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웅 찻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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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란처럼 살아온 나의 이야기/14. 어린이 사랑의 눈이 뜨이고

14. 어린이 사랑의 눈이 뜨이고

정일웅 찻집 2016. 7. 6. 14:21

14. 어린이 사랑의 눈이 뜨이고

 

사흘째 되던 날 새벽 , 4시경에 눈이 떠지고 누어있는 내 눈앞에 꿈 결 같은 정경이 펼쳐졌다.

밤송이처럼 긴 머리카락에 뼈만 남은 초라한 아이들 ...

'엿쭈웅 쉬어........'

앙상한 그 목소리...

가마니 위에서 뒹구는 아이들...

우루루 내 곁에 몰려와 나의 바지 가랑이를 만지던 손등 튼 고사리 같은 손.........

나는 갑자기 정신이 확 맑아졌다.

 

'아니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보고 싶다'

갑자기 그 꼬맹이 녀석들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

'그들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나의 정신이 언제부터 이토록 타락하여졌는가?'

'나는 그들보다 더 가난한 가운데서 성장하지 않았는가?'

'그 아이들을 어루만져 주고 싶다.'

'그 아이들이 바로 나 자신의 어제의 모습이 아닌가?'

 

사흘이나 방구석에 틀어박혀 나뒹군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가자! 가자! 어서 빨리 가야지!'

'그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부엌으로 나갔다.

 

큰 검정 솥 속에는 따뜻한 물이 아직 있었다. 길게 자란 턱수염을 말끔히 깎고 세수를 하였다.

일찍 일어나 부산을 떠는 기척에 잠귀 밝으신 어머니가 깨셨다.

 

"너 웬일이냐?"

 

"어머니! 저 오늘부터 학교에 출근 할랍니다. 이불 한 채하고 옷 좀 챙겨 주세요"

어머니의 환하게 밝아지시는 그 모습을 보며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순창행 첫차를 타고 학교를 향하는 내 마음을 새로 태어난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하니 완행버스가 너무 느리게 느껴졌다.

'갈담'에서 내려, 낯익은 그 산길을 따라 성큼성큼 걸었다.

 

산 속의 새들이 반갑게 인사를 하는 듯 나를 향하여 재잘거렸다.

두어 구비 산허리를 돌아섰다.

 

멀리 홀로 외롭게 서 있는 정자나무가 보인다.

산기슭에 안개가 아직도 걷히지 않은 이른 시간이라서 산골의 적막은 더욱 쓸쓸했다.

뿌연 안개 사이로 정자나무의 자태가 점점 뚜렷해 져 갔다.

 

정자나무아래서 무언가 작은 것들이 고물고물 움직인다.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더니 뛰어오는 게 아닌가!

꼬맹이들 셋이 멀리서 뛰어 오고 있었다.

상당히 빠른 시간에 그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 곁에 다가왔다.

나에게 다가온 그들의 얼굴엔 반가움과 벅찬 감격으로 웃음과 눈물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한 아이가 손등으로 눈물을 쓱 문지르며 옆의 아이를 쥐어박는다.

"거봐! 내가 온다고 혔쟈녀!"

'엿쭈웅 쉬어'하던 키가 좀 큰 그 깡마른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가 나의 이불 보따리를 냉큼 빼앗아 익숙한 솜씨로 등에 메었다.

어리둥절해 진 내가 물었다.

"너희들 어쩐 일이냐?

"어지깨랑 그직깨랑 아침마다 여그서 선생님 오시면 짐 받아 각고 갈라고 기달렸어라우"

! 이 작은 아이 들의 간절한 바램 !

나는 그것을 외면한 채 나의 허영과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사흘 동안이나 방안에서 뒹굴고 있었다는 말인가?

 

내가 그들을 외면하고 있을 때 그 작은 어린이들은 못난 나를 자기들의 선생님이라고 굳게 믿고 나의 부임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을까?

 

새벽에 이곳에 와서 저 쪽 산모퉁이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행여나 주름 잡힌 검정색양복을 입은 그 선생님이 나타나길 기다리다가 학교 시작 시간이 되면 되돌아가던 그 발걸음이 얼마나 허전하였을까?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뜨거운 액체가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끼며 걷고 또 걸었다.

볼을 스치는 바람이 시원했으며 나의 마음속에는 이곳의 작은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한없이 샘솟아 오르고 있었다.

이불 봇짐을 걸며 메고 뛰어가는 아이들은 신이 나서 산 쪽을 향해 외쳐 대고 있었다.

"얏들아---!"

"우리 선생님 오셨다--!"

산새들이 나를 반기며 환영의 노래를 불러 주었다.

 

나의 교단생활은 이렇게 그 첫 출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