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웅 찻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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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흉내 내기

낡은 구두

정일웅 찻집 2007. 8. 1. 12:30
 낡은 구두

나와 내 친구는 어느새 많이도 늙었다.
젊었을 적엔 얼굴에 화장도 자주하여
콧등이 반짝이고 잔주름 하나도 없었는데
이젠 찌그러지고 뒤틀리고 주름져 이쁘지도 않건만
우리의 주인은 아직 우릴 사랑하시나보다.

거울을 보듯 꼭 닮은 나와 내친구는
속이 텅 빈 껍질만 존재할 뿐
우리의 속을 채워줄 주인을 기다리는 동안
항상 마주보며 말없이 고독을 달래곤 하였다.

나의 주인과 내 친구의 주인도 우리처럼
거울을 보듯 서로가 꼭 닮았다.
강인한 뼈대를 지닌
굳센 힘이며 강인한 의지며
따뜻한 마음까지
그리고 몸의 향기까지 똑같이 닮았고
그런 주인을
우리도 많이 많이 닮아가고 있었다.

언제나 얇은 옷 하나만을 몸에 걸치고
사계절을 나는 주인님이
우리의 품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에겐 생명이 잉태하고
주인님께 배운
인고의 삶에
용감히 도전하는 나의 평생 행보가 시작된다.

우린 주인님을 위하여
가시밭길
흙탕길
자갈길
아스팔트위
차가운 얼음위도 마다하지 않고 주인님을 모셨다.

주인님의 체취가
우리의 온몸에 베어
주인님이 우릴 떠나고 없어도
님의 체취에 취하여 조금도 외롭지 않던 어느날

주인님은 콧등이 반짝이는 젊은 친구를 데려오더니

나와 내 친구를 아무 미련없이
비닐 봉지에 구겨 넣어
님을 모실 나의 공간에
화투장과 먼지와 병마개와 종이부스러기와 BC카드선전물과 고름묻은 붕대와 과자껍질과 야쿠르트병과 바이러스먹은 디스켓과 찢어진 청구서와 구멍난 펜티스타킹과 손톱부스러기와 머리카락과 오래된 바퀴벌래약과 화장지구겨진것들까지
가득 채워져서
나와 내친구는 서로 얼굴이 보이지 않고
깜깜한 어둠속에 서로 같혀
알지못할 곳으로 실려가고 있었다.

내 사랑하는 주인님의 체취는 아직도 내게 남아 감도는데

나의 주인은 나를 버리셨다.
그래도 난 주인님을 원망할 수 없구나

내 몸에 벤 주인님의 향기는 내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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