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남원 아영중학교
중등학교로의 진출은 나에게는 성취욕구 달성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고, 신분상승이라고 남들이 이해하는 듯 주위사람들로부터도 부러움의 눈총을 받게 되었다.
아내도 나의 합격과 중등학교 진출에 기쁨을 같이하였으나 아영중학교에 발령을 받고 보니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떨어져서 살아야하는 아픔을 감수해야 하였다.
아내의 아픔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오직 남편 하나만을 의지하고 남편의 사랑에 모든 아픔과 어려운 현실들을 묻어놓고 살아가는 '우남'에게는 남편이 자기 곁을 떠나 머나 먼 산골에서 하숙생활을 한다는 것이 주는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풀무질을 하여 왕겨를 때어 밥을 짓는 것도, 빨래를 하는 것도, 학교에서 근무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것도, 집안 청소를 하는 것도, 아무런 기쁨이 없었다.
오직 남편이 있어야만 시어머니도 시누이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지는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신혼 시기였다.
그런데 갑자기 닥친 예상치 못한 이별이라니....
첫아이가 100일이 지나기도 전에 이산가족이 되어 살아야하는 현실 앞에서 아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보호하고 의지하고 바라만 보아도 든든한 남편이 집안에 없는 외로움이었다.
혼자서 아이와 함께 밤을 맞는 아내는 고독을 견디지 못하여 날마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밤을 보내었다.
아내는 남편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에 눈물로 흥건히 젖은 편지를 매일 써서 붙이곤 하였다.
나 또한 편한 마음으로 생활할 수가 없었다.
아내에 대한 연민의 정, 아기가 보고 싶은 아빠의 마음, 항상 건강이 좋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걱정, 말씨도 경상도에 가까운 생소한 지역에서 새로운 인간들과의 접촉에서 이유 없이 서걱거리는 이질감이 나의 마음을 편치 않게 하였고
정치적인 소용돌이에 교사들까지 휘말려 밤마다 마을 회관에 나가서 유신정부의 주민사상교육과 동태파악을 하여 보고하여야 하는 암울한 현실이 불안한 심기를 더욱 돋우던 시절이었다.
매일 매일 우체부가 가져오는 아내의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밤늦은 시각에 아내를 위로하고 달래는 나의 답장을 쓰노라면 새벽 두세 시가 되기도 하였다.
아영중학교의 교장 ‘서 용태’씨는 교감생활 12년 만에 늦깎이 교장으로 첫 발령지로 여기에 부임하여 지독한 고집과 아집으로 학교경영을 하였고 모든 결정은 오직 교장이 혼자서 내리는 강직하고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이었다.
청렴결백하여 어떤 일에도 금전적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오직 모든 학교의 일을 자기 식의 교육관에 맞춰서 철저히 운영하는 교육자였다.
술을 좋아하여서 매 식사 때마다 반주로 소주를 물 컵으로 한잔 씩 마시며 방과 후에는 많은 양의 소주에 취하여 나를 비롯한 직원들의 부축을 받고 관사의 방까지 가서 잠을 자곤 하였다.
그는 노래도 좋아하였는데 그가 부르는 노래는 '고향의 봄'과 당시의 국민가요 '좋아졌네' 두가지 외엔 아는 노래가 없었다.
술자리가 시작되면 고향의 봄을 다섯 번 정도 부르고 '좋아졌네'를 세 번 정도 불러야 술자리가 끝나곤 하였다.
그는 나를 무척 신임하였고 내가 부임하는 첫날부터 자기와 같이 식사를 하도록 하였고 자기의 옆방에서 내가 기거하도록 관사를 배정하여 주었다.
한밤에도 내 방과 자기 방의 경계로 된 벽을 주먹으로 '쿵쿵' 치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그의 방으로 건너가야 했고 내가 가면 대두병에 담긴 소주를 안주도 없이 마셔야 했다.
부임하고 곧 방학이 되었고 이듬해 교무분장을 발표하는데 뜬금없이 나를 '연구부장'으로 임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극구 사양을 하고 다른 선생님들의 오해가 없도록 해명을 하였으나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한번 미워하면 끝까지 노골적으로 미움을 표현하였고
남교사들 중에서는 유독 '김 필식' 선생님을 미워하였는데 나는 중간에서 입장이 난처하여 '김 필식'선생님을 그가 사랑하도록 만들기에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노력한 결과 7개월이 지나고서 그를 다시 신임하기 시작하였다.
"교정선생님!"
"왜?"
"어제 반상회에서요!"
"응!! 말 히바!!"
"‘필식’이 성님이요....!"
"멋이여!!! ‘필식’이 그놈이 어쪄???" 그는 ‘필식’이란 이름만 나오면 얼굴이 붉어지고 화가 펄펄 끓었다.
"‘필식’이 성님이.... 반상회에서 ......'우리 교장 선생님 같은 참 교육자가 없다'고 하시면서 교장선생님의 청렴결백하신 점...., 그리고 아이들 교육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하신점 등을 잘 설명하셔서 학부형님들 모두가 좋아하시데요!!!"
"‘필식’이 그놈이 그럴 리가 없어!!"
"아닙니다. 교장선생님!!! 필식이 성님은 교장선생님을 속으로 참 존경하고 좋아하고 있어요!!"
나는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그에게서 ‘김 필식’ 선생님에게 가지고 있는 왜곡된 첫 인상을 지우고 화해를 하게 만들기 까지 많은 세월이 소모되었다.
그는 특히 여교사들에게는 더욱 불친절하게 굴었다.
불친절하기보다는 무섭고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고 하여야 옳을 것 같다.
나는 수업을 하는 일 외에 매 주 마다 모조지 전지에다 '박 정희 대통령 어록'을 G펜으로 써서 한 주간에 열 장 정도를 갱신하여 게시하여야 했고 반드시 어록의 제목 위에서 좌우로 대통령을 상징하는 공작새의 문양을 그려 넣어야 했었다.
그는 철저히 '박정희' 찬양자였고 '박정희'식의 독재 방식으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강왈상' 교감 '김홍근'교무, '양승환', '최충호', '리사철', '백종철', '김필식', '황영', '이사천', '나혜영', '소병숙' '소병심', '김정주', '정진복', '김영환'서무주임 기능직-장주사, 김주사,등 많은 선생님들과 생활하는 동안 어느새 여름이가고 겨울방학이 왔다.
방학동안에 임실교육청에 들려보았다.
낯익은 장학사들의 얼굴이 눈에 띄고 모두 반갑게 맞아 주었다.
초등장학사는 물론 중등장학사들도 내가 중등으로 진출한 것을 기뻐하며 맞아주었다.
"어이!! 정선생! 나....좀 보고가!"
중등교육과의 오성근 장학사님이 나에게 말했다.
‘오 성근 장학사는 나의 교생실습 때 지도안 작성을 가르쳐 주셨던 연구사님이고
‘최 우남’의 중학교 은사님이었다.
"아이! 내년에 말이여 임실로 들어 올랑가??"
"예????!! 임실로요?? 그럴 수가 있는가요?"
갑자기 심장이 ‘쿵’하고 뛰었다.
"내가 한번 히볼팅게 딴디가서 암 말도 허지말고 몰른 티끼허고 카만이 있어바!"
"하이고 너무나 고마우신 말씀을 .......장학사님 ! 감사합니다.!!!"
"제가 어떻게 혀야능가요?"
"내가 다 알어서 헐팅게 정선생은 기양 암말또 말고 카만이만 지달러보랑게!"
"............................"나는 눈만 껌먹였다.
"하하!!! 내말을 잘 못알아듣겄제?? 하기사 못알아들을 것잉게 소문만 내덜 말고 카만이 있어보랑게!!!"
"...................."
"오늘 여그오기 잘 혔 네!!! 정선생! 함바트라먼 내가 정선생 생각이 안날지도 몰랐는디....."
"..............."
"오늘 오기를 잘 혔 서!! 나도 인자 문제가 풀링구만!!"
"................."
나는 그가 웃으며 만족해하는 표정을 짓는 것과 그가 하는 말의 뜻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오 성근’ 장학사님은 평소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으며, 결코 실없는 소리를 하시는 분이 아님을 나는 잘 안다.
‘하느님께서 또 나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시나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
2월 25일
중등학교 인사발령이 전북일보에 대대적으로 나왔다.
혹시나 하고 봤지만 내 이름은 거기에 없었다.
행여나 다른 곳에 있을까? 생각하며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어보았다.
하지만 나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
허탈한 마음을 누구에게 전해야 하는가?
그 때 '오성근' 장학사님이 뭔가 착각을 하셨거나 아니면 중간에 일이 잘 못 되었지 않는가, 생각하며 실망이 컸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 이 말을 한단 말인가?
오성근 장학사님에게 다그쳐 물어 볼 수도 없지 않은가?
....................
‘이 사천’ 선생님은 남원여중으로 발령을 받고 떠났다.
학생들이 버스정류장에서 마을 어귀까지 양편에 도열하여 울면서 선생님을 보내드렸다.
선생님도 울면서 떠났다.
울면서 떠나는 ‘이 사천’선생님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아! 나는 또다시 이곳에서 1년을 더 있어야 한단 말인가?
누구보다 실망한 것은 살짝 귀띔을 들은 내 아내 '우남'이었다.
자기의 중학시절 은사였던 '오성근' 장학사님을 잘 알고 있었고 교육청에서 같이 근무도 하였기에 '우남'의 마음속엔 철석같은 믿음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이제 어이 하리!............
새 학년이 시작되었다.
나는 3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고 연구부장은 계속 맡게 되었다.
잊자! 모든 것을 잊자!
남들은 4년, 5년, 6년간이나 이곳에서 고생을 하지 않은가?
또한 한 시군에서 3년 이내에는 시 군간 인사 발령은 못하지 않은가?
이제 겨우 1년 3개월 만에 '임실'로 돌아가다니 욕심도 지나치다.
나는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김 영주'선생님과 매일 저녁 많은 술을 마셨다.
어제 마신 술이 덜 깨었는지 뒤통수가 당기고 뱃속이 불편하였다.
하지만 근무에 충실해야 한다.
1976년 3월 5일 아침 학급조회를 마치고 나와서 물을 많이 마셨다.
아침식사를 못하고 나왔기에 목이 탔다.
점심시간에 교장선생님과 점심을 먹으며 소주를 한 컵 또 마셨다.
술이 들어가니 속이 좀 편안해 짐을 느꼈다.
5교시 수업은 없었으나 교무실에 와서 의자에 앉아 책상에 팔뚝을 얹고 이마를 대고 엎드려 잠을 청했다.
.....................
심상치 않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노발대발하는 교장선생님의 목소리가 복도를 건너와 교무실에 있는 나의 귓전을 울렸다.
'이크! 또 누가 교장님의 비위를 잘 못 건드렸구나!' 생각하며 자세를 바로하고 앉았다.
..........."정 일웅이 이리 오라고 혀!!!"...............교장선생님의 성난 목소리가 분명하였고 그 목소리에 나의 이름을 분명히 들었다..........
....................
"정 일웅!!!!"
커다랗게 고함을 치며 나의 이름을 부르는 그는 다름 아닌 교장선생님이었다.
.................
교장선생님은 극도로 화가 난 모습이었고 그의 인상에 그토록 노기가 서린 적을 아직 본 일이 없었다.
"정 일웅!!! 자네.....!"
"예???"......"저요???"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더니 말이여 ‘정 일웅’이 자네가 말여!! 허이 참 !! 기가 맥혀! 자네가 말여...이렇게 나를 속여도 되능거여???"
"........................."
나는 어리둥절하여 말문이 막혔다.
"자네 교장실로 따라와 바!"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그를 따라 교장실에 들어섰다.
‘서 용태’ 교장선생님의 표정에 근심과 실망이 가득하였다.
그는 맥 빠진 목소리로 말하였다.
'자네 지금 바로 임실교육청으로 가봐!"
"왜요?" "무슨 일이 있나요?" 나는 시치미를 떼고 차분하게 말 하였다.
"자네 지사 중학교로 발령났디야!"
"지사 중학교라고요?" '올것이 왔구나 '나의 맘속에 환희의 물결이 일렁였다.
"내일 지사중학교 개교식이라서 지금부터 할일이 많티야! 발령장은 다음에 보내 준디야!"
"빨리 가 부아(봐)!"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고 눈물이 금방 쏟아 질것 같은 ‘서 용태’ 교장선생님의 표정을 남겨 둔 채 교장실을 나와서 곧 바로 '인월'에 가는 버스를 탔다.
'인월'에서 남원까지 와서 다시 전주행 완행버스를 갈아타고 임실에서 하차하여 임실교육청을 향하는 나의 두 손에 힘이 불끈 쥐어졌다.
어제 과음한 탓으로 한 숨 푹 자고 나면 꼭 좋을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