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웅 찻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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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처럼 쓴 이야기

나를 감동시킨 막둥이의 편지

정일웅 찻집 2010. 5. 6. 13:02

 

2010년 30살이 된 막내아들이 올리는 어버이날 편지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막둥입니다.

집에서도 항상 막내였고, 어느 집단에서건 항상 어린 축에 속했던 제가

이제 벌써 서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제가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스스로가 어리다고 생각하는 것을 아이스럽다는 뜻이 아니고 아직 젊고 패기넘치는 시기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어느 나이를 막론하고 좋은 생각이라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저의 어린 시절을 계속해서 떠올려 봅니다.

6학년 때 저는 어떤 아이였는지. 어떤 면에 있어서는 과도하게 성실한 아이였고 좋아하고 즐기는 것이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이성에 대한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할머니와 똑같은 맹목적인 신앙 그것 뿐이었습니다.

어른들의 질책과 벌이 무서웠고, 그래서 그것들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배운 것들을 차곡차곡 쌓아갔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께는... 썩 귀여운 아들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애교나 아양도 떨 줄 모르고 말도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를 무서워 했었고... 어머니보다는 할머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학교에서는 엉뚱한 발표로 아이들을 웃기기를 좋아했고, 별 볼일 없는 아이들과 두루 친하게 지냈으며...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림 그리는 것은 항상 1등이었고, 음악도 참 잘했습니다. 하지만 운동에는 취미가 없어 체육을 싫어했습니다.

엄마 아빠와 함께 관촌사선대나 지리산 뱀사골에 놀러갔던 기억들이 정말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갖고 싶어서 그렇게도 졸라대던 기억도 나고... 그 자전거를 타고서 전주시내를 누비고, 결국 도둑맞고 침울했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어젯밤 새벽에 아기가 태어나는 장면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핏덩어리의 아기가 그렇게 아이가 되고, 서서히 수염이 나더니 이런 남자가 된다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제가 느끼기에도 신기한데 산전수전 겪으시며 직접 3형제를 길러내신 부모님이 보시기에도 참으로 신기하고 하느님의 뜻이 느껴지는 장엄한 일임을 상상해 봅니다.

저는 중학교에 들어가서 이과 공부에 재미를 느꼈습니다. 수학과 과학을 공부하며 이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 지를 배우고 고교 시절에는 별을 사랑하고 천문학과를 꿈꾸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할머니와 함께 키워온 신앙이 덮여 갔던 것 같습니다.

대학에 가서도 종교와 철학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점점 더 염세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기독교 광신도인 친구들도 꽤 있었고 그들과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군대에 들어가서는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2년이 넘는 시간이라는 벽은 정말 두텁고 높고 철조망 투성이였습니다. 육체적 감금과 노동 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과 인격모독에 시달리던 시간, 스스로를 믿고 혼자서 서 있던 자신이 기울어짐을 느꼈습니다. 기대어 놓을 곳은 허공뿐이었습니다. 그 허공에 저는 어릴 적 맹목적으로 가졌던 신앙이라는 것을 띄워 놓았습니다. 필요에 의해 신앙에 의지한다는 비겁한 생각이라는 것을 부인할 여력도 없던 시절은 그 신앙의 힘으로 지나갔는지도 모릅니다.

내무실 막내였던 신병 시절, 쓰레기통을 비우고 다시 내무실로 들어가기 직전 밤하늘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엄마, 나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지?”


오늘 이 편지는 무슨 거창한 글을 쓰려는 것이 아니고 그냥 제 얘기들을 들려드리고 싶어서 쓰고 있답니다. 무뚝뚝한 아들이 쉽게 부모님과 다정한 딸처럼 얘기를 나누게 되는 것이 사실 어려울 것 같아서 글로 대신하려 합니다. 저도 사실은 얘기하고 싶은 욕구가 많답니다. 하지만 저와 부모님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볼 기회가 적었던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5월 1일 토요일 새벽 3시 54분에 저는 잠이 깨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이 외부적인 영향 때문이 아니고 꿈이라는 내부적인 이유에서였다는 것이 참 신기한 꿈이었습니다.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서서히 꿈이 깨어가는 과정이 꼭 어딘가로부터 껍질을 벗고 나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새벽에 깨어 시계를 보고는, 수첩에다가 메모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적은 것을 그대로 여기에 옮겨봅니다.



『환한 나무로 된 집 방이었다.

  커다란 창문으로 환하게 햇살이 내리쬐는 방에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고 그 앞에 성스러운 분이 앉으셨다.

   “네가 보고싶어하는 분이 왔다. 너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한다. 한번 만나보거라.”

  자리에서 일어나니 하얀 저고리 치마를 입은 활짝 웃고 계신 우리 할머니가 들어왔다.

  나는 덥썩 안았다.

   “우리 할매 맞지?”

   “그려 그려 내새끼”

   “할매 잘 있었어? 잘 있어?”

   “암, 그람 잘있재”

   “나한테 부탁할 것이 무엇이여? 빨리 말혀 나 깰지도 몰라”

   “조금 있으면 너네 아빠 칠순잔치 허잖냐?”

   “그려.”

   “그 때 내 사진을 한 장 갖다가 놓거라. 나도 거그 온 사람들좀 볼 수 있게.”

   “그러면 그걸 통해서 볼 수 있어?”

   “그람. 볼수 있재”

   “그려 그려 걱정 말어”

   “나 인제 가야 혀. 잘 있어 할매.”

  나는 할머니의 목 뒤에 있던 검은 사마귀를 이빨로 살며시 깨물었다. 세 번이나. 진짜니까 믿으라는 식으로...

  그 성스러운 분은... 그 음성이 나지막하고 부드러웠으나 사람의 음성처럼 들려오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에 바로 전해졌다.

  그 분과 우리 할머니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 나에게 더할 수 없는 감동이었고 안심이었다. 그 분은 예수님이셨기 때문이다.

  소름이 끼치도록 아름다운 분이었다.』


  할머니가 다른 형들이 아닌 제 꿈에 나타난 이유를 알겠습니다. 저는 이런 부탁을 하면 결코 잊지 않고 그것을 지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단한 부탁이지만 형들은 잊어버리기 쉬울 겁니다. 하지만 저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몇 달 전부터 주일마다 성당에 나가고 있습니다.

  그 동안의 냉담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는 마음 보다는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난다는 반가움으로 가는 발길이라 가볍습니다.

  그 곳에서 할머니와 함께 계시는 그 분과 대화를 합니다.

  희영이도 이번 주부터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희영이네 어머니와 할머니도 천주교 신자라고 합니다.

  어제가 우리 만난 지 300일 되던 날이었습니다. 한결같이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랬던 적이 없었는데 정말 행복합니다. 100일을 넘겨보지 못하고 헤어지곤 했었는데 희영이는 정말 제 여자인 것 같습니다.

  

  저는 정말 복받은 사람입니다. 가장 큰 복은 부모님께서 건강하시고 멋지게 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정말 훌륭하신 부모님이십니다. 노후를 예술과 문화생활, 여행으로 즐기고 계신 부모님이 너무도 자랑스럽습니다. 딸도 없이 삼형제를 훌륭하게 길러내시고, 수많은 역경을 다 이겨내신 승리자십니다. 그러나 저는 일억분의 일이라도 부모님의 은덕을 갚을 길이 없어 답답합니다. 그랜져를 사서 안겨드리고 싶은 꿈을 언제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음악적인 능력은 교직에서 지금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각종 공개수업때마다 극찬을 받고 있고 아이들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합창단에서는 직접 편곡한 곡으로 대회 준비를 하고 있고, 제 음반은 전교생과 교직원, 학부모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주변 아파트 단지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는 아이들이 제 곡을 즐겨 치고 있다고 합니다. 인터넷 까페도 개설하여 아이들과 함께 음악을 듣고 놀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http://cafe.naver.com/utopianist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음악교육 수업연구교사를 하고 싶고, 서울대학교 음악교육 대학원에 진학하여 경력도 쌓고, 동요 편곡집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또한 피아노 연습곡집도 출간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석사 학위는 필수로 따야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겪고 있는 모든 일들과 감정들이 오래 전 아버지께서 느껴보신 일들일 거라 생각하면 참 감개무량합니다. 저도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제가 낳은 자식이 음악이나 교육 쪽에 종사하게 된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겁니다. 교직에서 최고의 자리에 까지 올라 뜻을 펼치신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아울러 그러기까지 최고의 서포트를 해 주신 어머니를 더욱 존경합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모든 삶과 눈물이 고스란히 저의 행복으로 돌아온 것 같아 정말 염치가 없을 정도로 행복합니다.


  뒷산에도 자주 오르시고 아버지 약주는 좀 줄이시고, 어머니는 특히 친구들과 수다도 많이 떠시고 항상 즐겁게 사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뵙지 못하고 연락도 뜸한 것을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는 더 자주 할게요.

  

  내일 밤 늦게나 전주로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학원 공부좀 하고 내려가려구요...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사랑합니다.


2010. 5. 6

막둥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