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웅 찻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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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란처럼 살아온 나의 이야기/3.전주중앙 초등학교 시절

3. 초등학교시절

정일웅 찻집 2013. 12. 28. 20:38

 

3. 전주 중앙초등학교 시절

19523

코 수건을 왼쪽 가습에 달고 중앙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1, 2학년 때에는 강당에서 여러 학급학생들이 여기저기 선생님 앞에 쪼그려 앉아서 공부하였다.

 

3학년 때부터 교실이 생겼다.

3학년 담임을 발표하는 운동장 조회에서 나는 가슴을 조이고 있었다.

제발 '호랑이' '똥 싼 바지'라는 그 선생님만 담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나는 완전히 실망하고 말았다.

그 많은 선생님 중에 하필이면 3학년 5반 담임이 바로 그 호랑이선생 '이 한충'선생이란다.

나는 첫날부터 담임선생의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머리에 기계독(백선이라는 곰팡이 병)’이 올라서 박박 깎은 머리통은 마치 회 가루를 뿌려놓은 듯 허옇게 들떠있었고 목과 귓바퀴 가장자리에는 도장버짐이 올라 견딜 수 없이 가려웠다.

 

담임 이 한충선생은 나의 좌석을 맨 뒤쪽에 격리시켰으며 나와 아이들이 접촉하는 것을 기피하도록 만들었다.

저 대가리 썩은 새끼 너는 저 뒤로가 혼자 앉아 임마!”

이 한마디는 대못처럼 내 심장에 박혀 빠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 머리의 기계독을 낫게 하기 위하여 학교에서 돌아오면 마늘을 짓이겨서 머리에 처발랐다.

후끈거리는 통증이 골통까지 스며들고 마늘즙이 마르며 머리를 옥죄는 아픔이 견딜 수가 없었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왔고 이런 나를 바라보는 엄마는 내가 안쓰러워 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자기도 우셨다.

기계독은 얼마나 지독한 균인지 그토록 독한 마늘에도 죽지 않았다.

선생님은 나를 '머리에 곰팡 난 놈' '대가리 썩은 놈'이라고 불렀으며 그 말은 나의 별명이 되어 아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놀려대고 나의 곁에 잘 오지 않았다.

 

나는 잘 참았다.

아픔도, 배고픔도, 슬픔도, 창피함도, 담임선생님의 경멸에 찬 눈총도, 아이들의 놀림도,.................

나는 죽은 듯이 공부만 하였고 전주시 교육청 시행 학력고사에서 전체 3등을 하여 중앙초등학교의 체면을 세워주었었다.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이런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고 옆 반 선생님이 나를 칭찬하여 알게 되었다.

 

나의 담임은 나의 성적이 좋은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고 나는 느꼈다.

 

<하모니카 배우기>

 

선생님은 무서웠지만 나는 학생들에게 기가 죽지 않았다.

첫째로 남보다 공부를 잘 하였고 그림 그리기나 노래 부르기, 팽이치기, 딱지치기, 다마치기(구슬치기) 등등 못 하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님 외에 그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못하였다.

 

쉬는 시간에는 아이들을 잘 웃겼고 점심시간에 공놀이나 가이생 놀이, 올챙이 놀이 등 모두 잘 하였다.

 

어느 날 친구 양 공달이 하모니카를 학교에 가져와서

삐뻬삐뻬 삐리릭 삐리릭

불고 다녔다.

공달이는 그 악기로 노래하는 법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물건이었다.

 

나는 하모니카로 노래를 연주하는 악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내에서 고등학교 형이 부는 것을 보고 너무나 부러웠던 악기였다.

 

나에게 하모니카는 매우 신기하고 정말 가지고 싶은 악기였다.

 

공달이의 그 하모니카가 정말 부러웠다.

 

도저히 나의 형편에 하모니카를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든지 나는 그 하모니카를 가지고 싶은 마음에 온 정신을 다 팔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가 제일 가지고 싶은 것은 많은 딱지와 주머니에 두둑한 구슬이다.

공달이는 딱지치기도 잘 못하고 다마(구슬)치기도 잘 못하였다.

구슬 따먹기를 하기만 하면 그는 금방 다 잃어버리고 만다.

물론 공부도 잘 못하였지만 마음씨는 매우 착한 아이였다.

하루는 하교 길에 공달이를 불렀다.

! 너 그 하모니카 어디서 났냐?”

삼춘이 주고 갔어~”

내가 유리 다마(구슬) 신주머리로 하나 가득하고, ‘오까이리’(그림이 있는 딱지)신주머니로 하나 가득하고....또 내가 가진 쇠다마 쇠뺑이 모두 다 합치면 한 신주머니가 되는디 ....그것 다 줄게 하모니카하고 바꾸자..어쩔래?

 

나는 공달이를 나의 집으로 데리고 와서 내가 그 동안 따서 감춰둔 보물을 모두 꺼내 들고 그에게 보여 주었다.

 

신주머니로 3개 가득 든 유리구슬, 쇠구슬, 쇠팽이, 나무팽이, 딱지를 모두 보여주자 공달이의 눈이 번쩍 띄었다.

 

나한티 이것을 다 준다고??”

그려 모두 다 줄팅게 하모니카하고 바꾸자

참말이지?”

그럼 참말이고 말고

공달이의 눈이 번쩍였다.

 

신주머니 입구의 고무줄을 늘리고 들여다 본 그는 번쩍이는 쇠구슬. 알록달록한 유리구슬, 쇠팽이, 나무팽이를 보더니

 

너 거짓말 아니지?”

맹세할게 절대로 거짓말 아닝게 안심혀!”

공달이는

자기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하모니카를 주고 이 모든 것을 갖는다고 생각하니 기쁘기 한이 없는 모양이다.

그러먼 끼리 허자!”공달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러자 절대 딴 말 안헐게

 

그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나서 하모니카를 나에게 주고

묵직한 보물주머니 세 개를 들고 의기양양하여 돌아갔다.

 

공달이가 돌아가고 나서 나는 하모니카를 들고 마당의 커다란 은행나무 위로 올라갔다.

나무의 커다란 기둥에서 벋어난 큰 가지에 말 타듯 올라 앉아 하모니카를 불었다.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는 악기였지만 그저 생각나는 대로 불기만 하면 학교에서 배운 노래가 곡이 되어 나왔다.

 

학교종, 아리랑, 나리 나리 개나리, 애국가, 반달 등등 신나게 불었다.

어머니와 동생, 동네 아주머니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자가 언지 저렇게 하모니카를 배왔디야? 그리고 저것은 누가 사줬디야?”

 

칭찬이 자자하였다.

 

학교에서 끝나면 하모니카를 불려는 욕심에 친구들과 놀지도 않고 곧장 집으로 와서 은행나무 위에 올라가 하모니카를 불었다.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지금은 작은 가지들이 모두 썩어 부러지고 밑동만 남아서 보잘 것 없는 나무로 되었지만

내가 새 들어 살던 그 은행나무집은 전주최씨 종대였고

지금은 전주 한옥마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 져서 500년이 넘는 수령을 지닌 그 은행나무는 보호를 받는 보호수(保護樹)가 되어있다.

 

나는 하모니카를 학교에 가져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에도 온통 하모니카를 부는 생각만 하면 배고픈 것도 잊어버렸다.

 

사흘이 지났다.

토요일이었다.

 

그 날도 나무 위에 올라가 신나게 하모니카를 불고 있는데

나무 아래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낯선 아주머니 두 사람과 양 공달이가 같이 나를 찾아 온 것이었다.

나는 나무 아래에 내려와 이들을 만났다.

공달이의 어머니라는 분이 말을 꺼냈다.

 

니가 정일웅이냐?”

야 사실은 그 하모니카를 야네 삼촌이 일본 갔다 오면서 사온 것인디 공달이가 너한테 이것을 받고 바꿨담성?”

~!”

미안 하다만 야네 삼촌이 또 집에 오는디 하모니카가 없으면

야가 얼마나 혼나겄냐?“

긍게로 이것 다 갖고 왔승게 도로 바꿔 주라잉~?”

 

신주머니 3개에 든 나의 보물을 모두 가져왔다.

공달이의 어머니는 참말로 상냥하게 말씀을 하셨다.

 

나는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였다.

나는 두 말 없이 하모니카를 드리고 나의 보물을 도로 받았다.

그동안 공짜로 하모니카를 배운 셈이었다.

그 하모니카 실력이 지금까지 남아서 나는 여행을 갈 때마다

하모니카를 들고 다니며 분위기에 맞춰 연주를 한다.

.............

밉고 무서운 선생님과의 지겨운 1년 세월이 흘렀다.

............................

4학년이 된 첫날 나는 날아갈듯이 기뻤다.

담임선생님이 박 진규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박 진규선생님은 과학 선생님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정말 인자하고 친절하신 선생님이셨다.

그가 우리 교실에 들어오셔서 첫날 나를 불러 교무실로 데려 가셨다.

"너 머리에 '기계충' 때문에 고생 많이 했구나"

선생님은 손바닥 만 한 크기의 묵직한 직육면체의 종이상자를 내 손에 들려주시면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와 같은 종이 상자를 많이 본 일이 있었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신사들의 머리에 바르는 초록색 포마드기름이었다.

"니가 정 일웅이지?"

"!"

"이것을 머리에 바르고 모자를 쓰고 다니거라!"

"????????"

나는 영문을 몰라서 아무 말을 못하고 멍한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얘야! 기계독은 곰팡이가 머리에서 사는 것이란다. 곰팡이는 공기와 접촉을 하지 못하면 죽는다!

 

다 나을 때까지는 공부시간에도 모자를 쓰고 있거라."

가슴 한 가운데가 뜨거워지고 눈물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선생님의 따뜻한 배려는 난생 처음 느껴보는 충격이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하고 깊이 머리 숙여 인사를 할 때 내 발아래 고였던 눈물이 쪼로록흘러 떨어졌다.

그 날 밤 향기 나는 포마드를 머리에 발랐다.

기름이 베개에 묻어 없어지지 않도록 헝겊으로 칭칭 머리를 감고 잠을 잤다.

 

마늘을 짓이겨 바르던 일을 생각하면 얼마나 상쾌한 일인가?

전혀 아프지 않고 콧속으로 살살 스며드는 향기가 너무나 좋았다.

학교에 갈 때는 모자를 쓰고 다녔고 공부시간에도 모자를 벗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난 후 머리를 감았다.

세상에 이렇게 신기한 일이 또 있을까?

나의 머리통에서 기승을 부리던 징글징글한 기계독이 깨끗이 나았다.

날아갈 듯이 기뻤다.

복도를 지나다 박 진규선생님과 마주쳤다.

선생님은 웃으며 내 머리를 따뜻한 손으로 쓱쓱문질러 보시며 웃으셨다.

나는 '대가리에 곰팡핀 놈', '대가리 썩은 놈'이라는 소리에서 해방이 되었다.

기계독이 나은 것은 나에게 또 하나의 활력을 불어 넣었다.

 

성당에는 열심히 다녔다.

교리반은 빠지지 않았고 요리문답도 잘 외웠다.

아릭스수녀님은 교리반 결석을 하면 빗자루로 종아리를 아프게 때리셔서 무서웠지만 우리들은 무척 존경하였다.

 

3년 정도 선배이던 유 장훈 몬시뇰, ‘이 순성 신부님후배이던 이 태주 신부님’ ‘범 선배 신부님’ ‘강 덕행 신부님과 그의 동생 강 덕창 신부님등이 같이 교리반에 다녔었다.

 

이들이 신부님이 되신 것은 아릭스수녀님의 신앙 교육 덕이었는지도 모른다.

 

유 장훈 몬시뇰님은 당시에도 너무 착하고 순하여서 틀림없이 신부님이 되실 줄 어린 우리들도 짐작하였다.

교리 시간이나 미사 도중에 떠들어서 벌을 제일 많이 섰던 강 덕창이 신부님이 되신 것을 생각하면 하느님의 성소(聖召)는 오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

내가 꿈에서도 하고 싶었던 일

그것은 신부님이 미사를 드릴 때 곁에서 도와주는 보미사’(복사)를 하는 것이었다.

 

<라틴어 복사>

 

복사를 하려면 우선 라틴어로 된 미사 통상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암기를 하여야 한다.

하루는 용기를 내어 수녀님께 복사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였다.

수녀님께서는 반가워하시며

이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우고 나서 합격하면

복사를 시켜 주신다고 하였다.

 

등사해서 지철기로 찍어 만든 조그만 수첩 모양으로 만들어진 책이었다.

책을 펴서 읽어 보았다.

철필로 써서 등사를 하여 만든 수첩 모양의 책....

또박또박 내려 쓴 한글의 라틴어 미사 통상문

뜻은 도저히 알 길이 없고 발음도 잘 되지도 않았다.

.................

 

제대 앞에 도착하여 처음 신부님과 주고받는 기도문이다.

신부님이 먼저 뭐라고 기도하시면 나는 1번 기도를 한다.

앗 데움 뀌일리 띠피깟 유벤뚜 뗌 메암

다음은 2번 기도...

귀앗띠에스 데우스 포리띠뚜또 메암 꽈레메 햅 쁘레스 또스 인체도 뚬 아쁠렛 짓미 이니 미꾸스

.............

...........

지금 자세히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미사 통상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라틴어로 외어야 하니까

엄청나게 긴 문장도 있었고 짧은 문장도 있었다.

 

도미누스 보비스쿰’......(주님께서 여러 분과 함께)

엣 쿰 스피릿 뚜 뚜오‘.....(또한 사제와 함께)....이 문장은

미사 도중 가장 많이 나오는 문장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각 국 언어로 번역하여 모든 신자들이 우리말로 미사를 드리지만

공의회 이전에는 라틴어만이 하느님의 언어라 하여 세계 어디서나 공통으로 라틴어 미사를 드렸던 것이었다.

 

고백의 기도처럼 긴 문장을 외우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이제와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라틴어 미사 통상문이 있기에 여기에 적어 본다.

고백의 기도의 라틴어이다.

 

Confíteor Deo omnipoténti

꼼핏데오로데오 옴니 뽀뗀띠

et vobis, fratres,

엣 포비스 프락뜨레스

quia peccávi nimis

뀌아 빽까비 미니스

cogitatióne, verbo, ópere et omissióne:

꼬지따시오네 베르보 오뻬레 엣 옴미씨오네

가슴을 치며

mea culpa, mea culpa, mea máxima culpa.

메아 꿀빠 메아꿀빠 메아 막시마 꿀빠

Ideo precor beátam Maríam semper Vírginem,

이데오 쁘레꼬르 베아땀 마리암 쎔뻬르 비르지넴

omnes Angelos et Sanctos,

옴네스 안젤로스 엣 싼또스

et vos, fratres, oráre pro me

엣 보스 프렉뜨레스 오라레 쁘로 메

ad Dóminum Deum nostrum.

앗 도미눔 데움 노스뜨룸

 

처음부터 끝까지 틀리지 않고 읽는 것만도 엄청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의 복사를 하기 위한 뜨거운 욕망은 조금도 지치지 않고 시간만 나면 읽고 또 읽었다.

 

...........

............

이렇게 힘든 라틴어를 무조건 외웠으니 그때의 나의 노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

 

복사 시험을 보고 합격을 한 것은 당시 최대의 행복이었다.

너무 기쁘고 가슴 벅찬 행복감에

천주님 감사합니다....”소리를 지르며 성당 마당을 뛰어 다녔다.

 

선배 복사들과 수녀님께 일주일간에 걸쳐 복사의 행동에 대한 교육을 받고 첫 번째 복사를 하던 날 그 감동을 잊을 수 없다.

 

빨간 복사복을 입고

무거운 미사경본을 두 팔로 가슴에 받쳐 들고 제대 뒤에서 제단 앞으로 나오는 그 영광스러움을 어디에 비할까?

새벽미사에서 내가 복사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얼마나 내가 대견스러웠을까?

 

나는 어머니를 따라 열심히 성당에 다녔다.

매일 새벽미사를 빠뜨리지 않고 성당에 다녔다.

아버지 병을 낫게 해 주시라고 천주님께 기도하며

9일기도도 열심히 다녔다.

눈길을 걸어서 숲정이 성지까지도 가고 묵주기도도 열심히 드렸다.

 

동이 트지 않아 어두컴컴한 길

커다란 나무가 숲을 이루고 큰 나무 사이에

부서진 탱크들이 여기저기 늘비하게 늘어서 있던 경기전을 지나

전동성당까지 가는 길을 혼자 가도 무섭지 않았다.

 

교리반을 가르치는 아릭스 수녀님께서

호수천사가 등 뒤에서 지켜주니 어두운 밤길도 무섭지 않다는 가르침의 힘이 컸다.

 

복사를 시작하여 중 3학년까지 복사를 하였다.

 

겨울 새벽 통금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새벽미사 복사를 하려고 깜깜한 경기전을 지나가도 호수천신이 따라오고 계시니까 무섭지 않았다.

 

학교 공부도 성당 보미사도 교리 반공부도 모두 열심히 하였다.

 

4학년을 마치던 날 존경하는 선생님과 해어지는 게 정말 싫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