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집사람과
모악산에 올라갔다가
정상에서 비를 만나
조심조심 서둘러 내려오는데
1분도 채 안되어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 버렸다.
남이 보면 볼썽 사납겠지만 정말 시원하였다.
비는 억수같이 줄기차게 내렸다.
계곡 물이 삽시간에 불어나
폭포소리는 더욱 거세게 골짜기를 울렸다.
안경에 김이 서려 벗어버리니
시야가 흐려 하산이 더욱 더디어졌지만
귀한 경험이라 생각하고 조심조심 바윗길을 내려왔다.
이토록 멀고도 먼 길을 내가 어떻게 올라왔나 싶었다.
빗줄기는 조금 약해지는듯 하다가
천둥이 치고 나면 또 다시 굵어져서 힘차게 쏟아졌다.
무릎에 힘이 빠지고 허벅지가 피곤하고 배가 고파졌다.
하지만 숲속 폭포에서 엄청나게 생성된 음이온과 피톤치드 작용인지
기분만은 매우 좋았다.
온 몸이 이렇게 젖은 상태로 시내버스도 탈 수가 없을 것 같다.
가파른 산길을 다 내려와 금곡사 입구의 시멘트길까지 왔어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이게 무슨 꼴이람?'
오가는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두 노인부부의 몰골이 한심하기 그지없는 꼴이다.
남방셔츠와 등산복 바지가 흠뻑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고 줄줄줄 물이 흘러내려 왔다.
오랜시간 물에 젖어 있어서인가 체온이 좀 떨어지고 배는 더욱 고팠다.
오전 10시 반에 시작한 등산이 오후 4시가 됐으니 그럴만 하다.
주차장에 다 왔지만 시내버스를 타고 온 터이라 우리는 버스 종점까지 더 내려가야 했다.
하지만 이런 물에 빠진 꼴로 공용 버스를 탄다는건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주차장 옆 커다란 정자나무 아래에 작은 포장마차 간이 식당이 보였다.
지붕은 텐트비닐, 사면은 모기장을 둘러 치고, 내부 바닥에 깐 잔자갈 위에 테이블 서너 개와 의자가 보였다.
"와! 저기다! 저곳에서 요기를 할 수 있겠다."
눈이 번쩍 뜨여서 우리는 그 천막 안으로 들어 갔다.
"비를 많이 맞으셨네요...~!"
젊은 부부가 우리를 맞았다.
"여기서 식사를 할 수 있습니까?"
"라면 밖에 안되는데요"
"오! 라면!!! 좋지요!"
"라면 두 그릇 주시죠"
라면을 끓이는 동안 손수건을 꺼내어 옷 위로 어께와 등 배를 닦아서 짜내기를 시작했다.
젖은 바지도 수건으로 닦어서 수건이 젖으면 '꼬옥~' 짜서 다시 닦았다.
한 참을 닦아내니 조금 보기에 낳아졌다.
라면이 커다란 남비에 담겨 하얀 김을 뿜으며 식탁에 놓여 졌다.
묵은 김치 한 사발이 반찬의 전부이지만
뜨거운 라면을 젓가락으로 떠서 후루룩 들이마시는 그 순간
온 몸에 짜르르 전율이 흐르며 세상 그 어떤 맛에도 비길 수 없는 최고의 맛과 향기가 온몸으로 퍼졌다.
"우와!" "세상에~~~이렇게 맛있는 라면이 또 있을까?"
한 젓가락에 시장기가 가시고 행복이 밀려왔다.
시야가 뜻밖에 밝아지고 힘이 솟아났다.
이처럼 맛있는 라면이라면 끝없이 먹을 수 있겠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이었다.
아니 평생 먹어본 음식 중에서 최고의 음식이었다.
아내의 허리색에서 물젖은 만원짜리 한 장을 주었더니
육천원을 거슬러 주었다.
2000원짜리 식사.......가장 행복하고 최고의 맛있는 식사는 그렇게 값도 쌌다.
(2010년 8월 31일 ....정년퇴임 후 3년이 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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