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웅 찻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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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처럼 쓴 이야기

아내의 척추전방전위증 수술 (1)

정일웅 찻집 2009. 7. 12. 23:21

척추전방전위증....

생소한 병명이다.

척추디스크 탈출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 봤지만 말이다.

나의 아내가 허리통증을 호소한지 7-8년은 더 되었다.

그 때 현대 방사선과에서 X레이 촬영을 하여 본 결과 척추전방전위증이란다.

요추 4번과 5번 사이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5번 척추가 점점 복부를 향하여 미끌어져 내려오고 4.5번 사이의 골 간격이 좁아지면서 척추사이의 디스크가 등쪽으로 밀려나와 신경을 압박하게 되어 통증을 유발하는 병이란다.

 

해마다 한 때 씩은 아내가 허리와 고관절의 통증때문에  일신당 한의원을 찾아가 소위 추나요법이라는 치료를 받고 보약을 먹으며 물리치료를 십여일 이상 받으면 다시금 통증이 완화되어 직장생활을 계속하곤 하였다.

 

"허리는 가능하면 수술하지 않고 생활해야 해!"

"척추는 잘 못 건드리면 오히려 더 나빠 진대!"

사람들은 겁이나는 얘기들을 간간이 들려주고 아내도 이왕이면 수술하지 않고 낳으려 열심히 뒷동산도 올라가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내의 뼈대는 유전적으로 굵고 튼튼하여 힘도 좋고 쉽게 피로도 느끼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항상 건강하고 밝게 생활하는 모습 때문에 남편인 나조차도 별 걱정을 하지 않고 지낸지가 벌써 6~7년도 넘었다.

 

하지만 한 달 쯤 전에 또다시 통증이 와서 한방치료를 받다가 

'이게 아닐거야 벌써 58세, 환갑을 앞둔 나이인데 정확한 진단을 받고 조치를 취하여야 해!'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

"여보! 다시 한 번 X레이를 찍어 볼까?"

"나도 오른쪽 팔이 위 아래로 잘 올라가지 않아서 병원에 한 번 가보고 싶은데...."하고 넌즈시 말을 건냈더니

쾌히 동의를 표하기에 '도 신경외과'에 가기로 하여 이튿날 아침식사를 마치고 바로 병원으로 들렸다.

6년 전에 찍었던 X레이 필름을 들고 갔음은 물론이다.

'도 신경외과'의 도 병룡 박사는 아내의 허리를 촬영하여 6년 전 사진과 비교하며 설명하여 주었다.

"사모님! 6년 전보다 더 악화 되었는데요! 수술하셔야겠습니다."

"전방전위는 수술하면 별 부작용 없이 잘 낳는 증상이니까 제가 소견서를 써 줄테니 대학병원으로 가시죠"

그는 수술 전까지 통증이 오면 복용하라는 약 3일 분을 처방해 주었다.

 

나의 목 뒤의 혹을 떼어준 의사이기에 나는 그분의 말에 무조건 따르기로 하고 아내를 수술하기로 결정하였다.

아내도 순수히 나의 결정에 따랐다.

 

수술전에 아무래도 의사인 둘째 아들에게 말은 해 봐야 하겠기에 전화로 알리고

큰아들에게도 전화를 하여 수술한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 날 밤 큰 아들 '상범'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  엄마 수술하실려면요 이번 주 금요일 날 서울로 올라오셔서 '우리들 병원'으로 가셔요 제가  '최 건'원장님 앞으로 09년 6월 26일 금요일 오전 10시에 예약 접수 해 놨어요.....전 날 미리 오셔서 제 집에서 주무시고 병원에 가시죠!"

'상범'이 녀석도 나를 닯아서 성질이 불같이 급하여 서울에 자기 친구들 여러 명에게 수소문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그래! 그러면 금요일 10시에 병원으로 가서 거기서 만나자!"

"아뇨! 제가 그러면 강남 터미널로 모시러 갈게요....몇시 차로 오시게요?"

"전주에서 오전 6시 출발하는 고속버스로 올라 가마!"

 

고속버스는 8시 30분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막둥이 '상원'이가 그 날은 자기 반 학생들이 모두 교과 수업을 하는 날이라서 담임인 자기는 수업이 없다고 하며 조퇴를 하고 마중을 나오고 상범이는 주차장에 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아들들 키운 보람이 있구나!' 생각하였다.

 

각종 검사가 시작되었다.

'x레이'촬영 ',MRI'촬영, 피검사, 혈압, 골밀도측정, 심전도 검사, 등 등....하루에 백여만원이 들어 갔다.

오후 3시 경이 되어 주치의를 다시 만났다.

나이가 지긋한 '최 건'원장은 첫 눈에 신뢰감이 넘쳐났다.

"아주 좋습니다. 수술에 아무 문제가 없을거 같습니다. 수술하시면 아주 좋아지고요....(일정표를 살펴 본 후)6월 29일 날 입원하시고 30일 날 수술합시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우리는 그날 바로 전주에 내려와서 수술 후 입원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기 시작하였다.

 

29일 새벽 서울에 올라가 전철을 타고 병원으로 가서 입원수속을 마친 후 입원을 하였다.

수술전 검사 몇가지가 시행되고 이튿날 오전 11시에 수술실 침대를 밀고서 젊은 청년이 들어와 아내를 싣고 엘리베이터로 들어 갔다.

"수술은 5시간 정도로 예상하시고요 병실에서 보호자는 대기 하십시요"

아내를 실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허탈한 심정으로 텅 빈 아내의 침대에 돌아와 앉았다.

아내와의 지난 날들이 초고속 필름을 돌리는 영상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절로 하느님을 부르며 기도에 빠져들었다.

주님밖에 의지할 곳이 없었다.

 

불안, 초조, 안쓰러움, 안타까움, 불쌍한 마음이 뒤범벅되어 나를 흔들었다.

스물두살 어린 나이에 온 집안 식구들의 결사적인 반대에도 무릅쓰고 서른살 노총각인 나에게 시집와서 온갖 고생 다 하면서도 한번도 낯을 찡그린 일이 없이 밝고 명랑하게만 살아온 내 아내.....그 세월이 어언 36년....

 

지금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어 놓고 척추 4, 5번  사이에 인공 디스크를 집어 넣고 또 다시 환자를 뒤짚어 놓고 등골의 좌우를 세로로 두 군데나 절제하여 두 개의 척추를 고정하는 장치를 좌우에 설치 한단다.

생각만 하여도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치는 끔찍한 수술이다.

 

아! 별 탈이 없이 잘 끝나게 되기만 하느님께 빌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정지된 듯 흐르지 않는다.  

묵주기도를 하다가 멍~하고 허공만 바라 보고 있다가 또 다시 기도에 열중하려 하다가....마음이 안정되지를 않았다.

우연히 알게된 제자들이 위로와 격려의 전화가 걸려왔다. 옥희, 영란, 명란, 옥란이 혜숙이...모두 기도해 준단다.

성가대원들의 격려와 염려의 전화도 걸려왔다. 로즈마리, 베네딕또, 아나스타샤.....모두 고마운 사람들이다.

 

.....................

 

"최우남 환자분 지금 회복실에서 병실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간호사의 전화가 오후 4시 경에 걸려왔다.

온 몸이 차갑게 식은 아내가 거의 혼수상태로 온 몸을 심하게 떨며 괴로운 신음을 내고 있었다.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는 모양이다.

병실의 다른 환자들이 모두 놀라서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아내의 몸엔 소변줄, 복부에 피 받는 봉투, 링거액과 무통주사 줄들이 덜래덜래 엉겨붙어 있었다.

아! 살아서 돌아왔다.

전신 마취에서 깨어 나고 있는 것이다.

 

"여보! 고생했어! 장하다! 최우남! 정말 장해! 이제 낳는 일만 남았어....!"

"당신이야? 나 아파 죽겠어 ....춥고 떨리고 구역질이 나서 미치겠어....."

아내의 고통스런 표정은 너무나 처참하였다. 

같은 방의 환자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저러지? 나는 수술실에 들어 간 뒤로 아무것도 모르고 저렇게 아프지 않았는데...'

'앞 뒤로 째서 그런가 봐! 대수술이라서 그런가?'

'아침까지 쌩쌩하던 아줌마가 ....무서워서 못 보겠네.....'

 

나는 간호사실에 달려가 환자가 너무 괴로워하니 빨리 조치를 취해달라고 호소하였다.

간호사가 바로 뒤따라 왔다.

"구역질이 나신다기에 무통주사를 정지시켰지요!"

"뭐라구요?" 나는 화가 버럭 치밀어 올랐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진통제 놓아 드릴게요!"

진통제를 맞은 아내는 춥다고 하였다. 이불 하나를 더 덮어 주자 스르르 잠이 들었다.

 

복도를 지나 가다 보면 많은 환자들이 링거 행거를 밀면서 걸어다니고 있었다. 

아내도 곧 저렇게 걷게 되겠지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한두 시간을 달게 자고 난 아내가 눈을 뜨며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뜻밖에 전주에서 '문소영'이 병문안을 왔다.

소영이는 가늘디 가는 손으로 나의 아내의 어깨며 다리를 주물러 주는 모습을 보며 친 모녀사이같은 '대모' '대녀'사이라는 걸 실감했다.

전주까지 내려가야하는 소영이를 억지로 보내고 나자 큰 아들 상범이가 며느리와 손녀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아내는 이들을 보며 잠시 통증을 잊는 듯 했다.

 

이튿날 아침 허리에 둘러 차는 플라스틱 허리압박 보조기를 가져와 허리에 차고서 누었다 일어나는 연습을 시켰다.

신기하게도 아내는 스스로 일어나 몇 발자국 걷는 것이 아닌가?

증상은 시시각각으로 좋아 지고 있었다.

 

"걸을 수 있으면 소변줄 뽑아 드릴게요!"

수술후 이튿날 거추장스런 소변 줄을 뽑았다.

 

상원이는 어머니의 회복도 중요하지만 아빠인 나의 건강을 더욱 걱정하여 내가 편히 잘 수 있도록 병원 옆의 모텔을 며칠간 예약하였다고 한다.

상원이는 연 3일간을 병원에서 작은 보조침대에서 자고 아침에 학교로 출근하였다. 기특하고 고맙다.

수술후 3일째 되는 날 배를 뚫고 들어간 피 주머니를 제거하였다.

이어서 링거병도 제거하고 상당히 자유스런 몸이 되었다.

 

수술한지 4일 째인 토요일 7월 3일인데 아직도 아내는 1분 이상 서있지 못한다.

수술전에는 아프지 않던 오른쪽 엉치와 허벅지가 당기고 아프단다. 

최건 원장님이 아침 회진을 오셨기에 오른쪽 통증을 말씀드렸다.

"내일 MRI 한번 찍어 봅시다"라고 간단히 말하고는 미소만 지어 보였다.

 

전주에서 아내의 영세 대모인 최덕자 이사벨라님과 전정숙 미카엘라님이 찾아왔다.

환자의 손을 잡고 드리는 두 사람의 간절한 기도가 분위기를 숙연하게 하였다.

이들의 기도에 아내는 많은 위로를 받고 그들이 돌아간 후 부터 시시각각 증세가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떠나고 나서 MRI 촬영을 하였다.

촬영이 끝나고부터는 서서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화장실도 혼자서 갈 수가 있게 되었다.

둘째 며느리가 이틀 동안 병원에서 잠을 자며 간병하였다. 간호사 출신이라서 환자의 머리를 감기는 거나 옷을 갈아 입히는 솜씨가 남달랐다.

 

7월 6일 월요일 아침

회진을 오신 최건 원장님이 미소 가득한 얼굴로 아내를 바라보며

"어제 찍은 MRI를 보니 아주 좋습니다. 오늘이나 내일 퇴원하셔도 됩니다."

"아니 아직 제대로 걷지고 못하는데 퇴원이라니요?" 나는 항의 비슷한 말투로 말하였다.

"이제 병원에서 할 일은 다 했구요....회복하는 시간만 남았으니 집에 가셔서 가까운 병원에서 수술자리를 소독만 이틀에 한번씩 하시면 됩니다."

 

나와 아내는 화요일에 퇴원하리고 결정하고 간호사에게 말하였다.

 

퇴원 수속을 마치고 7백 2만 여원의 치료비를 카드로 결재하였다.

 

아들 셋이 모두 퇴원은 자기가 운전하여 어머니를 전주까지 모시겠다고 하였으나 공중보건의사로 군대 생활을 하고있는 둘 째 아들 인범이에게 서울로 올라와서 어머니를 모시라고 하였다.

 

조수석 의자를 뒤로 넘겨 놓고 그 위에 담요와 이불 등을 깔아서 편안한 좌석을 만들어가지고 인범이가 올라왔다.

승용차의 좁은 문으로 힘겹게 들어가 누운 아내와 뒷좌석에 내가 앉고 차가 출발하였다.

청담동 길엔 유난히도 차가 많았다.

첫번째 신호등에서 서서이 브레이크를 밟자 아내의 누은 몸이 앞으로 쏠리며 수술자리가 압박되었는지 비명을 지르며 신음하였다.

차를 가까스로 길가에 세우고 아내를 뒷좌석으로 옮겨 실었다.

훨씬 덜 아프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고속도로까지 무사히 빠져나와 정안 휴게소에 들려 점심을 간단히 하고 아내는 차의 의자에 누어 휴식을 취한 후 출발하였다.

한참을 달려오다 창 밖을 보니 저 멀리 갓길에 승용차 한대가 세워져있고 차의 본네트 가 열린채 김이 풍풍솟아오르고 있었다.

차의 주인인듯 싶은 젊은 남자는 휴대폰으로 어딘가 연락을 하는 모양이다.

"인범아! 저것 봤지? 자동차를 자주 점검하지 않으면 언제 저런 난감한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러게요!"

한참을 더 달렸다.

조용히 전을 하던 인범이가 소리쳤다.

"어! 아버지! 제 차에서도 김이 나는 것 같은데요?"

"뭐? 뭐라고?! "

차선을 2차선으로 바꾸며 속도를 늦추자 ....어럽쇼! 이게 웬일인가?

우리가 탄 차의 본네트 가장자리에서 김이 픽픽 새어나오고 있는것이 아닌가?

"어!! 야! 이거 야단 나겠다. 빨리 어디 빠져나가는 길이 있는가 보고 가장 가까운 곳으로 빠져 나가자!"

차에서는 계속 픽!피식! 하며 연기인지 김인지 모를 하얀 증기가 본네트의 양쪽 아가리에서 새어나고 있엇다.

길가에 도로 표지판이 보였다.

'연무 2km'

"인범아! 저기 표지판 보이지? 빨리 연무로 빠져서 차를 먼저 손봐야 겠다.!"

"빠져나가는 길이 빨리 나와서 다행이구나!"

 

연무 요금소에서 통행료를 내느라고 정지하였다.

'휴!'- 가까운 곳에 정비소가 있겠지.....

 

"어! 아버지! 차가 시동이 꺼졌네요! 이거 어쩐데요?"

순식간에 뒤에 차들이 몇대가 밀려 대기하고 있었다.

나와 인범이는 서둘러 차에서 내려 기어를 중립에 놓고 인범이는 유리창을 내린 문틀을 왼손으로 밀고 오른손으로는 핸들을 조종하고 나는 차의 뒤에서 밀어 광장의 길가에까지 가져갔다.

아내는 뒷좌석에 누운 채 태연하게 말하였다.

"정말 다행이다.! 만약에 달리는 도중에 시동이 꺼졌더라면 얼마나 위험했겠어!"

요금소 직원들이 누어있는 화자와 우리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인범이가 퀵서비스에 전화를 하였다.

한 참 만에 위치확인 전화가 왔다. 몇번의 전화가 또 걸려오더니 렉카 한대가 도착하였다.

환자는 이송을 하지 못한단다.

1시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요금소에 빈 택시 한대가 요금을 내고 있었다.

익산 개인 택시였다. 그 차가 전주에 갈 수 있단다.

아내를 옮겨 태우고 짐을 트렁크에 옮겨 놓고서 인범이는 차를 수리하여 집으로 가라고 하고 무사히 집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