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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란처럼 살아온 나의 이야기/35-1. 나의 처남 '최 용준'신부님

35-1. 나의 처남 '최 용준' 안토니오 신부님

정일웅 찻집 2016. 8. 4. 16:15


35-1. 나의 처남 최 용준’안토니오 신부님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신행을 마치고 온 날 밤이었다.

10시경에 밖에 인기척이 나고

여보세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굴까? 궁금해 하며 문을 열어 보았다.

용준이가 서있는 것이다.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반갑다고는 할 수 없고 무섭다고도 할 수 없는

야릇한 기분이었다.

밤중에 웬일이야? 어서 들어 와~!”

그는 인사도 없이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주 더운 날씨는 아니라서 그를 널따란 마루방으로 데리고 가서 마주 앉았다.

웬일이야 이렇게 늦게?” 내가 물었다.

저는 이 결혼이 무효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사실 그렇지 않아요?”

우리 집안 식구들이 모두 반대하고 한 쪽에서만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결혼은 결혼이라고 인정 할 수가 없습니다

................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 지 난감하였다.

이 철없는 젊은 청년을 상대로 어떻게 무슨 말 부터 꺼내어야 할지 망설여졌다.

....

이 봐 용준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고 기르고 그 아이가 또 자라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이렇게 해서 인간의 삶이 이어지는 거 아냐?”

남자와 여자가 만났다고 해서 그냥 결혼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잖아?

결혼은 소꿉놀이가 아니잖아?”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하고 그 가운데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 사랑이 절정에 이르면 평생 헤어지기 싫게 되고 그러므로 평생 같이 살기로 약속하는 것이 결혼이잖아

결혼을 하는 가장 큰 전제 조건은 바로 사랑이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전략적으로 한 결혼의 종말이 얼마나 비참하게 끝나는지 영화나 소설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지

누나와 나의 결혼은

그야말로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준 가장 모범적인 결혼이라고 생각 해

누나네 가정의 부모님과 형제 일가친척들이 그렇게 반대를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한 것은 누나와 나의 사랑이 얼마나 절실하고 진실했는지 만 천하에 공개해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위대한 사랑의 승리였어.....

 

그 모진 반대와 구박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이길 만큼 누나의 나에 대한 사랑이 컸고

나 또한 누나를 그 이상으로 사랑했기에 모진 반대를 다 이겨내고 결국 결혼을 한 거야

누나와 나의 결혼은 온 세상 모든 사람들 앞에서도 자신 있게 사랑의 승리로 결혼한 모범적 결혼이라고 장담 할 수가 있어

이제 머지않아 용준이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나고 서로 사랑을 하게 되면 나와 누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했는지 알게 될 거야.

용준이가 지금은 갑자기 떠난 누나를 생각하면 섭섭하고 허전하긴 할 거야

하지만 우리가 멀리 떠난 것도 아니고

우리는 항상 용준이 곁에 있을 것이고 자네의 앞으로의 대학교진학이나 그 밖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책임지고 도와줄 테니까 걱정을 하지 말고 섭섭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바라네.....

 

용준이는 할 말이 없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반박할 말이 궁색한 거였다.

...........

그 얘기는 이제 이만큼만 하고

자네 바둑 잘 둔다며? 나에게 바둑 한 수 가르쳐 주지 않을랑가?”

나는 바둑판을 가져왔다.

자내가 아마 2급 정도라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나보다 훨씬 고수이니 내가 먼저 넉 점을 깔 게 한 판 두어 주게

 

나는 흑을 잡고 4점을 깔았다.

바둑판을 갖다 놓으니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용준이는 초등학교 시절 사시 공부를 하느라고 자기 누나(나의 장모님) 집 와 있던 외삼촌에게 바둑을 배웠단다.

한 점 한 점 놓은데 매우 신중하였다.

나는 설마 넉 점이나 깔았는데 지기야 하겠는가 생각하며 두기 시작하였다.

바둑알이 많이 깔릴수록 점점 나의 허점이 들어나고 용준이의 바둑이 힘이 있어 보였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열심히 두었다.

바둑이 거의 막판에 이를 즈음 판세는 이미 용준이의 승리로 굳어가는 것이었다.

......

계가를 해 보았더니 내가 넉 점을 깔고도 열두 집 정도가 모자랐다.

바둑이 끝나고 보니 새벽 1시가 넘었다.

용준이는 일어서서 돌아갔다.

................

이튿날 저녁 10시 쯤 또 용준이가 왔다.

밤새 생각해 봤는데요 이 번 결혼은 인정할 수가 없어요....”

이런 미치고 환장할 일이 있는가?

어제 그만큼 나에게 설득을 당하여 납득하고 포기할 줄 알았는데 그의 집요한 성격은 바둑

두는 스타일과 같았다.

결국 결혼은 사랑의 승리라는 나의 설득력 있는 설명으로 일단 끝이 났다.

나는 또 바둑판을 들고 왔다.

! 이제 결혼 무효 이야기는 이제 이 쯤 하고 바둑이나 또 한 판 뒤더라고....

............

오늘은 지지 말아야지 생각하며 내 딴에 열심히 두었다.

곰곰 생각도 해보고 실착을 하지 않으려고 온갖 머리를 다 썼지만 결국 다섯 집을 지고 말았다.

끝내기에서 항상 용준이가 선수를 놓치지 않는 바람에 나의 집이 쪼그라지고 말았다.

바둑이 끝나고 용준이는 돌아갔다.

.................

다음 날

이제는 오지 않겠지 생각하고 최우남과 어제 밤의 이야기를 하려하고 있는데

용준이가 또 찾아 온 것이다.

그의 표정을 아직도 밝아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번 결혼을 저는 인정 못하겠어요~!”

............

그 날도 사랑의 위대한 힘에 대한 얘기를 했고

내가 알고 있는 한 여러 사람들의 사랑의 승리 얘기를 했다.

그러고 나서

결국 또 바둑을 두게 되고 내가 넉 점을 놓고도 3집을 졌다.

..............

그 다음 날은 오지 않았다.

 

그 다음 날 그는 또다시 같은 표정으로 밤늦게 나를 찾아왔다.

결과는 첫 날과 같았다.

바둑을 두는 것으로 끝났다.

 

며칠 동안 그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머지않아 있을 대입 예비고사 공부를 하는 모양이다.

 

나는 일요일이면 바쁘다.

성당 사무장 겸 사목회 부회장, 교육부장이 아니면 선교부장까지 겸직을 하고 있으므로 바쁘지 않을 수가 없다.

주일 미사 해설을 해야 하고 성가를 부르도록 올겐으로 반주를 쳐야하고

미사가 끝나면 교무금 수금을 하고

봉헌금을 세어서 장부에 정리하고 신자들의 교무금을 받고 영수증을 해 주고

각 공소에서 오신 교우들과 공소의 사정을 들어주어야하고

9개 공소의 방문 일정 짜기와 공소 회장님들과의 면담

예비신자 교리반 준비와 견진성사 준비 이거자(移去者), 이래자(移來者)의 교적 정리 각종 증명서 발급 각종 장부정리.....등등

성당에서 하는 각종행사의 기획과 준비를 사목회장과 각 부장들과 상의를 해야 하는 것 등등

항상 바쁘다.

 

여름이 다 가고 가을이 깊어지는 것을 성당의 플라타나스 잎의 색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어느 일요일

교중 미사가 끝나고 성당의 의자들을 정리하고 사제관으로 가려고 성당 옆문을 열고 나왔다.

저기요 매형!”하는 소리가 났다.

이게 누가 누구를 부르는 소리인가? 나는 설마 용준이가 나를 매형이라고 부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나를 매형이라고 부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사제관을 향하여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저기요~!매 형!”하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휙 뒤 돌아 보았다.

~~! 이게 웬 일인가?’

용준이가 나를 매형이라고 부르고 있지 않은가?

나는 환하게 웃음을 짖지 않을 수 없었다.

용준이가 나를 처음 매형!’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 ‘용준이구나! 그래 이렇게 일찍 어쩐일이야?”

용준이는 나를 매형이라고 불러 놓고 열적은 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저기요~! 나에게 올겐 좀 가르쳐 주실 수 없어요?”

용준이가 올겐을 배우고 싶다고? 그것 참 잘 생각 했어 당장 오늘부터 시작하더라고..”

나는 사제관을 들려 대강 할 일을 마치고 용준이를 만났다.

텅 빈 성당 안에서 건반의 음이름 계이름 각 음계, 높은 음자리표와 낮은 음자리표의 관계

관계조 이동도(Do)법의 계이름과 화음......

키타를 치던 그는 대개의 이론을 알고 있었고 이해가 빨랐다.

.......

매일 와서 연습해도 되나요?

그럼~! 미사시간 외에는 거의 텅 비어있는 곳이니까 성가곡으로 연습을 시작해도 될거야!

거기까지만 말하였다.

그는 매일 10시 경이면 성당에 와서 올겐 앞에 앉아서 연습을 하였다.

가끔 들리는 소리는

당시의 성가책 51주여 임하소서를 연습하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4성부로 연습하는 것이었다.

! 대단하다. 처음부터 4성부 합창곡을 연주하다니......

.............

며칠이 지났다.

올겐 연습을 마치고 나오던 그는 나를 불렀다.

매형! 저 정식으로 성당에 다니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나요?”

반갑고 기다리던 말이었다.

! 그가 이렇게 변하다니

강수근신부님의 국악미사곡

자비송을 듣고 눈물이 핑 돌며 감동이 가슴 깊이 밀려들었단다.

...............

몇 달이 지나고 어느 날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성당 안에서 들려오는 올겐소리

완전한 4부 합창곡으로 연주하는 곡이 제대로의 빠르기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주여 임하소서>, <아 언제나 그리운>, <떡과 술의 형상에>, <오 지극한 신비여>, 등등 여러 곡이 완벽한 4부 연주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피아노 학원에 문 앞에도 안 가 본 최 용준이 아닌가?

피아노 체르니 30번은 최소한 끝낸 실력이라도 4부 합창곡을 쉽게 연주하기는 어려운데 .....

그는 천재였다.

 

교리교육을 열심히 받고 세례를 받았다.

성당에서 미사 중에 성가의 반주를 맡아서 했다.

거양성체를 할 때에 그가 스스로 만든 화음 진행곡을 연주하여 극적이고 환상적인 거양성체의 분위기를 만드는 연주를 하는 게 아닌가?

 

최용준은 전북대학교를 다니며 성당에도 열심하였다.

 

박중신 신부님께서 바둑을 좋아하셔서 최용준은 신부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바둑친구가 되었다.

전북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대학원에 입학하였다.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김 철호씨가 한국에 콘도를 짓고 전국에 엘더베리, 블루베리등 새로운 농산물을 재배하는 농장을 건설하며 한창 경제계에서 뜰 때였다.

김 철호씨는 장모님을 고모라고 부르는 먼 친척지간 이었다.

그가 최용준을 스카우트하여 서울의 자기 회사 기획관리실에 자리를 마련하여주고 전국의 엘더베리 농장을 관리하는 일을 맡겼다.

최용준은 어였한 직장인이 되어 전국을 누비고 다니며 엘더베리 농장의 관리를 하였다.

강원도에서 제주도까지 십 여 곳의 농장을 누비고 다니며 농과대학 석사로서의 실력을 과시하고 다녔다.

바쁘게 돌아다니면서도 시간만 나면 성당에 들렸고 주로 빈 시간은 임실 성당에서 보냈다.

임실성당에서 사무장을 하던 1년 후배인 서 정현 시몬과 무척 가깝게 지내었다.

조 정오신부님께서 임실 본당 주임신부님으로 오시고 성당에 더욱 열심히 다니더니

부모님도 나도 모르게 신학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친구 서정현 시몬과 함께 둘이서 동시에 신학생이 된 것이었다.

조 정오 신부님께서는 임실이라는 시골에서 두 명의 아들 신부를 얻게 되었다.

 

나와 나의 아내는 물론 최 용준의 부모님과 동네의 모든 친척들이 깜짝 놀라서 야단법석을 이루었다.

최씨 집안의 5형제중 가장 맏이였던 종손 최 정태(아버지)씨의 외아들인 최 용준이가 신부가 되려고 신학교에 들어갔다는 소문은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최 용준의 부모님은 신부가 되면 결혼을 못 한다는 것 한가지만을 알고서 최씨 집안의 대를 끊는 일은 할 수가 없다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작은 아버지의 아들 최 병춘씨는 나를 찾아와서

정서방 때문에 야가 신부가 될라고 허니까 책임져야혀~!!”

이 집 대가 끊기는 것은 정서방 탓이여 하며 나를 원망하였다.

그러면서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아이 정서방! 용준이 신부되는 것까지는 안 말길팅게 우리만 알고 비밀로 어디서 아들 하나만 맹글어 보라고 허면 어떨까?”

 

기가 막히고 웃을 수도 없는 그런 말을 하는 최 용준의 사촌 형의 심정을 알만 했다.

..............

최 용준의 어머니는 토속신앙을 지닌 소박한 농부의 아내였다.

아들의 소식을 듣고 셋째 딸과 최 우남의 작은 어머니와 점쟁이를 찾아갔다.

점쟁이는 최 용준의 사주단자를 펴보더니

대뜸 하는 말이

이 놈 중() 될 팔자구만! 중 안 되면 죽겄어!”하고 말 하는 것이었단다.

이 말을 들은 박 시약씨’(장모님 이름)는 하는 수 없이 이나 신부나 장가 안가기는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죽는 것 보다는 났지.....하시며 포기하기로 하였다.

 

나의 아내 최 우남최 용준신학생의 뒷바라지를 다 했고 드디어

1989120최 용준’ ‘서 정현’ ‘양 석현’ ‘박 종탁’ ‘이 사정’ ‘김 선태다섯 명의 신부님이 함께 사제서품을 받았다.

외할아버지의 유전인자를 이어받아 최 용준신부님의 머리가 거의 대머리가 된 늙은 새 신부님이었다.

서품을 받고 신부님이 된 최 용준신부님은 서 정현신부님과 함께 임실 성당에서

박 인호베드로 신부님이 계실 때 첫 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최 용준 신부님은

첫 발령이 중앙성당 보좌로 6개월 계시다가

원평본당 주임신부로, 거기에서 대야본당, 장계본당, 금마 본당,

미국 뉴욕 스테이튼 아일랜드 성당 교포사목을 마치고 전주 화산동 성당, 교구청 사목국장, 군산 오룡동성당을 거쳐 지금은 독일 프랑크프루트 교포사목을 하고 계신다.

 

이야기가 한참을 빗나갔지만 다른 때 말 할 기회가 없을 거 같아서 여기 이렇게 장황하게 세월을 추월하며 늘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