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웅 찻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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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란처럼 살아온 나의 이야기 59

15. 들 꽃 같은 아이

15. 들 꽃 같은 아이 나의 교단생활의 처음 출발은 꿈같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우리 반 학생 17명은 남자애들이 열한 명에 여자아이가 여섯 명이었다. 어미 닭이 병아리들을 이끌고 다니듯 나는 아이들을 이끌고 이곳저곳 자리를 옮겨가며 수업을 하였다. 산 위의 커다란 바위 위와 시냇가의 모래밭이 우리의 교실이고 운동장이었다. 냇가에서 공부하다가 다슬기를 잡는 날엔 가까운 학생의 집에서 된장을 풀어 삶아 먹으며 마루에서 공부를 하였다. 산 위엔 위가 평평하고 집채만큼 커다란 바위들이 많이 있어서 비가 오지 않고 따뜻한 날엔 공부하는 교실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뒷산의 바위에서 공부하는 날엔 쉬는 시간에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화장실을 지정하여 주는 수밖에 없었다. "오른쪽의 저쪽 바위 뒤는 남자 변소이고 ..

14. 어린이 사랑의 눈이 뜨이고

14. 어린이 사랑의 눈이 뜨이고 사흘째 되던 날 새벽 , 4시경에 눈이 떠지고 누어있는 내 눈앞에 꿈 결 같은 정경이 펼쳐졌다. 밤송이처럼 긴 머리카락에 뼈만 남은 초라한 아이들 ... '엿쭈웅 쉬어........' 앙상한 그 목소리... 가마니 위에서 뒹구는 아이들... 우루루 내 곁에 몰려와 나의 바지 가랑이를 만지던 손등 튼 고사리 같은 손...손...손... 나는 갑자기 정신이 확 맑아졌다. '아니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보고 싶다' 갑자기 그 꼬맹이 녀석들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 '그들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나의 정신이 언제부터 이토록 타락하여졌는가?' '나는 그들보다 더 가난한 가운데서 성장하지 않았는가?' '그 아이들을 어루만져 주고 싶다.' '그 아이들이 바로 나 자..

13. 갈등에 싸여

13. 갈등에 싸여 집에 오는 버스 속에서 나의 마음은 너무나도 착잡하고 쓸쓸하여 열등감과 서글픔에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학교는 넓은 운동장이 있고 운동장 가엔 빙 둘러 플라타나스가 심어져있으며 철봉, 능목, 모래판과 그네, 시이소,가 있으며 기다란 교사 건물과 건물 중앙에 현관이 있고 현관엔 종이 달려있는 학교....아무리 작은 학교라도 그 정도의 학교라는 생각이었다. 아! 논바닥에 가마니 교실이 학교라니..... 집에 가서 학교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친구들은 모두 역사 깊은 학교에 발령을 받았는데 나는 왜 이다지도 서글픈 신세로 나의 첫 직장을 시작해야 하는가? ........................ 고1학년 때의 이른 봄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어 10년의 투병..

12. 초임지 부임

12. 초임지 부임 나의 교단생활 첫 출발은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 학석리에 신설되었던 학석 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66년 4월 1일 임실군 교육청에서 사령장을 받아 들고 순창행 완행버스에 올라탄 나는 사뭇 부푼 기대와 설렘을 느끼며 갈담이라는 곳에서 버스를 내렸다. 학석초등학교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알지 못하는 나는 같이 내린 승객 중 이곳 주민 인 듯 보이는 낯선 농부에게 "학석초등학교를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고 나서 산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쩌짝 산밑에 질(길)로 쪼옥 따라 올라가면 있씰것잉게 가 보쇼"하는 것이었다. 트럭 한 대쯤은 다닐 만한 꽤 넓은 산길은 참으로 한적하였다. 나지막한 야산이 줄기줄기 이어진 산자락에 구불구불 이..

11.전주교대 입학시험과 졸업까지

11. 전주교대 입학시험과 졸업까지 입학시험을 보러가는 날 그 날은 무척 날씨가 차가왔다. 매형은 나에게 자기의 닭털 점퍼를 벗어주며 "따뜻하게 입고 시험 잘 봐" 하며 격려하여 주었다. 학과시험을 치렀는데 그다지 어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수학시험이 자신이 있었고 영어도 쉬웠다. 그러나 내가 쉬우면 누구나 다 쉽지 않겠는가? 1차 합격을 하는 것만도 3.7대 1의 경쟁인데.... 걱정도 되었지만 운명에 맡기기로 하였다 1차 시험(학과) 결과를 발표하는 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나는 혹시 떨어졌을지 모르는 불안감 때문에 합격자 명단을 붙인 교육대학의 교문에 가기가 싫었다. 소주 한 병을 사다가 깡 술로 마시며 방구석에 앉아있었다. '조 길동'이가 찾아와서 큰소리를 지르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10. 고 3 수험생이 되어

10. 고 3 수험생이 되어 고등학교 3학년 여름날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밤늦게 돌아와 잠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조용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평소의 목소리가 아니었고 뭔가 어머니의 속마음을 얘기하시려는 것이란 걸 직감하였다. “일웅아!” “예???” .......................... "야 ! 일웅아! 너 교육 대학교 시험 쳐서 갈 수 있것냐 ? ! " "거그 가면 바로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 허더라" "나는 니가 거그 갔으먼 좋겄다!" ............... 3학년 여름방학이 가까워진 7월 어느 날이었다. 난데없이 엄마가 내게 던지듯 한마디 하신 말씀. .................. ................... 어머니께서는 나의 초등학교시절을 회상하고 지금도..

9. 가출시절을 끝내고

9. 가출시절을 끝내고 사춘기를 질풍노도와 같다고 했던가? 나는 짧지만 진한 사춘기의 태풍을 서울에서 맞이하고 있었다. 삶의 욕구, 미래의 삶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갈망, 내가 해야만 하는 이 일의 의미, 당장 육체적 쾌락으로 빠지려하는 본능적 충동과 이성의 반란, 돈을 저축하여 학업을 계속해야한다는 목적의식에서 나의 몸과 마음은 갈등과 회의 번민과 혼돈을 거듭하며 하루하루 세월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중국집에서 생활하는 동안 사춘기를 보내는 나는 실로 성적 탕아로 전락하기 쉬운 위험한 곳이었었다. 주방의 종업원들은 대부분 군대의 기피자들이었고 인근에 있는 '시구문'에 있는 사창가는 종업원들이 젊음의 욕구를 분출시키는 장소였다. 이들은 수시로 나를 유혹하였고 나 역시 끓어오르는 젊음의 유혹을 받지 않을 수..

8. 새로운 직장 중국집 '예양춘'과 '신한관'

8. 새로운 직장 중국집 '예양춘'과 ‘신한관’ 극장 일을 그만 두기로 작정하고 다른 일 할 곳을 찾기로 마음먹은 것은 배고픔 과 그림을 배울 수 없다는 절망 때문이었다. 아무리 소질이 있어도 앞을 가로막은 장벽을 넘는 데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고 또 얼마나 많은 집단 폭행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이건 내가 가야할 길이 아니다.! 국수 한 그릇을 먹고 나도 돌아서면 바로 배가 고파오는 것이었다. 체중은 너무 줄어들어 입고 올라온 교복이 헐렁하여졌고 켄버스를 양손에 들고 걷는 것조차 힘들어 졌다. ............... 이래선 안 된다.! 내가 살아야 뭐든 할 수 있다. 가장 시급한 것은 내가 우선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살기 위해선 먹어야 한다. 배부르게 먹고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으로 가..

7. 가출시절(낙원극장 선전부)

7. 가출 시절 편지 한 장을 써 놓고 영어책과 콘사이스 노트 한권을 넣은 가방을 들고 무작정 서울로 집을 떠난 날은 3월 5일 이었다 서울 역에 내린 나의 마음은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강아지 같은 신세였다. 목적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었다. 신문사에서 받은 월급 몇 푼이 생명을 지탱할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곳저곳 전전하며 '무엇을 하고 지내야하나'하는 걱정에 하루 종일 쏘다니며 서울 지리를 익혔으며 밤에는 서울 역 대합실의 벤치에서 나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잠을 잤다. 덮고 잘 신문지도 구하기가 힘들었다. 몹시 춥고 무섭고 고독하였다. 참으로 세상은 넓고 갈 곳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처량한 건지 서러움이 뼈에 사무쳤다. 셔터가 내려진 상가에 간판의 불이 꺼지고 거리에 전차도 끊기면 그 많던 사..

철이 들던 시절 아버지는 세상을 뜨고

6. 영생중학교를 졸업 하던 해 1959년도, 그러니까 4.19의거가 일어나기 직전 중학교 3학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중학교 3학년의 신분으로 상당한 애국 소년이었나 보다. 대모에 참가하여 경찰들과 몸싸움을 하고 저항하다가 경찰서에 끌려 들어가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저녁때 풀려났으나, 그 다음 날 다시 대모에 참가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민주화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확신하며 또 다시 길거리에 나와 '독재 정권은 물러가라!' '자유당 정권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쓸고 다녔다. 나의 중학교 3년 세월은 정말 바쁘게 뛰어 다니는 세월이었다. 신문배달 때문에 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가로등도 없던 어두운 길을 뛰어서 전주 역 까지 가노라면 시원한 공기가 온 몸 속에 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