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시절 수녀님께 배운 기도)
해마다 12월이 되면 음산한 날씨 때문일까? 몸도 마음도 움츠려들고 조용히 앉거나 누어서 지난 삶을 생각하고 싶어진다.
금년 12월은 내 생애에서 그 쓸쓸함이 좀 더 심한 듯 하다.
지난 8월 말에 41년 6개월간 몸담던 교직을 떠나 하릴없는 신세가 되어 인생의 종말을 맞이하는 것을 실감하기 때문일까?
그러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하며 지그시 눈을 감고 한없는 감사를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하느님이 곁에 계시다면 그의 옷자락에 얼굴을 묻고 끝없이 눈물을 흘려보고 싶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 하나를 가까스로 뿌리를 내리게 하고 덤불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으로 용케도 숨쉬게 하며 이슬을 먹여 살려주신 나의 하느님
내 일생에 너무도 일찍 닥쳐온 슬픔과 절망
목포에서 태어나 전주로 이사 온 다음 ‘성심유치원’에 다니던 나의 눈에 찍혀 영원히 각인된 것은 아버지가 새벽녘 피를 토하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천주님은 착한사람의 기도를 가장 잘 들어 주신다’는 ‘알릭스’ 수녀님의 가르침은 하얀 도화지 같은 내 마음에 처음으로 써진 글귀였기에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았다.
식사 전후 기도 때, 조과 만과 때(아침 저녁기도), 삼종기도 때, 성호를 그을 때마다 저절로 입속에서 나오는 기도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천주님! 저를 착한 아이 되게 해주세요, 아버지 병을 낫게 해 주세요! 어머니 말씀 잘 듣고 교리공부랑 학교공부랑 열심히 할게요!”
나의 기도에도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병이 낫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가지고 온 돈은 모조리 약값에 다 쓰이고 월세집을 전전하며 어머니는 거리에서 풀빵을 만들어 팔아 4남매를 먹여 살리셨다.
중학생이 된 나는 3년간 신문배달을 하여 약값에 보태드렸다.
나의 기도는 하루에 수 백 번도 더 하였고 ‘치명자산’과 ‘치명터’(지금의 해성학교 윤호관 자리)에 새벽에 다니는 9일기도를 수없이 반복하였다.
하지만 나의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장학생이 되었다는 나의 기쁜 소식을 들은 다음날 새벽 돌아가셨다.
누우신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나는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의지를 상실하고 가출하여 서울에서 취직을 하였다.
극장의 선전 간판 붙이는 일. 중국집의 그릇 닦이를 하며 목적도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 때의 나의 기도는 다른 말로 바뀌었다.
“천주님! 저를 착한 아이 되게 해 주세요!, 아버지 영혼이 천당에 가게 해 주세요! 저 돈 많이 벌어서 어머니 잘 모실게요”
하느님께서 나의 건강을 지켜주시고 중국집에서 수많은 배달원들이 나를 꿰어 사창가를 데로고 가려 했지만 유치원시절 ‘알릭스’ 수녀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은 나를 잘 지켜주셨다.
“눈에는 안보여도 호수천신이 등 뒤에서 항상 지켜보시며 따라 다닌다”
1년 후에 그동안 저축한 돈을 가지고 전주에 내려와 야간 학교에 복학하고 낮에는 자전거포에서 일을 하였다.
고 3이 되어 여름방학 때 어머니가 “너 교육대학교에 가거라 거그 가면 선생님하니까 좋겠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공부에 완전히 담을 쌓고 지내던 나에게 청천벽력같은 말씀이었지만 학교를 주간으로 옮기고 정말 열심히 하느님께 기도하며 거의 잠을 자지 않고 공부하여 교육대학에 합격을 하였다.
첫발령을 받고 나니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다.
어머니를 모시고 임실로 이사하여 성당 관사의 빈 집을 얻어서 살며 사무장 일과 사목회 일을 하는 동안 어느덧 노총각이 되어 나이가 30이 되었다.
많은 시련 끝에 결혼을 하게 된 나의 아내 ‘프리스카’는 나와 우리 집안의 새로운 힘이 되었다.
아내의 희생과 배려 속에 삶이 차츰 개선되어가기 시작하였다.
이후 중등학교 준교사 시험에 합격하여 중등으로 자리를 옮기고 미술교사가 되어 여기 저기로 다니다가 교감자격을 얻게 되고 이후 교장이 되어 영예롭게도 ‘한국전통문화고등학교’에서 정년퇴직을 하였다.
준교사시험을 치를 때, 교감 자격에 도전할 때, 교장으로 발령을 받을 때, 한결같이 나의 힘이 되어주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었다.
간절한 기도와 뼈를 깎는 나의 노력이 결합되면 하느님은 모든 나의 소원을 다 이루어 주셨다.
이제 나의 기도는 ‘나의 자식들과 손자들이 하느님의 착한 양이 되도록 해 달라는 것’뿐인데 나의 자식들은 아직 나의 어렸을 적처럼 하느님께 매달리는 삶이 아닌듯하여 아쉽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아이들에게도 하느님의 따뜻한 손길이 미치리라 믿는다.
유치원시절에 수녀님께 배운 기도는 평생 나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었고 내 마음에 평화를 주고 시련을 이기는 힘이 되었다.
2007. 12. 11. 솔내성당 성가대 지휘자 정일웅(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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