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중등자격 검정고시
결혼 후 나의 가정은 안정을 찾았고 나와 아내가 번 돈을 모두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려서 어머니가 살림과 저축을 하고 우린 용돈은 타서 썼다.
그러던 중에 약간의 돈이 모아져 ‘성가리’에 사간겹집의 초가집 한 채를 사서 지붕을 기와로 개량하고 이사를 하였다.
내 평생 처음 가져보는 나의 집이었다.
뒤뜰에 작은 텃밭이 있고 앞마당에 우물과 작은 화단도 있었다.
첫아이의 이름을 '정상범(鄭想範)이라 지어 호적에 올렸다.
상범이는 신생아 시절 건강이 좋지 않았다.
임신중 임산부의 영양실조로 인하여 태어난 신생아가 신생아 황달을 심하게 앓아서 생명이 위태로울 지경까지 이르렀으나 삶이 질긴 것인가?
신생아이면서도 전주의 '박소아과'에서 지어주는 쓰디 쓴 약을 잘도 먹고서 두 달 만에 황달이 낳았다
.
레몬옐로우 색의 노란 수채화 물감 같은 오줌과 똥을 싸던 아이, 얼굴과 온 몸이 노랗게 변하던 아이가 차츰 살색을 찾아갔다.
아내와 나는 학교가 끝나면 아이를 업고 전주의 병원에 들르는 것이 일과 처럼 되어버렸었다.
아! 아이가 겨우겨우 건강을 찾고 어머니의 회갑잔치를 하게 되었다.
내 나이 서른하나 아내가 스물 셋 되던 해이다.
<청웅초등학교로 전출>
그 이듬 해 1974년 3월 1일, 나는 ‘청웅초등학교’로 발령을 받고 통근을 하게 되었다.
‘청웅초등학교’는 임실에서 순창방향으로 12Km 정도 떨어진 곳이었고 가까운 학교라서 친분이 두터운 교직원들이 많이 있었기에 부드럽게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이곳에서도 합창지도와 환경정리를 맡아서 하게 되었고 5학년 4반 여학생 반을 맡았다.
합창부의 주축을 이룰 학급으로 여학생 반이 적당하였기에 나는 여학생 반을 많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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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방학이 가까워지면 꼭 걸쩍지근하게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있다.
(곧 있으면 검정고시 시험이 있다!)
(너 정 일웅! 이제 포기 했냐? )
(떨어지는 게 그렇게도 무섭냐?)
(병신! 너 그래도 남자라고 할 수 있냐?)
<에라 쪽팔리면 얼마나 쪽 팔리겠는가 또 한 번 도전하여 보자.>
나는 처박아 두었던 책을 다시 꺼내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곳 선생님들이 눈치를 못 채도록 조용히 공부하기로 하였다.
세 번째 도전이다.
작년에 합격한 '강 옥철' 선생님께서 반가운 전화로 알려왔다.
금년에는 '도법(圖法)'시험이 없어지고 미술사와 미술개론에서만 시험을 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더욱 자신감이 있었다. 사실은 항상 도법시험이 나에겐 어려웠기 때문이다.
'강 옥철' 선생님은 지난해 시험에 합격하여 무주의 안성중고등학교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나 혼자서 시험장에 갔지만 쓸쓸하진 않았다.
8월 15일 이었다.
미술개론에서 문제가 출제되었다.
1교시 시험은 <'색의 3요소에 대하여 논 하여라'>였다.
눈앞이 환하게 밝아오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나 자신이 있는 분야였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써나갔다.
서론부분에서 태양광선의 가시광선에서 시작하여 색의 3요소인 '색상' '명도' '채도'의 의미를 설명하고 '오스트 왈트'색체 시스템과 '만셀'의 색체 시스템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였다.
본론에서는 우리나라 문교부에서 학생지도용으로 도입하여 쓰고 있는 '만셀'시스템을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먼저 색상의 종류, 삼원색과 5주요색, 표준 10색과 표준 20색,
1차색과 2차색 3차색,의 분류법과 여기에 따른 색의 혼합관계를 설명하고
색의 명도 11단계를 무체색과 유채색을 예로 들어 써나갔고 명청색과 암청색을 구분하는 법의 설명
색의 채도변화에 따른 순색 탁색의 구분과 무채색과 유채색을 통합한 색입체 이론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색입체를 중심으로 색입체의 종단면에서 마주보는 색상의 보색관계와 중심축에서 멀어질수록 높아지는 채도와 순색을 설명하였다.
색입체의 횡단면에서 등명도면(等明度面)의 설명을 덧붙여 자신 넘치는 답안을 작성하였다.
첫 시간의 시험이 끝나고 피우는 담배 맛은 너무도 좋았다.
둘째 시간의 문제는 '바우하우스'에 대하여 아는 바를 쓰시오 라고 나왔다.
나는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바우하우스의 탄생동기부터 바우하우스의 업적 및 세계미술계와 건축미술에 끼친 영향, 바우하우스가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후의 변화 등 그리고 바우하우스에서 활동하는 작가 등 줄줄 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벼운 마음은 이런 걸 말 하는가 자신 있는 답안을 작성하고 나오는 수험생의 가슴에 일렁이는 만족감과 희열을 그 무슨 행복에 비유할 수 있을까?
............
정말 좋은 기분에 안정된 마음으로 생활이 활기차게 시작되었다.
10월 중순경이었다. 무슨 내용일지 궁금한 편지한통이 배달되었다.
설레는 맘으로 편지를 개봉하였다. 또 '귀하는 불합격 되었기.....' 등등의 소리가 쓰였다면 어떻게 할까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거기에는
<'**차 미술과 준교사 자격 전형 검정고시 (전북지역) 1차 합격자 명단'>
이라 쓰여 지고 나를 포함한 스물다섯 명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쓰여 져 있었고 2차 시험 장소와 요령이 적혀져있었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2차 시험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치른다고 하였는데 기간은 꼭 7일이 남아 있었다.
실기시험은 수채화로 인물화를 사생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정통적으로 수채화 공부를 하지 않았기에 지난번 낙방의 고배를 마셨었다.
이제는 또다시 떨어지는 일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비상수단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단 며칠밖에 남지 않았지만 전주에 나가서 학원에 등록하고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나 부족하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도전하는 길밖에는 없었다.
오전수업을 마치고 오후시간은 교무부장님에게 부탁을 드렸다.
'김 재두'교장선생님에게 솔직하게 말씀드렸더니 격려를 해 주시며 기꺼이 허락하셨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청웅 초등학교 교문 앞을 지나가는 버스를 타고 바로 전주로 향하였다.
전에 말을 들어서 알고 있던 원광대학교 미술대학의 화가 '박 남재' 교수의 화실을 찾아갔다.
‘물래 방아 다방’에서 ‘박 남재’ 교수님을 만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 선생님인 것 같은데 준교사 검정고시 준비하시려고 그러시죠?"
그는 나의 모습만 보고도 모든 것을 다 짐작하고 계셨다.
"지금부터 열심히 하시면 내년에는 웬만하면 합격 하실거여요!"
"초조하게 생각 마시고 천천히 열심히 해 보세요!!"
"저--! 교수님! 실은 시험이 앞으로 6일 후에 있거든요!! 그래서 마음이 급해요!"
"아! 저런!! 그러세요? 그러면 평소에 그림을 많이 그려보셨는가요?"
"여기 몇 장 그린 그림을 가져왔는데요!"
"아! 그래요! 한번 봅시다.!"
나는 미리 그려간 수채화 넉 장을 건네 드렸다.
그는 첫 장의 그림을 순간적으로 보시더니 두루루 말아서 다시 나에게 돌려주었다.
" 이렇게 그리면 떨어지지요! 환경정리하실 때 그리는 그림 이구만요!!"
나는 창피하였지만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매달렸다.
"저! 교수님 열심히 할 테니깐 지도를 부탁합니다. 도아주세요 교수님!! 며칠 남지 않았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는 나의 간절한 표정을 안타깝게 여겼는지
"화실로 갑시다.!" 하고서 다방 3층의 화실로 올라갔다.
입시준비를 하는 고등학생들이 수 십 명 조용하게 석고 데생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나이 많은 이방인을 이상한 듯 바라보는 학생들도 있었다.
박 남재 교수는 화실 한쪽 구석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젊은 학생 한사람을 불렀다.
"야 ! 태순아 ! 이리 좀 와 봐라!"
학생이 가까이 왔다.
"저 ! 선생님 ! 이 학생이 전주대학교 이번에 특대생으로 들어간 학생인데요 "
하면서 매우 유순해 보이는 몸집이 가냘프고 좁은 얼굴에 눈이 유난히 반짝이는 학생을 내게 인사를 시켰다.
"너 이 선생님에게 수채화 인물화를 아주 기초부터 좀 가르쳐 드려야 하겠다. "
하고는 나에게
" 선생님!,"
" 이 학생이 하라고 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서 연습하시고 시간이 있는 데까지 열심히 해 보세요!"
" 좀 어렵겠지만 별수 있나요 하는데 까지는 해봐야지요!"
박 남재 교수는 친절하였다.
나의 새로운 그림선생님! 그는 이제 대학교 1학년 학생, 이름은 '한 태순'이었다.
그는 매우 친절하고 요령 있게 가르쳐 주었다.
우선 모델이 필요하였다. 모두 열심히 그림연습을 하고 있는 데 누구에게 모델을 서 달라고 부탁할 수가 없었다.
'한 태순'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여학생들 중 한 명을 보면서 그의 전신상을 4절 켄트지에 그려 나갔다.
내가 평소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법이었다.
첫날은 '한 태순'이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눈여겨보면서 한과정한과정을 비디오를 찍듯이 머리에 새기며 보고 설명을 귀담아 들었다.
그는 스케치하는 방법에서 전체의 비례 잡기와 대상의 균형 잡기 인물의 운동감표현을 설명해주었고 채색의 과정에서 전체를 큰 면으로 나누어 보는 법과 붓의 겹침 효과와 팔레트에서 혼색하는 방법 등 정말 자세하게 설명을 하면서 시범을 보여주었다.
저녁식사를 중국집에서 시켜서 먹고 그는 계속하여 나를 지도하였다.
입시학생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도 아주 차분하게 나의 이해도를 감지하면서 설명을 계속하여 주었고 그의 시범은 감동적으로 나의 뇌리에 박혔다.
새벽 한시가 넘었다.
'한 태순' 학생이 정말로 고마웠다.
그날 밤 나는 인근에 있는 대구여관에서 잠을 자고 새벽 첫 버스를 타고 '임실'에 가서 집에 들려 세수하고, 식사하고 도시락을 싸서들고 학교에 출근하기 위하여 '청웅'행 완행버스를 탔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나면 학생들 종례를 옆 반 담임에게 맡기고 전주행 버스에 몸을 싣고 눈을 감으면 나도 모르는 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전주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화실에 도착하면 오후 3시경이었다.
<'시간이 없어서 못한다는 사람은 시간이 남아도 못하는 사람이다' >
나는 이 말을 수없이 되새기며 시간을 아끼기에 여념이 없었다.
시험시간 까지 5일밖에 없었다.
나는 이 기간 동안에 어떻게든 수채화를 그리는 방법을 터득하여 꼭 합격하여야만 하였다.
나는 하루하루 정말로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한 태순'이가 가르쳐주는 방법을 그대로 반복하며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는데 첫날은5-6시간을 소모하였다.
새벽1시경이 넘을 때까지 태순이는 나의 곁에서 열심히 도와주었다.
겸손하며 친절하고 자상한 그의 태도는 정말로 고마웠다.
나는 어떤 일을 할 때에 꼭 하여야 한다는 긴박감을 느낄 때에는 정신을 집중하여 몰두하는 힘이 생긴다.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고집과 인내심이 나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한다.
잠도 잘 오지 않고 식욕도 줄어들고 나는 온 통 집중하는 일에 몰두한다.
잠을 잘 때에도 꿈속에서 그 일을 한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정신세계의 에너지를 한곳에 모을 수 있고 이로 인하여 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평소 중·고등학교에서 시험공부를 할 때에도 시험시간표를 발표하면 시험 전날부터 집중적으로 날 새기 공부를 시작하였다. 벼락공부! 그렇다 나는 벼락공부에 도가 튼 사람이라고나 할까?
이번에 실기시험 준비도 벼락치기로 하는 시험공부였다.
첫 날 밤에 새벽 1시가 넘은 시간까지 한 장의 그림을 그렸고 둘째 날은 새벽 2시까지 2장의 그림을 완성하였다.
셋째 날은 오후부터 시작하여 넉 장의 그림을 그렸다.
새벽 2시 이전에 잠을 자 본 일이 없이 열심히 노력하였다.
시험 전 날 저녁
박 남제 교수님은 나의 그림을 첫 장부터 차례로 벽에 붙여놓으라고 하여 그렇게 하였다.
그림은 단계적으로 좋아지는 것이 내 눈에도 보였고 나의 기능은 어느새 성숙하여 그리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아졌으며 데생의 형태를 보아도 비례와 균형 감각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데생에 소요되는 시간도 처음에 두 시간 정도였던 것이 이제는 30분이면 거의 완벽하게 전신상을 묘사할 수 있었다.
벽에 붙인 그림은 열 석 장이었다.
박 교수님은 그 그림들을 한번 죽 훑어보신 다음 만족한 듯 표정을 지으시며
"거기 가셔서도 꼭 이렇게만 그리세요 ! "
"옆 사람 쳐다보시지 말고 꼭 이렇게만 그리시면 괜찮겠어요"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많이 그린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네요" 라고 말하며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여 주셨다.
나는 온몸에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틀림없이 합격할 수 있다는 확신이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그림 열 석 장을 말아서 끈으로 묶어 들고 집으로 향하였다.
아! 고마운 한 태순 학생!
아! 고마운 박 남재 교수님!
............
2차 실기 시험은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시행되었다.
시험장에 들어서는 나의 발걸음은 힘차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나는 기세가 등등하여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나의 수험번호가 붙은 이젤을 찾아서 시험 준비를 하였다.
나의 이젤을 적당한 위치에 자리 잡고 앉아서 화판을 놓고 모델 대를 바라보았다.
우측 측면이어서 그리기에 좋았다.
그때 누군가 나의 어깨를 툭 하고 건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야! ‘일웅’아! 널마 빨리 잘 그리고 나서 나 좀 봐주라!"
초등학교동창생이며 교육대학 동창인 '양 태현'이었다.
반가웠다.
‘태현’이와 나는 실기시험 장소가 달랐다.
우리의 인사는 오래 계속하지 못하였다.
시험시간이 임박하였다.
잠시 후에 모델이 등장하였다.
아름다운 여성이 모델의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번 떨어진 경험이 있는 나였고 이제는 자신감에 넘쳐서 수험생들 사이에서 나의 행동을 용감하게 하여 주었다.
모델의 모습이 젊고 아름다웠기에 더욱 신바람이 났다.
데생을 하고 있는 여고생들을 먼 곳에서 바라보며 시시각각으로 형태가 변화되어 보이는 모델을 그리다가 석고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아름다운 자세로 앉아있는 성숙한 여인의 모습을 그리기는 누워서 떡 먹기만큼 쉬웠다.
30분만에 형태표현을 끝내고 색칠하기에 들어갔다.
잠깐 눈을 돌려 주위를 살펴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태를 그리기 위하여 전체의 비례 잡기에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나의 마음속에 그 순간처럼 행복하였던 때가 또 있을까 싶었다.
며칠 동안 고생하며 그림을 그렸던 그 노력의 대가가 이 순간 이와 같이 자신감 넘치는 가슴 뿌듯한 벅찬 느낌으로 나를 위로하고 행복하게 만들고 있구나 생각하니 참으로 기뻤다.
차분하고 가라앉은 마음 상태에서 느긋하고 여유 있게 그림을 그려 나갔다.
붓의 겹침 효과와 명암을 살려서 입체감을 나타내는 극적인 강조의 효과를 마음껏 표현하며 작품을 완성하여 나갔다.
배경의 색조를 환상적인 보라색조의 중첩효과로 처리하며 화면의 주조 색을 이루도록 하였다.
여인의 하늘색 치마와 연분홍색 블라우스가 따뜻한 피부색과 조화를 이루도록 모든 색에 은은한 보랏빛이 깔리도록 색을 맞추어 나갔고 좌측 상단에서 흐르는 광선이 이마와 콧날에서 흘러 왼편 어깨와 앞가슴의 도드라진 옷자락에서 부서지는 빛의 효과가 돋보이도록 맞춰나갔다.
그늘진 곳의 처리는 보랏빛이 돋는 밝은 그늘로 처리하여 어두움 속에서도 부위의 모습이 잘 드러나도록 그렸다.
그림을 완성하고서 주위를 살피며 붓과 팔레트를 씻으려 수돗가에 가면서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눈 여겨 살펴보았다.
옆 교실에 들어가서 '태현'이의 그림을 보았다.
조금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안타까웠다.
아직도 채색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연필로 데생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만일에 내가 떨어진다면 많은 사람이 떨어지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림을 제출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의 내 마음은 복권을 산 사람이 이미 당첨된 결과를 알면서 발표하기만 기다리는 사람과 같은 마음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무척 가볍고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
다시 학교에 돌아온 나는 가을 합창대회에 출전할 학생들을 지도하기에 바빴다.
1974년 11월 18일 그날의 날자는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전라북도 교육청에서 난데없는 시외전화가 왔다고 한다.
.................
"정일웅 선생님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먼저 축하드립니다. 이번에 준교사 시험에 남자는 선생님 한 분이 합격하셨습니다.!"
나는 가슴이 뛰었다.
"모두 몇 명 합격 하였는가요?"
"전북에서 1차 합격자 25명중 여자 2명과 남자 한 명, 그래서 3명이 합격되었습니다."
"지금 바로 도교육청 중등교육과에 오셔야 하겠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선생님! 남원군 중학교로 발령이 나셨습니다.!"
"네???????"
"학교 사정이 급해서 그러니까 오늘 바로 부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빨리 오셔서 사령장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황당하다는 것은 이럴 때를 말함인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아무런 소식도 없다가 난데없이 웬 발령이란 말인가?
기쁨과 황당함과 걷잡을 수 없이 몰아치는 급박한 상황을 어떻게 진정하여야 할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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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선생님께 이 소식을 말씀드렸다.
"나도 방금 도교육청에서 전화로 들었네! 아무튼 어려운 시험 합격한 것을 축하허네!!"
"그런데 지금 오라고 하는 것은 웬일일까요?"
" 중등교사가 모질라서 그렁개빈디 벨수 있어? 좋은 일잉게 빨리 가봐!"
"아니! 저희반 아이들하고 인사도 못하고 떠날 수는 없잖아요?!"
"참! 그렇고만! 그럼 빨리 앳떨허고 작별인사를 먼저 혀! 그리고 금방 가 봐!"
김 제두 교장선생님은 나와 헤어짐이 섭섭한 인상을 남겼다.
뜻밖의 소식에 우리 반 여학생들 54명은 억장이 무너지는 듯 울음보따리를 터트렸고 같이 지내던 동료교사들과 섭섭함을 나눌 송별회도 열 수 없이 학교를 떠나야 하였다.
인사발령 통지서
생년월일 : 1945년 4월 18일
전북 중등학교 준교사 : 정일웅
남원군 교육장이 지정한 중학교 근무를 명함
1974년 11월 19일
전라북도 교육청 교육감
내가 받아든 발령통지서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