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웅 찻집
등대찻집에 오심을 환영합니다.

일기처럼 쓸 이야기가 있는 날

구월이 오면 안도현

정일웅 찻집 2024. 9. 19. 21:01

구월이 오면

                안도현

 

그대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 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

아내와 나

단 둘이 한 집에서 살아 온 지 몇 년이 됐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내가 고아가 됐을 때

그 때 부터 

나는 아내와 단 둘이서만 살고 있는지가 

벌써

이십년에 가까워지고 있구나

이러다가

내가 세상을 뜨면

67평 아파트

이 넓은 방 안에서

아내 홀로 얼마나 외로우리

토라지고 긁어대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감정도 없을 것

잔소리도 사랑이요

성냄도 사랑이요

미워함도 사랑이다

 

오늘

아내가 성경공부하러 교구청에 가고

나 홀로 점심을 챙겨 먹으면서

문득 아내의 고마움을 느꼈다.

나에게 잔소리를 해 주고

나에게 곁에 있어달라고 짜증을 부리는 아내

그 아내가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성당에 나가면

홀로 사는 영감들이 많다.

그들의 삶이 얼마나 삭막하고 적막한지

그들의 표정만 보아도 안다.

 

성당에 가면

홀로 사는 할머니들이 더 많다.

그들이 웃어도 웃음이 아니요

그들이 농담을 하여도 기뻐서가 아니다.

 

좋거나 싫거나

둘이서 살고 있을 때

 

다정하게 웃고 

친절하게 말하고

사랑으로 마음을 주고 받아야 하겠다.

 

오늘 저녁 늦게 운동하거 나가서

고속버스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2인분 시켜놓고

배부르게 먹으면서

앞에서 먹어주는 아내를 바라보며

나 혼자 말 했다

 

"당신이 내 앞에 있어서 

나는 행복해

여보

사랑해"

아내는 내가 맘속으로 하는 내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