한 마음이 나를 엄습한다.
11층 베란다 창에서 내려다 본 마당의 모습이 처참하다.
커다란 화단의 나무가 세그루 뿌리채 뽑혀 넘어져있고
서 있는 나무들은 거의 들어누울정도로 바람에 쏠리고 있다.
잘린 나뭇가지들이 건물사이의 바람을 타고
동굴속의 박쥐때처럼 허공 가득이 비행하고 있다.
그 때
112동 쪽에서
'펑!!~와장창~~째--ㅇ 촤르르~~'소리가 들렸다.
얼른 뒷 베란다 쪽으로 가서 뒷 동을 봤다.
19층의 베란다 유리창 거대한 통유리창 두 장이 박살이나고
창문틀이 전체가 빠져서 내려앉고 산산조각난 유리가
부서져 아랫층 화단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창틀에 뾰족뾰족 붙어있는 유리조각이 계속흔들거리다 바람을 타고 나뭇잎처럼 떨어져내린다.
바람이 또다시 세차게 밀어부친다.
뒷 건물의 16층, 17층, 18층에서 유리창이 거의 동시에
굉음을 내며 부서져 유리조각들이 건물밑의 화단으로 쏟아져내린다.
커다란 베란다의 통유리가
유리창 통채로 무너져내린 곳이 11곳이 보인다.
부서져 내린 공간에 커튼이 빨려나와 어지럽게 밖을 향하여 휘날리고 있다.
부서진 창의 건물 두 곳에서는 집 주인이 나와서 황급히 대비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나머지 집엔 모두 외출하고 없는 듯 하다.
바람은 잦아들지 않고 거세게 몰아쳐 건물 전체가 흔들린다.
바람소리 빗소리가 꿈처럼들리는 환상이 완전히 깨지고 있었다.
태풍의 중심이 군산 앞바다 몇십킬로를 통과하고 있단다.
종일 부는 태풍은 그 중심이 북한에 상륙했다 하는데도
기세는 조금도 누그러지지않고
아파트 경내의 수십그루의 나무를 쓰러뜨리고
테니스코트의 철망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아직도 분이 풀리지않은 성난 사자처럼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흔들고 부러뜨리고 할퀴고있다.
..................
죽음의 재앙이 이집트 땅을 훑어갈때의 구약성경 구절이 생각 난다.
무섭구나
이 번 볼라벤 태풍은 나의 안전불감증을 많이 치료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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